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양계장 재해보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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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양계장 재해보험 (1)
2022.04.10.
최진호 대표 앞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강준이었지만,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최은정이 부친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헤어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최은정은 정상적으로 출근했고, 강준을 사무실이 아닌 옥상으로 불러냈다.
“큰오빠한테 얘기 들었어요. 독립 보험조사팀을 꾸리겠다고요?”
“그러려고 했는데…… 딱히 급한 건 아닙니다.”
“아뇨, 무척 강준 씨다워요. 그래서 말인데…….”
강준은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그거 제가 도와드릴게요. 독립하려면 돈도 필요하잖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벌어 놓은 게 좀 있거든요.”
강준의 말은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벌어 놓은 돈이 꽤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간 이런저런 사건에 개입하며 변호사 비용을 대납한 비용을 빼면 은행 계좌에 남아 있는 금액은 대략 30억 원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최은정은 강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강준이 그 정도의 돈을 벌어 두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결국 독립하겠다는 건 사업을 하겠다는 거잖아요? 제가 투자를 해드리겠다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게 아니라요……. 독립하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그녀의 말은 강준이 독립사무실을 차리면 당장 당면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였다.
“근데 좀 기다려요. 저도 투자할 자금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그럴 수 있죠?”
“네, 그…… 그러겠습니다…… 근데, 제 생각엔 일단 최 팀장님 마음부터 추스르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강준의 말에 다시 침울해지는 최은정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와 강준 씨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합니다.”
계약 연애의 핑곗거리가 사라진 셈이었다.
“계속 잘해 보라고 하셨어요. 물론 제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아셔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요…….”
“그럼 우리 계약 연애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강준이 대놓고 말하자 최은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리 계약 연애는 이쯤에서 끝내는 거로 해요. 원래 그러기로 했던 거니까요.”
“아쉽네요…… 진짜 연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게 때때로 위로가 되기도 했었거든요.”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진짜 아쉬우면 우리 진짜로 연애 한번 해 보는 거 어때요?”
강준은 자신도 알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냈다.
“제가 밑지는 거 같은데 생각 좀 해 볼게요.”
“이거 제가 거절당했군요.”
“아뇨. 거절이라기보다는 저 역시도 강준 씨처럼 진짜 남자를 만나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아직은 해야 할 일도 많고요.”
“이제 정말 그룹 경영에서 나서지 않을 겁니까?”
“생각을 좀 정리해 보고요. 어쩌면 강준 씨를 따라 독립 보험조사팀에 합류할 수도 있는 거고요.”
최은정도 아직 자신의 행보를 결정짓지 못한 듯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맘대로 해 먹으려고 독립 보험조사팀을 만드는 건데 팀장님 지시를 계속 받으라고요?”
“투자금 받기 싫어요?”
“이거 무서워서 투자금 못 받겠습니다. 완전 발목 잡는 투자인데요. 하하!”
농처럼 던지는 최은정의 말에는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 * *
특전사 38부대 면회실.
“자대 생활은 좀 어때?”
“죽을 맛입니다! 아직 적응도 전혀 못 했고요.”
제이콥은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에 배치됐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강준이 김준혁을 데리고 면회를 온 거였다.
제이콥은 오랜만에 사회 음식을 먹는 거라 그런지 눈앞에 놓인 치킨을 양손으로 들고 뜯었다. 김준혁이 그런 제이콥을 보고 웃으며 농을 던졌다.
“역시 치킨은 한국이지?”
“우와 진짜! 한국 치킨이 제일 맛있습니다!”
“휴가 나오면 꼭 연락해라. 또 사줄 테니!”
“네! 충성!”
한동안 치킨을 뜯은 제이콥은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뭔가가 생각난 듯 강준을 보며 질문했다.
“근데 박 차장님, 제가 요즘 대민지원을 많이 나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제이콥의 말투는 이제 완전한 군인 말투로 변해 있었다.
“어, 저번에 박 상사가 그러는데 축사들이 무너진 곳들이 많아서 지원을 나간다고는 들었다.”
“제가 예비 보험조사관으로서 본 바에 따르면 말입니다.”
“왜? 무슨 촉이라도 온 거냐?”
“촉이 뭡니까?”
한국어가 능숙하긴 했지만, 아직 ‘촉’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제이콥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느낌 같은 거지.”
옆에 있던 김준혁이 대신 답했다.
“제가 대민지원을 나갔는데 거기가 닭을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근데…… 죽은 닭을 냉동고에 보관했습니다. 이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뭐? 죽은 닭을……?”
“네. 닭을 죽이고 한참 뒤에 팔아도 되는 겁니까?”
“그럼 유통에 문제가 생기겠지.”
강준은 직감적으로 축산 농가의 재해보험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왜 죽은 닭을 보관하는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제이콥… 네가 나한테 말했을 때는 뭔가 의심하는 게 있었을 거 아니냐? 말해 봐.”
“양계장 주인분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저도 필리핀에 있을 때 닭을 키워 봐서 알지만…… 닭들이 사료를 엄청나게 먹거든요… 근데 거기는 규모보다 사료가 적더라고요.”
“그거야 나중에 다시 채워 넣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죠…….”
제이콥은 더는 자신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양계장의 죽은 닭을 본 것에 대한 의심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박 차장님, 우리가 이 근방에서 재해보험 청구된 내역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거야 그렇지. 제이콥 그곳에 다시 대민지원을 갈 일이 있냐?”
