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무역회사 보험사기 (4)2022.03.15.
김용식은 결국 딴마음을 품었다. 한국보험에서 지급된 10억 원의 보험금을 가지고 홍콩으로 도피하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최진태를 통해 홍콩으로 가는 절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출국 정지가 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만일을 대비해 제3국으로 출국할 수 있는 위조여권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용식은 최진태의 의도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괜히 전대성한테 맞서 봐야 좋을 게 없지. 그리고 최진태는…… 나한테 박강준을 죽여 달라는 거 아니야? 살인범으로 쫓기는 것보다는…… 그냥 이 10억 가지고 튀는 게 훨씬 낫지! 세상 별거 없다. 괜히 둘 다 건드려봐야 좋은 거 없어!” 김용식은 담배를 한 대 깊이 빨아 물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MK물류라는 간판을 내건 인천항 근처의 사무실에서 환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전상이 오면 10억 원이라는 돈을 건네고 최진태가 건넨 중국 은행 계좌에서 다시 그 돈을 찾아야 했다. 김용식의 계획은 홍콩에 도착해 그 10억 원에 달하는 돈을 위안화가 아닌 달러로 찾아 동남아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뚜르르릉! 뚜르르릉!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표시 제한번호] “……잠깐만 거기서 기다리쇼!” 사무실 입구 쪽으로 다가간 김용식은 랩핑된 창문 틈으로 밖을 살폈다. 헬멧을 쓴 환전상이 비어 있는 돈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철컥! “SI화학 김용식 사장님?” “들어와요…….” 환전상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김용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을 잠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강준과 김준혁이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 그랬냐? 환전상이 올 거라고 했지?” “그러게요. 한국보험에서 지급된 돈이 결국은 불법으로 해외로 반출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서 저 환전상 계좌를 털면 전대성 회장까지 잡을 수 있다는 거야.” “박 차장님의 큰 그림이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빙그레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김준혁이었다. “피곤하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보험조사관의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이 잠복이잖습니까?” “그렇지! 여기 잘 보고 있어. 난 전화 좀 하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쇼!” 강준은 차 밖으로 나와 이진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감님, 이두철 얘기가 맞았네요. MK물류에서 방금 김용식 확인했습니다.” ―그럼 당장 체포하러 가겠습니다.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무슨 부탁이요? “김용식을 미끼로 쓰고 싶습니다. 전대성 회장을 잡을 수 있는 미끼로요…….” 이미 적하보험 사기 수사를 착수했기에 이진철로서도 김용식을 그대로 놔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체포 후에 상부에 의견을 전달해 보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김용식을 체포하는 것만으로 수사를 종결지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김용식 뒤에는 전대성 회장이 있습니다…….” 통화음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강준의 부탁이 어떤 의미인지 이진철은 잘 알고 있었다. ―장담은 못 드리지만, 저 역시도 박 차장님과 한뜻이라는 것만 알아 주십시오. 일단 그쪽으로 출동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경감님.” 통화를 마친 그때, 김준혁이 차의 헤드라이트를 켰다. MK물류에서 나온 환전상이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박 차장님, 얼른 타십시오!” 강준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김준혁은 차를 오토바이가 간 방향으로 급출발시켰다. “이걸로 따라갈 수 있겠어?” “네, 일단 추격해 봐야죠!” 오토바이는 좁은 골목길을 달리다 큰길가에 다다랐다. 그리고 검은 세단이 임시 주차된 곳에 다가가 돈 가방을 넘겼다. “쟨 그냥 전달책이었네. 김 대리, 번호판 찍을 수 있겠어?” “네, 잠시만요.” 거리가 좀 있는 곳에 차를 대고는 김준혁이 카메라를 꺼냈다. 망원 렌즈로 당겨 찍을 수 있는 카메라였다. 찰칵! 찰칵! 찰칵! 강준은 그사이에 이진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감님, 저는 지금 환전상을 쫓아왔습니다. 김용식은 아직 MK물류 사무실에 있을 겁니다.” ―그럼 전 김용식부터 검거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준은 추격하고 있는 검정 세단을 응시했다. 그들은 안산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 30분을 넘게 달렸을 때, 세단은 한 상가 건물 앞에 다다랐다. 안에서 내린 놈은 둘이었다. 한 놈은 전형적인 덩치였으며, 나머지 한 놈은 날랜 체형의 소유자였다. “박 차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덮쳐야지.” “네? 저놈들이 위에 몇 명이나 있는지 알고요?” 겁먹은 얼굴로 되묻는 김준혁이었다. “왜, 겁나냐?” “그럼 박 차장님은 이런 상황에서 겁이 안 나십니까?” “겁난다. 근데 그렇다고 경찰 지원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내 적성에 안 맞거든.” 강준은 조수석 아래의 글로브 박스에서 전기충격기를 꺼냈다. 그걸 본 김준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이걸로 제압하고 들어갈 테니 넌 여기서 경찰에 지원요청이나 하고 있어.” “아…… 차장님…….” 눈빛이 흔들리는 김준혁이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모르겠다는 듯 강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뭐 해? 여기 있으라니까!” “박 차장님, 저도 엄연한 보험조사관입니다. 동료를 버리고 혼자서 도망칠 순 없죠.” 강준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이내 자신의 뒤에 따라붙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환전상 두 놈이 들어간 복도를 따라 들어간 강준은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5층에 머무는 걸 확인했다. 