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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LCD 기술 탈취 (1) (111/250)

111. LCD 기술 탈취 (1)2022.03.21.

홍콩 출장 1주일 전. 인천 남동공단 다산실업. 김용식이 연루된 적하보험 사기 건을 들여다보던 강준은 유령회사가 아닌 진짜 물건을 선적한 회사를 한 곳 발견했다. 그곳은 LCD패널에 들어가는 백라이트 유닛을 제조하던 다산실업이었다. 내수만 해 오다 최근 들어 수출 판로를 알아보던 와중이었다. 그런 다산실업에 3개월 전 때마침 씬왕테크라는 중국 회사로부터 메일이 온 거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의 대리인이 씬왕테크를 찾아와 회사 소개서를 건넸고, 50억 원에 달하는 공급 계약을 체결시켰다. 그 한국 대리인이 바로 MK물류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김용식이었다. 강준은 이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 다산실업의 석정훈 대표와 마주 앉아 있었다. “현지에는 직접 가 보신 겁니까?” 절차상으로 보험사고에 대한 조사였지만, 석정훈 대표로서는 보험금이라도 받아 자금난을 해결해야 했다. “가 봤죠! 근데…… 진짜 번듯한 공장 간판을 걸어놓고 모니터를 생산하고 있더라고요…… 전 제가 만난 사람이 정말 씬왕테크 대표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 말을 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는 석정훈이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씬왕테크의 본사인 심천 현지 공장에 가서 만난 사람은 씬왕테크 진짜 대표가 아니었다. “명함에도 동사장(董事长,법인대표)이라고 떡하니 쓰여 있으니 안 믿을 수가 있었어야죠!” 이미 체포된 김용식을 추궁했지만, 그도 씬왕테크 동사장을 자청하던 자는 누군지 몰랐다고 했다. 그저 현지 통역을 통해 석정훈을 여기저기 끌고 다녔을 뿐이었다. “김용식은 그 이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자기 역할이 없었다고 하던데요?” 양손에 깍지를 낀 석정훈은 답답한 듯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직접 씬왕테크 관계자가 메일이 오더라고요. 우리도 영문으로 메일이 오가니까 의사소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고요. 중간에 한국 대리인이라던 김용식 사장한테 눈치가 좀 보이긴 했는데 별말 안 하더라고요…….” “근데 왜 LC거래(신용장 거래)가 아니라 TT(전신환 거래)거래를 하신 거죠?” “그야 우리는 원래 수출기업이 아니었으니까 은행에 만들어 둔 신용장도 없었고…… 그쪽에서도 계약금을 보내오며 재촉을 해 왔으니까요…… 제가 거기에 속은 게 천추의 한입니다! 한!” 그 말을 하며 석정훈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다. 계약금으로 보내온 5억 원의 현금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외환거래를 했으면 인보이스는 은행에 제출하시지 않았나요?” “했죠! 이게 바로 그 인보이스입니다.” 석정훈이 내민 인보이스에는 LCD 백라이트 유닛으로 가득 채운 컨테이너 8개 분량의 물량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쪽에서는 연락을 전혀 안 받는다는 거죠?” “아예 답변이 없어요…… 그 많은 물건이 어디로 가긴 했을 거 아닙니까? 나중에 LCD 완제품으로 나오는 거 추적해서 우리 백라이트 유닛을 썼다는 게 밝혀지면 그쪽도 곤란해질 텐데…….” 범용적이지 않은 LCD 부품이었다. 물건을 빼돌린다고 돈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5억 원의 현금을 투자했다. 강준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석 대표님, 채권 만기가 언제라고요?” “다음 달 초입니다…… 공장이라는 게 들어오는 돈하고 나가는 돈하고 맞물려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쯤이면 당연히 들어왔어야 할 잔금 45억이 안 들어왔으니…… 다음 물량 만들 원자재 사기도 힘든 지경입니다…….” 석정훈은 죽겠다는 표정으로 힘든 걸 토로했다. 강준은 확인 차원에서 그의 기억을 슬쩍 읽었지만, 그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가 청춘을 바쳐서 일궈 온 다산실업이 어이없이 파산 위기에 직면한 것이었다. “박 차장님, 생산 공장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참고될 수도 있겠네요.” 강준은 회귀 전 2010년대 중반부터 LCD 패널 제조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간 일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다산실업을 망하게 하려 하고 있다면 그 뒤에는 강준이 생각지도 못했던 더 큰 배후 세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 상무 좀 들어오라고 해!” 