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LCD 기술 탈취 (2)2022.03.22.
장 반장이 공장 뒤편으로 김 상무를 데려갔을 때, 강준은 멀뚱거리고 서 있는 작업반장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지금 다산실업이 위기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번 무역 사기와 관련해서 말씀해 주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 이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 주시죠.” 더는 그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강준은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석정훈 대표와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머리가 허연 장 반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저기 잠깐만!” 멀리서 뛰어온 장 반장은 다짜고짜 말도 없이 강준의 차에 올라탔다. “혹시 제게 무슨 할 말 있으십니까?” “있지…… 있어! 그러니까 일단 사람들 눈 좀 안 보이는 곳으로 가자고!” 강준은 말없이 남동공단의 한적한 공터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장 반장이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말이야…… 나도 그 씬왕테크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거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무역 사기꾼들과 직접 접촉하셨다는 말씀인가요?” 강준의 말에 장 반장이 화들짝 놀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씬왕테크가 직접 사기를 친 게 아니라고 하던데 무슨 소리야! 누가 사칭을 한 거라며? 그리고 난 그저 김 상무가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길래 만나본 것뿐이지…….” “석정훈 대표 몰래 말입니까?” “그…… 그건 물론 우리가 잘못한 것이지만…….” 강준의 지적에 장 반장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말씀해 보시죠. 김 상무와 누구를 만나신 겁니까?” “이게 그때 내가 받은 명함인데…… 한번 봐봐.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사기꾼은 아닌지 말이야.” 장 반장이 건넨 명함에는 씬왕테크 자문위원 김정근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도 이렇게 정보를 주셨으니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드리죠.” “어! 그럼, 그럼! 그 얘기 들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인데…….” “씬왕테크로 옮기는 조건으로 연봉을 얼마나 제시받으셨습니까? 다른 복지 조건은요?” “아니…… 뭐 구체적으로 얘기가 오갔다기 보단…….” 장 반장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강준의 단호한 눈빛에 장 반장은 결국 입을 열었다. “연봉 2억…… 현지 체류비용으로 월 보너스도 주고 아파트 준다고 하더라고…….” “그 정도로 석 대표도 배신하고 기술도 팔아넘기려고 했던 겁니까?” “아이 진짜…… 우리 같은 공돌이들 평생 일해 봤자 집 한 채 마련하는 것도 힘든데, 우리한테도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잡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간 장 반장이 어떻게 회사를 키워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회사가 커진 만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선택은 장 반장님이 하시는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번 씬왕테크의 무역 사기는 엄연히 따지자면 씬왕테크를 사칭한 사기꾼이 주도한 거니까요.” “그렇지? 그럼 씬왕테크 쪽은 문제가 없는 거잖아?” 그는 자신이 이직하려는 회사가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강준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김도식 상무의 기억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무역 사기에 씬왕테크가 배후에 있는 정황이 있습니다. 일부러 회사를 망하게 하고 인력을 빼가 기술을 탈취하려는 거죠.” “……그게 확실한 거야……?” 장 반장은 자신의 우려가 사실이 되자 도무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기술자들도 당장에는 신이 나서 고액 연봉을 받고 넘어간다고 해도 현지에서 기술이전이 끝나고 나면 약속했던 연봉도 못 받고 쫓겨날 겁니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배신자에 실업자가 되시는 겁니다.” 강준의 단호한 말에 장 반장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른 기술자분들과 다산실업이 부도나는 일부터 합심해서 막아 주시죠. 일단 회사를 살려 놓고 난 후에 외국계 회사든 어디든 스카웃되어 이직하신다면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강준의 타협안에 장 반장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겠어…… 나도 일이 갑자기 팍팍 진행되고 그러니까…… 눈에 뭐가 씌었었는지…….” “그래도 장 반장님 덕분에 이번 사기 사건 뭔가 단서를 찾은 거 같습니다. 전 이 김정근이라는 인간부터 찾아봐야겠네요.” “어! 한번 찾아봐. 한국에서 지낸다고 하던데?” 강준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가봐야 할 곳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 * 의왕시 서울구치소 구치소 면회소로 나온 김용식은 예상과는 달리 강준을 기다렸다는 듯 초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전 회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나보고 당장 들어오라는데…… 어떻게 하지?” “왜? 보험금 지급은 된 거로 알고 있지 않아?” “나도 몰라. 돈 필요한가 보지. 어쨌든 빨리 안 들어가면 날 의심할 거라고!” “며칠만 기다려. 여기서 조사를 끝마치고 가야 하니까.” “근데 정말 나 1년 반만 살고 나오면 된다는 거지?” “홍콩에서 전대성 회장을 검거하는 조건에서!” 일종의 사법 거래였다. 김용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홍콩에 은신 중인 전대성을 유인해 검거하는 작전이었다. 강준은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장 반장에게 받았던 씬왕테크 자문위원 김정근의 명함이었다. “김용식! 아직 우리한테 말을 안 한 게 있던데?” “이…… 이게 뭔데?” “만난 적 있지? 