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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아동학대 사건 (2) (124/250)


124. 아동학대 사건 (2)
2022.04.03.


“나가!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흥분한 원재성은 앞뒤 가리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복도식 아파트의 이웃들이 그 고함에 놀라 집 밖을 나와봤지만, 원재성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억지로 문을 닫으려는 원재성이었지만, 강준은 자신의 발을 문틈으로 쏙 집어넣었다.

“시발…… 내가 험한 말까지 해야겠어? 안 나가냐고 이 개새끼야!”

원재성은 강준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강준은 그의 더러운 기억 따위는 읽고 싶지도 않았다.

“볼 일이 있어서 온 거잖습니까? 제이콥이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친부의 사실관계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당신 아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거고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문을 강제로 닫으려는 원재성을 향해 강준은 준비했던 카드를 꺼냈다.

“돈을 드리죠! 돈 말입니다. 돈! 돈!”

강준의 외침에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 원재성은 핏발 선 눈으로 강준을 한참 노려봤다.

‘노려보면 어쩔 거냐! 개자식아……!’

“당신 이러는 이유가 뭐요?”

“제이콥이 안타까워서요…… 잘 살아 보겠다고 아버지 나라에 왔는데 설움만 당하고 가면 얼마나 이 나라를 욕하겠습니까? 적어도 기회는 줘야죠.”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원재성 씨 가족관계에 제이콥을 등록시켜주시죠. 구체적으로 친자인지 신고를 하면서 유전자 검사 결과를 함께 제출하시면 됩니다.”

강준의 말을 들은 원재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뭔가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뭐요……? 무슨 신고라고요?”

“친부가 본인 아들임을 뒤늦게 알고 신고하는 걸 인지 신고라고 합니다. 만약 협조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친자 확인 소송을 통해 해결할 방법은 있겠지만요…….”

잠시 뜸을 들인 원재성은 돈 얘기부터 꺼냈다.

“혹시 양육비나 그딴 거 달라는 건 아니겠죠……? 솔직히 말해서 글로리아 걔는 내 머릿속에 생각도 안 납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무슨 친자 확인이니 뭐니……쯧!”

원재성이 글로리아와 제이콥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었다. 제이콥이 세 살이 될 때까지 필리핀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제이콥이 한국 국적을 완전히 회복한다면 오백만 원을 드리죠.”

“뭐, 겨우 오…… 오백?”

“딱 소송비용입니다. 소송비용을 쓰느니 빨리 처리하는 게 낫잖습니까? 그리고 당신 자식입니다. 그 정도도 못 해 주나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지낼 곳을 해결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강준이 자비를 들여서까지 원재성의 협조를 구하는 건 제이콥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서였다. 친자 확인 소송까지 간다면 그 과정에서 제이콥이 받을 상처가 클 것 같았다.

“근데…… 제이콥 걔는 한국에 왜 왔답니까? 혹시 일자리는 구해서 온 건가요?”

비릿한 눈빛으로 강준을 떠보는 원재성이었다. 뒤늦게 자신을 찾아온 혼혈 자식에게 뭔가 얻을 게 없는지 물어보는 거였다.

“보험조사관이 되고 싶다더군요…… 당신처럼 애들을 빌미로 보험금을 타 먹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보험조사관요!”

“아니, 근데 이 사람이 아까부터 자꾸만……!”

강준은 더는 원재성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협조하시는 거로 믿고 돌아갑니다. 내일 오전까지 성원화재 을지로 본사로 오시죠. 그때 뵙겠습니다!”

강준은 주머니 속에 준비해 온 100만 원짜리 수표를 바닥에 던지고는 돌아섰다. 원재성이 뒤늦게 수표를 줍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괜한 백만 원만 나갔네……!’

* * *

다음 날, 을지로 성원화재 본사.

하락장에 돈을 버는 행위는 강준에게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남들의 불행을 전제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준에게 다시 한번 더 하락장에 배팅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금융위기에 이어 확실하게 하락장의 그래프를 만들 사건은 1년 남짓 남은 일본의 대지진이었다.

‘보험조사관으로서 일을 계속해 나가려면…… 나도 돈이 더 필요하지. 게다가 이제는 직접 사무실 비용이며 팀원들 인건비까지 당분간 전담해야 할 텐데!’

강준은 독립 보험조사팀을 꾸리는 시기를 2011년 상반기로 잡았다. 그때는 최은정과 약속했던 1년의 기간이 다 되는 시점이었다.

[1년만 기다려줘요. 지금은 아직 강준 씨를 성원화재에서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요.]

성원화재를 퇴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최은정 이사에게 전달한 강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성원그룹의 경영권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최창식 회장이 아직 병상에 있었다. 최은정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만큼이라도 강준과의 계약 연애를 이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그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지희 씨, 방금 인사 공고문이 떴습니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김준혁이 설레발을 치며 소리쳤다. 정기 인사이동에서 송지희는 대리로 진급했다.

“축하해요. 지희 씨! 아니 송 대리!”

“감사합니다. 차장님.”

장춘에서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송지희는 며칠 전부터 강준의 지시에 따라 어린이 상해보험의 보험금 지급사례를 살펴보고 있었다.

“차장님, 송 대리 진급 기념으로 회식 한번 하시죠!”

“회식을 핑계로 둘이 데이트를 하려는 건 아니고?”

“왜요? 그럼 안 됩니까?”

송지희가 출장에서 돌아오자 김준혁이 사내 연애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송지희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 거로 보아 둘은 확실히 연애 중이었다.

