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무역회사 보험사기 (1)2022.03.12.
인천 컨테이너 화물터미널. “황준 주임님 좀 만날 수 있을까요?” “황 주임? 지금 밥 먹으러 갔는데? 여기서 기다려요.” 작업자는 강준에게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사무실 한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작업자들과 수출입 무역 관계자들이 드나들며 엉키는 곳이라 아무도 소파에 앉은 강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강준을 따라온 김준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박 차장님, SI화학부터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용식이 구치소에서 석방돼서 대놓고 보험사기를 치는 거 같은데 회사 찾아간다고 ‘어서 오세요’하고 반기겠어?” “박 차장님 말씀은 김용식이 차린 SI화학이 유령회사라는 거죠?” “내가 아는 김용식이라면…… 만약 동명이인인 김용식이라도 해도 서류부터 역추적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그때 한 무리의 작업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왔는지 커피믹스와 종이컵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담배를 피우러 떼 지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실례합니다만, 여기 황준 주임님 계십니까?” “어? 황준? 자네 부르네.” 무리 중 한 명이 한 남자를 가리켰다.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이 인상적인 50대를 훌쩍 넘긴 남자였다. “제가 황준인데…… 누구슈?” “성원화재 보험조사관으로 나왔습니다.” “뭐? 보험조사관?” “네. 황준 주임님이 이 화물적립확인서에 서명하셨죠?” 강준은 준비한 화물적립확인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어디 보자…… SI화학이라…… 날짜는 2009년 4월 8일…… 딱 한 달 전 일이네.” “네, 한 달 전에 선적된 컨테이너가 홍콩항으로 향했는데 현지 수입업체에서 클레임을 걸어왔습니다.” “클레임? 무슨 클레임?” “빈 컨테이너가 왔다는 거죠.” “뭐? 빈 컨테이너?” 사뭇 놀라면서도 그 표정을 황급히 숨기는 황준이었다. 뭔가 뒤가 켕기는 듯한 그였다. “제가 볼 때는 한국에서부터 선적을 안 한 거 같거든요. 그날 컨테이너에 화물이 실려 있는 걸 직접 보셨습니까?” “어…… 어 봤지! 그러니까 내가 거기에 싸인을 한 거고…… 내가 하루에도 컨테이너를 수십 개씩 내보내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문제는 없었어.” 뭔가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두는 황준의 답변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강준은 그의 기억을 강제로 읽어 내야 했다. “황 주임님, 그럼 이것도 한번 봐주시죠.” 강준은 서류를 넘기면서 황준에게 내밀었다. 황준이 서류를 보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 강준이 그의 굽어진 등을 툭 쳤다. 그러자 황준이 들고 있던 종이컵에서 커피가 출렁이며 쏟아졌다. “에헤! 커피 쏟았네. 젠장!” “아이고! 죄송합니다!” 작업복을 툭툭 털어내는 황준에게 강준이 휴지를 들고서는 그의 옷을 닦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예상대로 황준의 기억 속에는 김용식이 등장해 있었다. 컨테이너 적하보험 사기에는 YS무역 사장이었던 김용식이 연루되어 있던 것이었다. [황 주임님, 여기 서류에 서명만 해 주시면 끝! 바로 이백 입금해 드리고요.] [컨테이너가 10개나 돼?] [에이…… 개수가 무슨 상관이에요. 요즘 수출 간소화 절차 때문에 컨테이너 열어 보지도 않는다니까요…….] [그래서 그랬나? 하긴 요즘 관세청에서 직접 확인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더라고.] [그러니까요. 그니까 황 주임님은 여기 서명만 해 주시면 되는 거예요.] 서류에 서명한 황준은 뒤늦게 김용식에게 물었다. [……근데 빈 컨테이너는 왜 보내는 거야?] [저 환전상 하시는 거 아시잖아요. 수출로 위장해서 합법적으로 중국에 돈 보내는 방법이죠.] [내가 모르는…… 그런 세계가 다 있었구먼…….] 황준은 그것이 큰 범죄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서류 한 장에 눈 딱 감고 서명 하나 해 줬을 뿐이었다. 받은 돈도 많지 않았다. 2백만 원! 문제가 되면 토해내면 그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강준은 황준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황준이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 냈다. “황 주임님, 다시 한번 봐주십시오. 이거 보험사기하고 연관된 부분이라서요. 잘못되면 황 주임님도 아주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뭐? 내가 왜?” “그야 빈 컨테이너를 정상 화물이라고 확인해 주셨으니까요. 통관에서도 이 서류만 보고 통관을 시켜준 거고요.” “…………난 잘못한 게 없을 텐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잘못되면 황 주임님도 보험사기 공범으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표정이 어둡게 변하는 황준이었다. 그는 입에 물었던 담배에 불도 붙이지 못한 채 멈칫거렸다. “황 주임님,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이거 부탁받고 해 주신 거죠? 제가 김용식 그 인간을 아주 잘 알거든요.” “뭐? 당신이 김용식을 알고 있다고?” “네, 사업이랍시고 이것저것 뒤가 구린 일들을 많이 하죠. 주임님이 괜히 그런 놈이랑 엮일 이유가 없는 겁니다.” 애초부터 황준과 김용식의 관계는 철저히 입단속이 될 만큼 단단한 관계는 아니었다. 황준은 잠깐 망설이다 이내 강준의 설득에 넘어갔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경찰에서도 정상참작이 되니까 큰 처벌 받으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황준이 화물터미널의 일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지는 강준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심으로 돈을 받고 묵인해 준 대가는 황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클지도 몰랐다. * * * 인천항 MK물류. 