잠시 후, 5층에 들어선 강준은 좁은 복도를 따라 CCTV가 설치된 걸 확인했다. “김 대리, 아까 이진철 경감한테 위치 전달했지?” “네…… 왜요? 정작 들어가시려니까 겁나십니까?” “에헤! 날 뭐로 보고 그러냐? 원래 보험조사관의 첫 번째 덕목이 뻔뻔함인 거 몰라서 그러냐? 일단 들이미는 거야!” 강준은 움츠러든 허리를 펴고는 복도의 마지막 사무실에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는 벨을 눌렀다.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분명 CCTV로 강준 일행을 지켜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성원화재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문 좀 열어 주시죠.” 아직 그들은 김용식이 어떤 이유로 10억 원을 환전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지 못한 듯했다. 강준의 말이 있은 몇 분 후 ‘벌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뭡니까……?” “여기 환전하는 데 맞죠?” “……아닌데?” 경계하는 눈빛으로 강준을 지켜보고 있는 이는 세단에서 내린 날렵한 체형의 환전상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부인하고 봤다. 강준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옆구리에 전기충격기를 박아넣었다. 치지칙! “억……!” 남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안에 있던 덩치가 투덕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덩치는 몸집과는 다르게 날쌨다. “젠장……!” 강준은 덩치에게 멱살을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들리고 있었다. “으으으…… 김 대리…….” 김준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강준이 떨어뜨린 전기충격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팔뚝에 갖다 댔다. 치지칙…… 치지지칙! 거구의 남자가 다리가 풀린 듯 푹 고꾸라졌다. 강준은 멱살 잡힌 손에서 풀려나 기침을 뱉어 냈다. 그리고 둘을 한쪽 구석에 묶었다. 김준혁은 그들의 돈 가방을 확인했다. “박 차장님, 돈 가방에 현금이 없습니다.” “저기 넣어 놨겠네.” 강준이 가리킨 한쪽 벽에는 성인 허리 높이까지 오는 금고가 있었다. 강준은 둘 중 날렵해 보이는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강준이 쓰러진 놈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온통 양아치들과 얽혀 술을 퍼마시는 장면들 뿐이었다. 강준은 놈의 기억을 콕 짚어 좁힐 필요가 있었다. “비밀번호?” “……우린 그냥 배달하는 사람들이라 그런 건 모른다!” “잘 한번 생각해 봐. 비밀번호가 어떻게 되는지?” “너희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애들 오면 너희 같은 것들은 거꾸로 매달려서 나한테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칠게야!” 다행히도 강준에게 협박을 늘어놓은 환전상은 머릿속으로 금고를 털릴 걸 걱정하고 있었다. 888950! 금고의 비밀번호였다. 기억 속에 그는 매일 일과인 듯 금고의 돈을 채웠다 넣는 일을 반복했다. 그들의 원화는 안산의 환전소 각지로 보내지고 있었다.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준은 환전상을 빤히 한번 본 다음 입을 열었다. “888950. 다 알고 온 거야. 다시 물을게. MK물류에서 받은 자금 중국 어디 계좌로 보내는 거야?” “너 누구니? 누군데 이리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러는 게야!” “아까 말했잖아. 성원화재 보험조사관이야. 저 안에 든 돈이 바로 보험사기로 지급된 돈이거든.” 환전상은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듯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 환전업무를 부탁받았을 뿐이야…… 누가 어디서 번 돈인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불법 환전 3만 달러 이상이면 구속된다는 거 알지?” “나 한국 생활 오래 했어. 변호사 사면 불구속에 벌금형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거 나도 모르는 줄 아니?” 뻔뻔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였다. 밖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인천에 있던 이진철 경감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말이야. 그 10억 원 누구 돈인지는 아냐?” “난 모른다고 했소!” “전대성 회장이라고 들어봤냐?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인데…… 지금은 홍콩에 있거든. 아마 그 뒤에는 너희 같은 놈들은 젓갈로 담가 버릴 수 있는 삼합회가 버티고 있을 거다.” “……내가 그런 말에 겁먹을 줄 아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릎을 꿇은 환전상 두 명은 강준의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로서는 차라리 한국 감옥에 갇혀 있는 게 더 신상에 좋을지도 몰랐다. “박 차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저 금고 속에 한국보험에서 지급된 10억 원이 들어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888950번이고요.” 이진철은 망설이지 않고 함께 온 순경들에게 지시했다. “김 순경! 당장 금고 열어 봐!” “네, 알겠습니다!” 열린 금고에서는 10억 원의 원화 현금 말고도 각종 위안화와 달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환전상들은 금고의 돈이 압수되는 걸 바라보고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끌려나갔다. “그 돈을 왜 가져가는 거야! 대한민국 경찰이 이래도 돼!” “넌 새끼야!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줄 알아! 너희 중국 계좌들 싹싹 털어서 중국 공안에도 정보를 넘길 거거든. 그럼 너희는 한국에서 처벌받고 너희 나라 땅 가서 다시 또 처벌받는 거야. 알겠어!” 환전상 둘은 그 말을 듣고는 현실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고는 필사적이었다. “변호사 불러 달라! 변호사! 이렇게 인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철썩! 철썩! 순경들이 CCTV의 사각지대로 그들을 데려갔고, 이진철은 그들의 따귀를 갈겼다. “인권 찾는 건 또 어디서 배워서! 너희같이 공권력 무시하는 새끼들은 호되게 혼나 봐야지!” 이진철 경감의 발길질은 그렇게 한동안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