144. 공사장 추락 사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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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공사장 추락 사고 (6)
2022.04.23.
최종욱의 필적 감정 결과가 나왔다.
일기장에 나온 필적을 토대로 유서가 위변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유서의 위조를 100%로 만든 건 사망한 최종욱의 부친 최상덕 때문이었다.
“명성정공에서 나온 사람이 나보고 일기장을 달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뭔지도 모르고 준 거지!”
경찰 조사에 불려 나온 최상덕은 전과는 180도 다른 태도로 진술했다. 돈을 더 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뭉갠 강대희 이사에 대한 억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은 유서를 회사 측에 전달한 일이 없다는 거지요?”
“네, 그렇다니까요! 전 그 유서랑은 아무 관련이 없어요. 죽은 아들놈만 불쌍하죠.”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최대한 동정심을 자아낼 수 있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최상덕 씨…… 제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드님이 자살로 최종판명이 되었을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왜 이제야 그러시는 겁니까?”
“그거야…… 나도 처음에는 회사 측에서 말하는 대로 믿었지. 자살할 이유는 없지마는 유서가 떡 하니 나왔으니까…….”
최상덕의 진술을 명성정공 측에서 정면으로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명성정공의 약점을 최상덕에게 알려 준 사람은 함께 경찰 조사에 응한 이상현 손해사정사였다.
“한 경사님, 통상적으로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판단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합의금 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었고요?”
순간 당황해 변명하려는 최상덕이었지만, 이상현 사정사는 그런 그를 얼른 제지하고는 대신 답했다.
“아버님으로서는 장례비 명목으로 의례 사측에서 제공하는 돈인 줄 알았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3천만 원이라는 돈이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별거 아닌 돈이지 않습니까?”
“장례비 조라…… 뭐 그렇다고 합시다! 근데…… 어쨌든 최상덕 씨가 유서 위조에 협조하신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걸 몰랐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요.”
“경사님 말씀은 거꾸로 말하자면 알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법적인 증명이 어렵다는 걸 파고드는 이상현 사정사였다. 소송으로 가게 되면 법원의 판단도 이미 사망한 최상덕의 유서 위조에 대해서 그의 부친에게 죄를 묻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유서가 위조됐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산재 소송에 미치는 결과였다. 애초에 최종욱이 자살했다는 명성정공의 주장에 오류가 있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정수 경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로서도 최상덕의 혐의를 더는 파고들 수 없었다.
“경사님, 추가로 조사가 필요하시면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흐음…… 잠깐만요…….”
자리를 비운 한정수 경사가 10분이 넘어서야 다시 나타났다.
“이상현 손해사정사님이라고 하셨죠?”
“네, 아까 명함 드렸잖습니까?”
“아! 맞다! 그러네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의뢰인분과 함께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경사님.”
옆에 앉아 있던 최상덕이 히죽 웃으면서 물었다.
“이제 우리 가도 됩니까?”
“네, 추후 조사가 있을 시에 연락드리죠.”
한 경사는 최상덕이 어떤 인간인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그를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난리가 난 건 임철호 서장이었다. 적당히 넘길 수 있었던 한 비계공의 죽음이 리안건설의 문제로까지 번질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최상덕에게 윽박질러 그의 진술을 뒤엎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변수는 그가 산재 소송을 대리한다는 이상현 손해사정사와 함께 나타났다는 거였다.
엄연히 사망한 최종욱의 보험처리에 관한 사건이었기에 부친인 최상덕이 손해사정사와 동행하는 걸 막을 명분도 없었다.
임철호는 초조하게 책상 주변을 서성이다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최 대표님, 저 임철호입니다.”
―저희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본인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최진태의 첫 마디에 임철호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거 저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해서요…… 최상덕한테 진술을 받아낸다고 해도 필적 감정을 뒤집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해합니다. 서장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원칙대로 처리해야죠.
최진태의 반응은 의외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해 줄 것을 우겼던 그였다.
오래 살고 볼 일인가? 임 서장의 고민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근데 말입니다. 서장님.
“말씀하십시오. 최 대표님.”
―며칠 전에 연남경찰서 소속 경찰이 한식당에 출동한 적이 있었죠?
“네……?”
임철호는 이종도와 윤재구, 그리고 산업안전감독관 석재곤이 모인 자리에 경찰이 출동한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희 리안건설의 대표님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한 잡음이 또 새어 나올까 싶어서요. 아시다시피 번암지구 개발 건이 지난번에 좀 시끄러웠지 않습니까?”
“아…… 그, 그렇죠!”
최진태는 이미 한식당의 CCTV를 모두 삭제한 상태였다. 이제 경찰 기록만 없앤다면 그날의 일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었다.
* * *
연남 지방법원.
“본 법정 판결합니다. 고인인 최종욱은 리안건설의 하도급 업체 명성정공의 비계 작업 중 추락 사망한 것이 명백하다. 또한 추락 시 발판을 제대로 시공하지 않았고 안전고리 또한 제대로 걸지 않았으므로 본 사건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정한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이상현 손해사정사는 유족인 이경미를 돌아보며 위로의 미소를 건넸다.