석정훈은 전화로 현장에서 김 상무를 불렀다. “기술 책임자인데 우리 회사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죠.” “다산실업이 기술력에서 다른 LCD 부품업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회사를 칭찬하는 강준의 말에 석정훈은 용기를 얻은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이내 한쪽에 있던 LCD 패널을 들고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백라이트 유닛이라는 게 여기에서 빛 신호를 주면 그걸 편광판에 뿌려서 화면을 만드는 건데 보통 광원을 CCFL이라고 냉음극 형광램프를 쓰거든요. 근데 우리는 그걸 LED로 바꾼 겁니다. 뭐 우리만 LED를 쓰는 건 아니지만…… 좌우간 LED가 되면서 소비전력도 낮아지고 결정적으로 더 얇게 만들 수 있게 된 겁니다! 전자제품에서 뭐가 최고입니까? 두께죠?” 강준은 석정훈의 말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죠…… 얇고 가벼운 게 인기니까요…….” “맞습니다! 근데 LED 백라이트 유닛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어요.” “그게 뭔가요?” “가격! 바로 가격이 비싸다는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중국에서 나오는 저가 LCD 제품을 보면 백프로 LED 광원을 쓴 백라이트 유닛이 아니죠!” 석정훈은 본인이 만드는 제품에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근데 우리 다산실업이 잘하는 게 그 LED 백라이트 유닛을 엄청 저렴하게 만들어 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기존의 냉음극 형광램프 백라이트 유닛은 시장에서 완전히 도태되는 거고요!” 강준은 어쩌면 그의 말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다산실업을 파산시키고 그 기술을 채가기 위한 것일 터였다. 그때, 현장에서 온 김 상무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대표님, 저 왔습니다.” “어! 여기 앉아. 보험사 쪽에서 나오셨는데 현장에서 설명 좀 해드려.” “……뭘 말입니까?” “뭐긴 뭐야? 우리가 씬왕테크로 보낸 물건 말이야…….” 왠지 모르게 석정훈의 말을 교묘하게 들어 먹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단 그럼 저랑 같이 가 보시죠.” 뜨뜻미지근한 태도의 김 상무였다. 그는 사무실에서 벗어나자마자 노골적으로 불평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보험사기 조사하러 나오신 거 아닙니까?” “네 통상적인 절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근데…… 알다시피 우리가 물건을 안 보낸 것도 아닌데 뭘 더 설명하라는 건지…….” 김 상무는 분명 석정훈 대표에게 비협조적이었다. “다산실업은 김용식의 MK물류를 통해서 물건을 보낸 상태입니다. 저희 보험상품은 중간 업체인 MK물류가 든 것이고요. 근데 그 MK물류가 고의로 보험사기를 쳤다는 게 밝혀졌죠…….” “그럼 보험금 지급이 어려운 겁니까?” “물론 복잡한 상황을 검토해 봐야겠지만, MK물류의 보험사기 건 중에 진짜 물건을 보낸 업체는 다산실업뿐입니다.” 강준도 성원화재를 비롯한 보험사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보험사기로 걸고넘어지면 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사람이 욕심을 내면 안 되는데…… 무슨 수출을 하겠다며 설쳐대서 일을 그르치나…… 쯧!” 현장에 도착한 김 상무는 석정훈 대표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다. “평소에 석정훈 대표에게 문제가 좀 있었습니까?” “솔직히 회사가 지금까지 큰 게 석 대표 능력이기보다는 기술자들이 열심히 해 줘서 된 거거든요…….” 언뜻 바른 소리 같았지만, 그 말투 속에는 은근히 석정훈을 무시하는 기색이 깔려 있었다. 김 상무는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이내 작업반장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다들 잠깐 모이자고! 보험사에서 나오셨다니까! 뭐 물어보시고 잘 대답해드리고.” “상무님, 우리 계속 생산할 수는 있는 겁니까? 원자재도 미입고됐는데…… 이대로 가다간 다음 주면 생산 중단해야 해요.” 젊은 작업반장이 자금난에 빠진 다산실업의 상황을 단박에 말해 주고 있었다. “석 사장은 뭐 한다고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능력 없으면 회사를 내놓던지 안 그래? 