이 사람 한국에 있다고 하더라.” 마치 직접 김정근을 만나본 것처럼 슬쩍 떠보는 강준이었다. 하지만 김용식은 고개를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사람부터 체포하자고! 김용식, 네가 그런다고 해도 있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다산실업의 무역 사기에는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김용식이었다. 그 건은 보험사기가 아닌 무역 사기로 본인의 형량이 더 늘어날 수도 있었다. “박강준, 그러면 하나만 약속하자.” “뭘?” “원래 했던 약속대로 지키는 거 말이야.” 다산실업의 무역 사기 건에 자신을 엮지 말라는 얘기였다. 강준도 유리 벽 너머 김용식의 기억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데로 힘 써보지. 물론 난 경찰이 아니지만…….” “김정근 그 인간, 지금 홍콩에 있어. 전대성 회장의 측근이기도 하고…… 흑룡회랑 관련 있는 사람이라더라.” 잠시 침묵한 김용식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무섭다……. 그놈들은 엄청 무서운 놈들이거든. 전에 내가 대해 봤던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달라…… 전대성 회장이 어쩌다 그놈들과 손을 잡게 된 건지는 몰라도…….” “김용식 겁나면…… 지금이라도 포기할래? 사법 거래를 선택하고 안 하고는 네가 선택할 문제야.”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던 김용식이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시발!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사냐! 감방에서 오래 살기 싫다! 가자고…… 홍콩으로.” 자신감이 없는 말투였지만 김용식의 의지는 확고했다. * * * 홍콩 센트럴 지역. 김용식은 이두철이 알려준 환전 은행 계좌에서 돈을 뽑았다. 직접 창구에서 뽑은 돈은 700만 홍콩달러로 10억 원의 한국 돈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은행의 창구에서 나온 김용식은 길가에 세워져 있던 밴에 올라탔다. 돈을 찾은 김용식을 홍콩에서 밀착 감시하는 사람은 씬왕테크의 자문위원인 김정근이었다. 그리고 김정근이 데리고 다니는 중국인들은 홍콩 흑룡회의 보스 린팡의 부하들이었다. 린팡은 지난번 필리핀의 경쟁 마약상을 꺾은 공로로 광둥성의 몇 개 도시를 관장하는 보스가 되어 있었다. “전 회장님은 어디 계시는 겁니까?” “왜? 꼭 만나야 할 이유라도 있어? 김 사장 역할은 이 돈 찾아오는 거잖아. 안 그래?” 차가운 말투로 대꾸하는 김정근이었다. 그는 넓은 얼굴 면적에 맞지 않게 오밀조밀한 눈코입을 가진 자였다. “아니…… 나야 전 회장님께서 나를 찾으시니까 그런 거죠. 여기까지 와서 회장님도 못 뵙고 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 그럼 만나 뵈러 가야지. 너무 보채지 말라!” “어디로 가는 겁니까?” “심천, 이걸로 국경 넘는다.” “네? 저 비자도 안 받아왔는데 어떻게 본토에 들어간다는 겁니까?” 김용식은 중국 본토로 들어간다는 말에 살짝 겁이 났다. 그가 사용하는 핸드폰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경찰이 설치한 위치추적 프로그램이 심겨 있었다. 김용식은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좁은 눈매로 노려보던 김정근이 김용식의 팔목을 붙잡았다. “뭡니까? 이거?” 당황하는 김용식을 바라보며 김정근이 비릿하게 실실 웃었다. “우리가 새로운 보안 수칙을 정했는데 말이지.” “네……? 무슨 엉뚱한 소리인지…….” 김정근은 김용식에게 따라붙은 한국 경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김용식이 손에 붙들고 있는 핸드폰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어 핸드폰을 고가도로 아래로 휙 집어 던졌다. “야!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생각보다 전대성 회장 정보력이 쓸 만하구나! 크크!” 김용식을 이용한 함정 수사는 이미 전대성의 귀에 들어간 듯했다. 이진철 경감의 광역수사대 경제수사과에서 단독으로 추진한 일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정보가 샌 것이었다. 잠시 후, 밴이 도착한 곳은 심천 외곽의 한 농가였다. 주변에 몇몇 중국인 농부가 있었지만, 그들은 김정근 일행이 김용식을 끌고 가는 걸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김 사장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소리쳐 봤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잠깐만! 전 회장님하고 얘기 좀 하게 해 줘!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정말 그런 거 아니거든!” “얘기? 좋지! 김 사장, 네가 우리한테 할 말이 참 많을 거야, 그렇지? 크크!” 김용식은 안으로 끌려가자마자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강제로 앉혀졌다. 그리고 두 팔이 팔걸이에 고정됐고, 두 다리는 의자 다리에 묶였다. “시발…… 진짜 왜 이러세요? 네? 내가 여기 온 거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진짜예요!” “그래? 정말이니? 거짓말하면 김 사장은…… 내 손에 죽는다…… 알갔어?” 김정근은 눈을 부라리며 부하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이내 커다란 손도끼를 가져왔다. “자, 움직이면 더 아프니까 가만히 있으라…….” 침착하게 김용식의 손목을 노려보는 김정근이었다. 김용식은 처절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진짜! 왜 이러는 건데! 왜? 보험사기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고! 보험금 타서 돈까지 가져왔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어! 어? 말 좀 해봐!” “나야 자세히는 모르지. 근데 김 사장이 거짓말을 하니 그런 거 아니니.” “무슨 거짓말? 무슨 거짓말이냐고? 내가 알아야 진짜를 말해주지.” “그건 김 사장이 알지, 내가 아니?” 밑도 끝도 없는 공포였다. 김용식은 손도끼를 치켜든 김정근을 향해 그저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맞아! 당신 말이 맞아! 다 맞다고! 시발!” 하지만 김정근은 무심한 표정으로 치켜든 손도끼를 김용식의 묶인 손목을 향해 익숙한 듯 내리쳤다. 텅! “으아아아악!” 김용식의 끔찍한 비명이 농가의 텅 빈 창고 안에 메아리쳤다. 단 한 번의 도끼질로 김용식의 오른 손목이 ‘툭’ 하고 잘려 나갔다. 피가 얼굴에 튄 김정근은 태연히 수건을 꺼내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거봐라. 내가 뭐라 그랬니. 거짓말하면 이렇게 된다고 했지. 이건 내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김 사장 본인 책임이야! 본인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