“유족급여와 장의비 위로금을 받으실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사정사님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저야 늘 하는 일인데요. 앞에 있는 변호사님이 수고하시는 거죠. 하하!”
소송의 모든 건 이상현 손해사정사가 준비했지만, 변호사법에 따라 재판에는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말하지 말라고 한 건데……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무슨 말이요……?”
“소송 비용 말입니다. 전액 다 박강준 차장님이 내셨습니다.”
“네? 그분도 직장인 아니신가요?”
“그렇죠. 그래서 더 대단한 거고요.”
이경미는 눈동자가 촉촉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상금 받으면 제가 소송 비용은 드려야 할 거 같아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건 아닌 거 같아요…….”
“하하! 아마 박 차장님께서 받지 않으시겠지만, 그건 나중에 말씀하시죠. 어쩌면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산재를 인정받았으니 이제는 명성정공으로부터 보상금액도 협상해야 하고 산재 보상금을 주는 근로복지공단과도 또 싸워야 합니다.”
갈 길이 멀었다. 최종욱의 죽음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경미야…… 나 왔다.”
뻘쭘하게 다가오는 남자는 시아버지인 최상덕이었다. 이제 거금의 보상금이 나오게 생겼으니 며느리인 이경미에게 태도를 바꾼 그였다.
“오셨어요?”
“승소했으니 다행이다! 하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아니었으면 이 소송 이겼겠냐?”
“……그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상현 손해사정사도 착잡한 표정으로 둘 사이를 바라봤다.
“사정사님 그럼 보상금은 언제 나오는 겁니까? 제가 듣자니까…… 무슨 가동연한인가 그런 방식이 있다던데…….”
“네, 아버님. 근로자가 일할 수 있었던 기간까지 계산해서 보상하는 거죠. 제가 그건 잘 협상하겠습니다.”
“하하! 역시 사정사님이 계시니까 이렇게 제가 든든합니다!”
이경미는 보상금 얘기를 꺼내는 최상덕을 냉랭하게 쳐다봤다.
“뭐냐? 그 표정은?”
“아버님 약속한 대로 보상금은 제가 잘 챙겨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야! 내가 뭐 그런 거 때문에 여기까지 나온 줄 알아? 얘가 또 삐딱하게 나가네? 싸가지없는 년…….”
“아버님, 죄송하지만 이제 저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야? 이거 도와 달랄 때는 언제고 화장실 다녀왔다고 안면 바꾸는 거냐?”
“그이 살아 있을 때도 아버님 밑으로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근데 이렇게 죽어서까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이경미였다.
“이게 어디서 수작이야!”
버릇처럼 손을 든 최상덕이었다.
턱!
이경미를 향해 든 손을 붙잡은 건 뒤늦게 법정에 도착한 강준이었다.
“최상덕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닌 거 같은데요?”
“……뭐요?”
“명성정공 강대희 이사가 유서 조작은 전적으로 최상덕 씨가 한 거라고 미루더라고요. 아까 요 옆에 형사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진술하던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으시겠어요?”
“강 이사 그 새끼가! 진짜……!”
“조언을 드리자면 변호사부터 구하셔야 할 거 같아요. 명성정공이 회사는 쪼끄매도 법무팀은 세거든요.”
강준의 말에 얼굴이 굳는 최상덕이었다. 당장 생활비도 없는데 변호사 의뢰를 할 돈은 더더욱 없는 그였다. 잘못하다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경미야…… 어…… 어쨌든 네가 좀 도와야겠다. 너 가진 돈 있지?”
“저도 일을 못 한 지 몇 개월째예요. 제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리고 말씀은 안 드렸는데…….”
“뭐? 무슨 말?”
“저 임신했어요.”
“……뭐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이경미의 배가 불러 있었다. 전에는 아직 배가 불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강준을 비롯한 주변인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거였다.
“그이 애예요. 아버님 손주라고요!”
최상덕은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비록 한평생을 한량처럼 살며 아들의 등골까지 빨아먹고 살았지만, 새로운 손주가 태어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뭘 어떻게 해요? 저 혼자서라도 잘 길러야죠. 그래서 저한테 보상금이 중요해요. 아버님. 그 보상금 우리 그이가 남겨 준 유산이나 다름없다고요!”
더는 돈 얘기를 꺼낼 수 없는 최상덕이었다. 일순간이었지만 그는 마치 각성한 듯 보였다.
‘언제까지 갈 수 있으려나…….’
강준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흔들렸다.
둘을 내버려 두고 이상현 손해사정사와 함께 1층 복도로 내려온 강준은 형사 법정을 빠져나온 명성정공 윤재구 일행을 목격했다.
윤재구는 어느 때보다도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한 모습이었다.
“강 이사! 내가 이러려고 너한테 비싼 월급 준 줄 알아? 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리안건설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종도…… 그 개새끼……!”
잘못은 본인이 해 놓고 엉뚱한 곳에 분풀이하는 윤재구였다. 강 이사는 그런 윤재구의 스타일을 아는 건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하지만 이번 재판은 단순히 강대희 이사의 책임회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산업안전감독관을 매수한 윤재구는 판사의 선고 결과에 따라 구속될 위기에 처한 신세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