김 상무?” 머리가 하얗게 센 장 반장은 투덜거리듯 말을 툭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에 김 상무가 흡족한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무님, 지금 차고 계신 시계가 무척 멋있으시군요. 롤렉스 같은데 천만 원도 넘는 시계가 아닌가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강준의 지적에 김 상무가 곤란한 표정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강준은 그의 손목을 잡아끌며 말을 이었다. “진품 맞네요. 저도 이 모델 사려고 눈여겨봤었거든요.” 명품 시계를 지적하는 강준의 행동에 김 상무가 얼굴이 벌게졌다. 그리고 그 틈에 강준은 자연스럽게 그의 기억을 읽었다. 김 상무의 기억은 일식집 룸에서의 장면이었다. 그의 앞에는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중국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통역이었다. [상무님, 이분이 바로 씬왕테크 샤오빈 회장님입니다.] [반갑습니다. 김도식 상무입니다!] 김 상무는 엉덩이를 슬쩍 들고는 두 손으로 공손히 샤오빈 회장의 손을 잡았다. [전에 심천에 오셨을 때, 잠깐 뵌 적이 있으시죠?] [그때, 호텔 로비에서 잠깐 뵙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회장님께서 그날 미팅 이후로 상무님께 거는 기대가 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기술자들이야…… 대우 잘해 주는 쪽으로 가기 마련이지요.]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김도식 상무였다. 그 순간 그는 일개 기술자였던 자신을 상무 자리에까지 앉게 해 준 석정훈 대표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통역이 샤오빈 회장에게 한참을 얘기한 후 다시 김도식 상무에게 말을 전달했다. [다산실업이 완전히 파산되고 나면 샤오 회장님께서 그대로 남은 공장을 인수할 계획이시니 상무님이 기술자들을 당분간 관리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아…… 물론 공장 반장하고 급이 되는 오퍼레이터들은 제가 설득을 할 수는 있는데…….] 샤오빈 회장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김 상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색 봉투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두툼해 보였다. [회장님께서 이걸로 당분간 직원들 관리를 좀 하시라고 하시네요.] [아휴! 뭘 또 이런 걸 하하! ……어쨌든 되도록 빨리 공장이 정상화되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강준은 역겨운 김 상무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눈앞에는 김 상무의 명품 시계를 본 작업반장들이 수군거리며 모여 있었다. 강준은 김 상무가 이미 중요한 기술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씬왕테크로 갈아탈 준비를 마쳤을 거로 예상했다. 굳이 에둘러 예의를 차려 줄 필요는 없었다. “아 혹시 여러분들께서도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중국 심천의 씬왕테크는 아주 악질적인 기업입니다.” 강준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제일 놀란 사람은 김 상무였다. 그는 모인 작업반장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이 업계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잖아!” “네, 잘 모르죠.” “근데 뭘 안다고 떠들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김 상무였다. 당장이라도 끌어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업계는 잘 몰라도 씬왕테크가 이전에도 대량 오더를 빌미로 여러 회사를 망가뜨렸다는 건 잘 압니다. 그리고 망가뜨린 회사의 기술자들을 빼 와 노하우만 쏙 빼먹고는 몇 개월 만에 버린 것도요!” 강준의 마지막 말에 작업반장들의 눈빛은 당황을 넘어서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머리가 허연 장 반장이 제일 먼저 김 상무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 상무, 나랑 저쪽 뒤에서 얘기 좀 하자고…….” 김 상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도 씬왕테크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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