김용식이 책상 서너 개를 이어 놓은 삭막한 사무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회장님……. 알죠. 이번에도 10억 배상 한도로 몇 군데 적하보험 가입을 해 놨습니다. 네…… 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용식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천정만 바라보던 김용식은 갑자기 전화기를 집어 벽에 던졌다. 퍽! 데굴데굴! 플라스틱 전화기가 콘크리트 벽에 한 번 부딪힌 후, 바닥에 나뒹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김용식이 혼잣말을 지껄였다. “시발…… 개새끼……! 내 목에 개 목걸이를 채워?” 송종철 사장의 살해 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김용식을 구해 준 건 좀 전까지 전화 통화를 했던 전대성 회장이었다. 중국으로 도피했던 전대성 회장은 여전히 한국의 검찰을 자기 손안에서 주무르고 있었다. 김용식도 그게 뭔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검찰을 상대로 오래전부터 해 왔던 뇌물과 접대. 덕분에 해외로 도피한 전대성의 모든 수사는 기소 중지된 상태였다. 김용식이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살해 현장에 있었던 7Bar 여직원의 증언이었다. 전대성은 김용식이 자신의 뒤통수를 칠 때를 대비해 언제든지 여직원의 증언이 뒤집힐 수 있게 만들어 둔 상태였다. 즉, 살인범으로 교도소에 가느냐 아니면 전대성의 개가 되느냐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선 김용식이었다. “내가 그 새끼 개가 되느니 다 터트리고 대한민국 뜬다! 시발!” 이를 꽉 깨문 김용식은 벽에 걸린 달력의 날짜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새로 보낸 컨테이너가 홍콩항에 도착하는 날짜였다. 김용식도 보험사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수출 컨테이너에 문제가 생긴 걸 빌미로 보험금을 또다시 지급 요청했다간 보험사기로 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다.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김용식이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띠리리! 띠리리링! 김용식의 밑에서 일하는 부하의 전화였다. “어? 왜?” ―SI화학 사무실에 사람이 다녀갔다는데요? “뭐? 그걸 어떻게 알았어?” ―CCTV에 찍혔더라고요. 아무도 없어서 되돌아가긴 했다는데 심상치 않은 놈들이더라고요. “나한테 그 영상 메일로 보내봐.” ―네, 알겠습니다. 부하의 전화를 끊자마자 김용식은 인터넷에 들어가 SI화학에 관한 기사를 찾아봤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검색 결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용식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머릿속에는 성원화재 보험조사관 박강준이 어른거렸다. 대전 유성에 숨어 있을 때도 자신을 끝까지 쫓아왔던 박강준이었다. “박강준…… 이 거머리 같은 새끼…… 이번에도 내 발목 잡기만 해 봐. 아주 박살 내놓을 테니!” 독기 어린 눈으로 빈주먹을 쥐는 김용식이었다. 그는 박강준이 자신을 잡기 전에 전대성 회장의 보험금을 들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띠링! [사장님, 메일 보내드렸습니다.] 부하로부터 온 문자 메시지였다. 김용식은 메일함에 들어와 영상을 틀었다. SI화학의 사무실 앞에는 낯익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CCTV가 있는 곳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뺨에 갖다 대고는 연락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김용식이 우려했던 성원화재의 박강준이었다. “우와…… 시발! 거머리 같은 새끼!” 강준은 김용식의 존재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었다. 김용식으로서는 자신의 계획이 전부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김용식은 진땀을 흘리며 바닥에 나뒹군 전화기를 다시 주워들었다. 전대성 회장과 통화하던 핸드폰은 경찰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대포폰이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제가 자꾸 전화하지 말라고 했죠……? “사정이 좀 급해서 말입니다…… 성원화재 박강준이 냄새를 맡은 모양입니다.” 김용식이 전화한 상대방은 한국보험 대표 최진태였다. 그 역시 전대성에게 발목을 잡혀 김용식의 보험사기에 눈감아 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아…… 짜증이 나네……. 김용식은 재벌 2세인 최진태의 반응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김용식의 SI화학이 한국보험에 걸어 놓은 보험이 10억 원이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상황이 좀 힘들게 됐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최진태에게서 결이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건 마치 상대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말투였다. ―김용식 사장님, 저나 사장님이나 이대로 전 회장한테 휘둘릴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어서요…….” ―그러니까요. 우리 둘이 말이 좀 통할 거 같은데, 어때요? 순간, 김용식은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는 걸 직감했다. “대표님, 그럼 한번 제가 찾아뵐까요?” ―보는 눈들도 있고 하니까 지난번에 봤던 백 지점장이랑 만나셨다던 그 신사동 레스토랑 알죠? “그럼요! 기억합니다. 거기서 계약서 작성했었으니까요” ―거기서 보는 거로 합시다! 내일 저녁에 어때요? 생각보다 일이 급속히 진전되고 있었다. 김용식은 흥분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는 거로 하겠습니다. 대표님!” 전화를 끊은 김용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그래! 뭐든 이렇게 해결책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기소 중지가 되었다지만 해외 도피 중인 전대성보다는 최진태를 따르는 게 김용식에게는 여러모로 유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