강준은 제이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축사가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으니까…… 몇 번은 더 가야 할 겁니다.”
“그럼, 네 나름대로 관찰한 바를 우리한테 알려 줄 수 있겠냐?”
“그럼요. 저도 예비 보험조사관이니까요!”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면회를 올 테니 그때까지 어떻게 근방의 축산 농가들을 조사해야 할지 고민해 보라고.”
“그럼 저 다음 주에도 치킨 먹을 수 있는 겁니까?”
“하하! 다음에는 양념치킨으로 사 오마!”
“감사합니다! 박 차장님!”
군복을 입은 제이콥은 단순해진 듯했다. 김준혁은 그런 제이콥을 보며 짧아진 그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 * *
성원화재 을지로 본사.
“연남시 외곽의 송안읍 농가에서 파악된 재해보험 청구가 작년 기준으로 50억 원 정도 됩니다. 아무리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 많았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김 대리, 그 전의 자료들은 없나?”
김준혁은 재해보험에 대한 최근의 현황들을 파악해서 강준에게 보고했다.
“최근에 정부에서 재해보험에 대한 지원정책이 있었습니다. 저희 성원화재를 비롯한 5개 보험사를 선정해서 일부 정부 지원으로 재해보험에 가입하게 한 거죠. 축협에서도 작년부터 일선 축산 농가에 적극적으로 가입유도를 하게 된 거고요.”
“흐음…… 결국 상품구성에 구멍이 생겨서 거기로 보험료가 새고 있었다는 거네…….”
“그렇죠. 축산 농가들도 자부담금이 있긴 한데, 그 비율이 낮으니까 충분히 유혹에 빠져들 수 있겠더라고요.”
강준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작년에 재해피해에 대한 실사는 어디에서 나갔지?”
“축협에서 지정한 손해사정사가 나갔습니다.”
“그럼 그 손해사정사부터 만나 보는 게 좋겠군.”
“그게…… 아마 아시는 분이실 겁니다. 전에 해리츠 보험 사건을 맡았던 강상훈 손해사정사. 그 사람 사무실에 얼마 전 새로 온 손해사정사더라고요.”
강준이 알기로는 강상훈은 우춘배의 사건 이후로 해리츠 보험 박성태 부장과 사이가 벌어진 거로 알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상훈이 자신을 끌어주는 선배인 박성태 부장의 기대에 못 미친 거였지만.
“강상훈이라면…… 뭔가 냄새가 나는군. 근데 이제 해리츠 보험에서 일거리를 별로 안 주나 보지? 축산 농가 일에까지 손을 대는 거 보니까 말이야.”
함께 회의하던 송지희가 김준혁 대신 답했다.
“차장님, 새로 영입한 손해사정사가 재해보험 건 문제가 터진 송안읍 출신입니다. 고향 친구들 몇몇이 여전히 송안읍에서 축산업을 하고 있고요.”
“그럼…… 강상훈이 그걸 미리 알고 영입한 거라는 건가?”
“어쩌면 그럴 지도요. 축협에서도 실적도 없는 초보 손해사정사에게 보상과 관련한 실사 업무를 맡기진 않았을 테니까요.”
송지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강상훈이라면 돈 냄새를 맡고 처음부터 축산 농가의 재해보험을 노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강준은 두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내고는 나머지 둘을 돌아봤다.
“이건 우리 특별수사과에서 한번 맡아서 진행해 보자.”
“윗선에 보고는 안 드려도 되는 건가요?”
송지희가 되물었다.
“당분간 특별수사과는 사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어. 그러니 차장인 내 지시면 충분하겠지?”
“박 차장님 권한이 더 커지신 거네요. 축하드려요!”
“이게 축하받을 일인가? 하하!”
퇴사 의사를 밝힌 강준에게 최은정 이사는 당분간 독립적인 조사 권한을 주는 것으로 강준을 붙잡았다. 그리고 강준도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서두를 것도 없고……!’
강준은 둘을 송안읍의 양계장으로 보내고 강상훈의 손해사정사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는 연남시였다. 한승일 시장이 주도한 문화복합단지는 시 규모에 맞지 않는 압도적인 신축 공공건물과 구시가지의 재단장으로 완전히 뒤바뀐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복합단지 조성에 끌어다 쓴 예산 덕분에 연남시의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지방 선거 시즌이었다. 한승일 시장은 양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침체한 지방 도시를 되살린 능력 있는 행정가.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시 재정을 만성적인 적자에 빠트린 원흉!
한승일의 재선 가도는 한마디로 위기였다. 상대 후보와의 치열한 지지율 접전은 선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존경하는 연남 시민 여러분! 지난 4년간 저 한승일은 무너져가는 지방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이 한 몸 바쳐 왔습니다! 야당에서는 저를 건설 마피아로 매도하며 공격해 왔지만! 저는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흔들림 없이 연남시의 번영이라는 제1원칙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준은 사거리 신호등이 멈췄을 때, 맞은 편 번화가에서 확성기로 유세 중인 한승일 시장을 바라봤다.
전대성이 사라졌지만, 그와 함께 붙어먹던 한승일 시장과 그의 사위 최진태는 여전했다. 어찌 보면 먼저 간 전대성만 억울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준은 전대성도 죽고, 성원그룹의 경영권도 정리된 마당에 더는 저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빠아아앙!
신호가 바뀐 걸 깜빡한 강준은 뒤차에서 울리는 경적을 듣고는 급하게 액셀 페달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