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약혼자 실종사건 (1)2022.03.16.
환전상 놈들은 끌려 나갈 때까지 이진철을 강압 수사로 고소하겠다고 바락바락 소리쳤다. 하지만 이진철은 꿈쩍도 하지 않고는 순경들에게 새로운 지시사항을 내렸다. “김 순경! 김용식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김용식이 이내 환전사무실로 끌려 왔다. 원래 같으면 곧바로 경찰서로 호송되었을 김용식이었지만, 이진철과 강준은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환전상 사무실로 끌려 온 김용식은 강준의 얼굴을 보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김용식, 오랜만이다.” “또…… 너냐…… 지겹다. 진짜…….” “보험사기 혐의로 넌 당장 구속되는 건데 우리가 너 하나 잡는 거로 만족스럽지 못해서 말이야.” “그게 또 무슨 소리인지는 난 전혀 모르겠는데…….” 김용식은 강준의 시선을 외면했다. “우리가 증거를 다 확보했어. 화물적립확인서, 컨테이너 작업일지, 허위 세금계산서까지 모두 네가 위조한 거잖아! 사문서위조죄까지 추가야! 넌!” 김용식은 강준이 벌써 구체적인 증거까지 확보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김용식은 일단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빠져나갈 구멍부터 계산했다. 문서를 위조한 건 사실이지만, 변호사를 쓰게 되면 어떻게든 우겨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김용식, 쓸데없는 머리 굴릴 필요 없어! 너 플리바게닝이라고 들어봤냐?”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는 김용식이었다. “간단히 말해 순순히 유죄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해 주면 형량을 깎아 줄 수 있다는 말이지.” “휴우…… 그냥 잡아가. 더 할 말 없으니까!” 그 순간 강준은 김용식의 멱살을 잡고는 그의 기억을 읽었다. 전대성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의 기억에서 읽은 건 그가 전대성과 최진태 양쪽을 모두 배신하려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전대성에 의해 빈 컨테이너를 이용한 적하보험 사기가 기획되었다는 사실까지 읽었다. “김용식…… 재밌어지네…… 보험사기 얻은 10억, 전대성 회장 제치고 그냥 네가 먹으려 그랬구나?” 전대성 회장을 언급하는 강준에게 김용식은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왜? 그럼 안 될 거라도 있어? 차라리 잘됐지. 나도 전 회장 때문에 아주 골머리를 앓던 와중이었거든.” “감옥에 가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는 거지?” 김용식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감옥에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SI화학 보험사기…… 그거 전대성 회장이 기획한 거지? 넌 송종철 사장 살해에 대한 스모킹 건을 쥐고 있는 전 회장한테 협박당한 거고……?” 강준의 말에 눈빛이 변하는 김용식이었다. 그로서는 자신이 빠져나갈 방법을 강준이 제시해 준 거였다. “너 그걸 어떻게……?” “난 평소에 전대성 회장에게 관심이 무척 많거든.” 회귀 전 강준은 전대성의 라성캐피탈을 조사하다가 타살됐었다. 강준이 전 회장에게 집착하는 건 결자해지의 차원에서였다. ‘처음 내가 시작한 일이었으니…… 내가 끝을 보는 게 맞겠지.’ 김용식이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협조하면…… 내가 감옥에 안 가도 되나?” “아니! 넌 이번 수출무역을 빙자한 적하보험 사기로 처벌받을 거야. 하지만 주범으로 처벌받는 거랑 종범으로 처벌받는 거랑은 형량이 천지 차이겠지?” 구치소 생활을 오래 했던 김용식은 플리바게닝을 통해 형량이 어떻게 조정될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좋아……. 박강준,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내가 뭘 하면 되는데?” “홍콩으로 가서 전대성을 붙잡는 데 협조해.” “뭐? 전 회장을…… 너 전 회장 뒤에 누가 있는 줄이나 알아?” “알아, 네가 감당 안 되는 뭔가가 있겠지. 한국보험의 최진태 대표도 끌려가는 그 뭔가가 말이야…….” 김용식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잡은 박강준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김용식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전대성 회장이 자신에게 걸어 둔 목줄을 끊어 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 * * 2009년 5월. 을지로 성원화재 본사. 김준혁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1층 출입구를 통과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단독 사건이 맡겨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동료인 송지희를 만났다. “김 대리님, 축하드려요. 단독 사건 배정이요.” 무심한 듯 툭 던지는 축하 인사였다. “고맙습니다. 지희 씨가 많이 도와주세요.” “같은 팀인데 당연하죠. 근데 무슨 사건인지는 알아요?” “아직요. 본부장님이 직접 사건자료를 오늘 주신다고 했거든요.” “약혼자 실종사건이에요. 대기업 연구원인 남자가 실종됐죠. 가족들은 약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혼인신고가 되어 있었던 거고요.” “그걸 지희 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땡! 엘리베이터가 11층 SIU팀이 있는 곳에 멈췄다. “김 대리님도 매일 컴퓨터만 붙잡고 있지 말고,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고 친분도 쌓고 해요. 그래야 회사가 어찌 돌아가는지 정보도 얻고 그러죠.” 송지희는 김 대리의 어깨에 묻은 먼저를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깨 좀 펴고 다녀요! 남자는 자신감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김준혁은 송지희의 손길이 닿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어졌다. “고맙습니다…….” “얼른 가요. 늦었어요. 박 차장님이 팀 회의하신다고 그랬어요!” 잠시 후, SIU 특별수사과 회의. “난 다음 주부터 홍콩으로 출장을 가야 하니까 김 대리가 도현우 씨 사건 맡아서 잘 처리해 줬으면 좋겠어.” “전대성 회장 검거 작전인 겁니까?” “어. 