“내가 눈치껏 적당히 빠져줄 줄 알지? 어림도 없다! 오늘은 3차까지 자리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와! 차장님. 본인이 연애 안 하신다고 이렇게 협조를 안 해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잔말 말고 둘 다 퇴근하면 요 앞에 있는 꼼장어 집으로 집합이다!”

울상을 짓고 있는 김준혁을 송지희가 툭 치며 말을 던졌다.

“박 차장님도 연애하시는 거 같은데요?”

“네? 박 차장님이요……? 에이 그럴 리가? 저랑 매일 같이 야근하셨는데?”

말 대신 살짝 눈웃음을 치는 송지희였다. 그녀는 강준과 최은정의 계약 연애에 대해 대충 눈치챈 듯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그때, 강준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네, 성원화재 박강준 차장입니다!”

―데스크에 손님 오셨는데요. 원재성 씨라고요.

“미팅룸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강준은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고서는 김준혁에게 물었다.

“김 대리, 제이콥은 어학원에 잘 접수 시켰지?”

“네, 오늘부터 수업이라고 들었습니다.”

“음…… 원재성이 우리를 찾아온 건 일단 제이콥한테는 함구하도록 하자고. 우리가 할 일은 제이콥의 국적회복까지니까…… 그 이상은 나중에 제이콥이 스스로 판단하게 내버려 두자고.”

“네…… 괜히 미리 실망하게 할 필요는 없죠.”

강준은 복귀해서 어린이 상해보험에 대한 조사를 맡은 송지희와 제이콥의 국적회복 절차를 담당할 김준혁을 데리고 미팅룸으로 향했다.

안면이 있는 강준에 이어서 나머지 둘까지 들어오자 원재성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는 모자와 운동복 차림의 편한 복장이었다. 그가 어디서 오는 길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일단 오기는 했는데…….”

말을 흐리는 원재성을 향해 김준혁이 인지 신고 서류와 유전자 검사동의서를 내밀었다.

“유전자 검사는 동의서를 쓰시고 해당 병원을 방문하셔서 진행하시면 됩니다.”

“아…… 이것만 하면 끝인가……?”

“네, 나머지 잔금은 유전자 검사를 완료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뭐야?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해 놓고……!”

당장 돈을 내놓지 않으면 행패라도 부리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원재성이었다.

“마무리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여기 계좌번호를 남겨두고 가시죠.”

강준은 메모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원재성은 망설임 없이 펜을 들어 쓱쓱 계좌번호를 적었다.

“하여간 내가 녹취까지 해 놨으니까 나중에 딴말하지 맙시다! 내가 뭐 이런 것도 준비 안 하고 왔을까 봐…….”

원재성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꺼낸 건 휴대용 녹음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송지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박 차장님! 이건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은 녹취예요! 원재성 씨, 당신 정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에이…… 사람을 왜 물로 보고 이러시나? 당사자가 참여한 녹취는 불법 녹취가 아닌 거 모르시나? 워낙 보험사 놈들이 뒤통수를 잘 때려대서 말이지…….”

원재성은 특별수사과 사람들을 앞에 놓고 낄낄댔다. 참다못한 송지희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김준혁이 그녀의 힘이 들어간 팔목을 잡았다.

“원재성 씨, 지금까지 자녀분들 이름으로 보험금을 청구한 내역을 보니까 한곳의 병원에서만 진단서를 받았네요? 골절상, 타박상, 그리고 피부질환까지…… 몽땅 한 병원에서요?”

김준혁의 질문에 원재성이 불쾌한 듯 인상을 팍 썼다.

“시발…… 진짜 보험사 새끼들은 왜 사람을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양아치들은 본인들이면서 선량한 보험계약자들을 양아치로 몰아가고 말이야!”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원재성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침착한 표정의 김준혁은 조목조목 말을 이어갔다.

“저도 보험금 지급을 회피하려는 보험사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는 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장님, 지난 2년간 자녀분들 이름으로 된 열 개가 넘는 보험에서 두 달에 한 번꼴로 크고 작은 보험금을 청구하셨습니다.”

“그거야! 애들 엄마가 집을 나가 버리는 바람에…… 애들을 꼼꼼히 못 챙기다 보니 그런 거지! 내가 사고 나라고 일부러 부추겼겠어? 어!”

김준혁의 추궁에 금세 얼굴이 벌게진 원재성이었다. 그때, 미팅룸의 유리 미닫이문이 슬며시 열렸다.

“어! 제이콥!”

어학원에 갔다던 제이콥이 보험조사팀의 사무실에 와 있었던 것이었다. 김준혁은 데스크에서 제이콥의 임시출입증을 받아준 걸 떠올렸다.

“유전자 검사를 받고 왔거든요…… 어학원은 개강 날이라 일찍 마쳤고요…….”

제이콥의 시선은 이미 원재성에게 꽂혀 있었다. 원재성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아빠……?”

제이콥의 부름에 원재성은 시선을 외면했다.

“…….”

“왜 엄마 두고 갔어요? 엄마가 얼마나 아빠를 기다렸는데…….”

“……좌우간 난 먼저 일어납니다…….”

묵묵부답에 이어 자리를 피하려는 원재성이었다.

“작년에 엄마가 죽었어요! 시름시름 앓다가요!”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나하고는 이제 상관없는 여자야!”

친부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끝끝내 제이콥의 가슴을 후벼 파는 원재성이었다. 송지희는 사무실을 나가려는 원재성을 막아섰다.

“괜찮아요! 필리핀에 있을 때, 한국 오려는 거 엄마가 항상 말렸거든요! 말은 안 했지만, 왜 그런지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나 제이콥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국까지 와서 확인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예요.”

제이콥의 눈은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지만, 담담히 팔을 들어 눈물을 닦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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