맞아…… 2주 정도 예상하고 가는 거니까 내가 돌아오기 전에 김 대리가 사건 해결을 해 줬으면 좋겠어.” “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강준은 김준혁이 걱정되는지 송지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희 씨가 김 대리랑 같이 이번 사건 맡아 주고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경찰 쪽에는 누구와 협조하면 될까요?” “아무래도 보험계약자가 실종된 사건이라…… 허찬 경사에게 미리 협조를 부탁해 놨어요. 아마 공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송지희는 실종자를 찾는 게 1순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실종된 도현우를 찾을 수 없다면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준혁은 한나절 동안 사건 파일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송지희는 도현우가 평소 다니던 병원을 찾아 병적기록을 확인했다. 별다른 지병은 없었고, 그렇다고 특기할 만한 사고를 당한 것도 없었다. 평범한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가 생명보험에 가입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였다. 자신이 죽을 걸 예상해서 생명보험에 가입한 역선택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송지희는 사무실에 있는 김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리님, 병적기록 확인해 봤는데 특별한 건 없는데요?” ―아…… 진짜요? 그럼 정말 가족들 말대로 약혼녀인 김은혜가 의심되긴 하네요. “아무래도 김은혜를 직접 만나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도현우 씨 디지털 기록들을 좀 확인하고 있어서요……. 답답함이 밀려드는 송지희였다. “네, 일단 사무실로 복귀할게요.” 실종된 도현우의 가족들이 사건을 제보해 와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실종은 6개월 전에 됐지만, 가족들은 단순 실종이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혼인신고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실종 직전 가입되었던 생명보험의 존재도 드러난 것이었다. 송지희는 당장이라도 김은혜를 찾아가 추궁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건 담당자인 김준혁은 여전히 사무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본사 건물에 도착한 송지희는 1층 로비에서 강준과 마주쳤다. “박 차장님, 혹시 이번 사건 힌트 주실 거 없으세요?” “음…… 힌트라면 김은혜 혼자서 모든 걸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 “공범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하하! 그냥 감이죠. 감!” “차장님, 김준혁 대리한테도 말씀해 주신 거예요?” 강준은 송지희를 보며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지희 씨, 김 대리를 조금만 기다려 줘요. 아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김 대리도 분명히 스스로 사건을 해결해 나갈 테니까요.” 송지희는 자신이 김준혁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기다려 주는 것도 같은 팀원이 해야 할 일이죠. 근데…… 한 가지만 더요.” “말해 봐요. 지희 씨.” “도현우 씨가 실종된 지 6개월이에요. 만약 살아 있다면 시간이 없는 거잖아요. 박 차장님은 도현우 씨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세요?” 실종사건의 본질적인 문제였다. 가족들이 사건을 직접 제보한 것도 경찰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도현우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필사적일 터였다. 강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송지희를 한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만약 실종된 도현우가 죽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우리가 서두른다고 도현우 씨의 생사가 달라지진 않아요.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송지희는 뭔가 무거운 쇳덩어리가 자신의 가슴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강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보험사기에 대한 진위를 가려낼 수는 있어도 도현우의 생사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강준은 그녀에게 따뜻한 눈빛을 건네주고는 자리를 떴다. 송지희는 이제 마음속에 있던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송지희는 모니터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김준혁에게 다가갔다. “뭐, 나온 거라도 있어요?” “도현우 씨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는데…… 9천만 원이 오피스텔 구매 대금으로 빠져나갔네요.” “오피스텔이요? 사무실로 쓰려고 한 건가요?” “아니요. 그 오피스텔은 다시 전세로 나갔어요. 3개월 전에요…….” “네? 그럼 도현우 씨가 실종된 다음이잖아요!” “그렇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김준혁이었다. “그건 어떻게 안 건대요?” “부동산중개업소에 전화해 봤죠. 보통 주상복합인 오피스텔은 해당 건물에 있는 중개업소에서 임대 상황을 거의 다 파악하고 있거든요.” 생각보다 사무실에서 앉아서 많은 정보를 파악한 김준혁이었다. 송지희는 새삼 김준혁을 다시 바라봤다. “근데…… 김은혜 씨 뒤에 누군가 있는 거 같아요.” 송지희는 로비에서 만났던 강준이 공범에 대해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강준의 말대로 김준혁도 공범을 파악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세 계약을 한 사람이 김은혜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어요. 물론 도현우 씨는 아니고요.” “설마…… 김은혜와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죠?” 김준혁은 단호한 표정으로 새로운 모니터 창을 화면에 띄웠다. 그건 항공권을 예매한 웹페이지였다. “이게…… 뭐예요?” “불법이긴 하지만 김은혜 씨 메일을 뚫어봤어요……. 얼마 전에 해외여행을 다녀왔더라고요. 이호준이라는 남자와 항공권을 함께 예매해서요…… 물론 호텔도 함께 예약했죠.” 송지희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경악했다. 만약 김은혜의 보험사기가 철저히 기획된 것이라면 실종된 도현우가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