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SIU팀 조직개편 (101/250)

101. SIU팀 조직개편2022.03.11.

이정훈 팀장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사표를 만지작거렸다. 그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사에 충성해 왔다. 물론 그 충성의 대상이 그때그때 마다 계속 달라지긴 했어도, 이정훈은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살아남는 것이 승자인 세상! 이정훈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이라며 애써 자신을 합리화했다. 생각해 보면 최진태 이사 쪽에 서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사과를 장악한 최진태가 이리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김성호 이사님 줄을 놓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보험조사팀의 조직개편을 앞두고 제일 먼저 잘려야 할 사람은 이제 본인이었다. “팀장님, 전체 회의 참석하시랍니다!” “어, 알았어.” 부하 직원들도 얼마 전부터 슬슬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때는 술자리에서 건배사로 ‘팀장님 화이팅!’을 외치던 노골적인 놈들이었지만 청출어람이라고 했던가? 끈 떨어진 자신을 대하는 냉랭한 태도는 예전의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때 보험조사 1팀의 사무실에 낯익은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때 직속상관이었던 김성호 이사였다. 그는 구석 자리의 이정훈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이 팀장, 오랜만에 같이 차나 한잔하지.” “왜요? 제 꼬락서니 구경이라도 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이런 속 좁은 사람…… 자네가 잘 안 되면 내가 속으로 좋아할 거 같았나?” 김성호 이사의 말에 이정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서 그런 걸까? 그는 왕년의 사수와 몇 년간 대립각을 세워 왔던 스스로가 새삼 초라하게 느껴졌다. 직원 휴게실에 앉은 두 사람은 종이컵에 탄 커피를 나눠 마셨다. 이번에는 이정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사님, 저 이번에 그만둡니다……. 15년 동안 성원화재에서…… 이제 지겹네요.” “왜? 누가 너보고 그만두래?” “잘 아시잖아요? 그 정도 눈치는 저도 있습니다.” “한국보험으로 가면 될 거 아니야. 이제 최진태가 계열사 분리를 완전히 할 모양이던데…….” 김 이사의 말에 이정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냥이 끝난 사냥개처럼 버려진 그였다. “이제 직장 생활은 질리네요. 저도 이번 기회에 제 일이나 시작해 보려고요.” “뭐? 나가서 할 일은 있고?”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죠. 김 이사님이 항상 그러셨잖아요.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라고…….” 한때 서로 호흡을 맞췄던 둘이었다. 빠릿빠릿했던 이정훈과 시야가 넓은 김성호 이사는 찰떡궁합의 팀웍을 만들어 냈고, 그런 둘이 성원화재 보험조사팀의 근간을 만들어 낸 거나 다름없었다. 종이컵에 있는 커피를 홀짝인 김성호 이사가 이정훈을 슬며시 쳐다보며 웃었다. “자네도 중년이잖아. 나가서 괜히 돈 까먹지 말고 여기에 딱 붙어 있어!” “에이, 됐습니다. 제가 여기 있으면 불편할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조직 내에서는 이미 조직개편 이후에 강준이 SIU(보험사기 특별조사팀) 보험조사팀장에 오른다는 게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자네를 SIU팀 본부장에 추천한 사람이 있어.” “……네? 저를요? 누가 절…….” 이정훈은 그제야 김성호 이사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는 걸 직감했다. “박강준 과장!” “네……? 박강준 그 인간이요……?” 자신이 줄곧 괴롭혀 왔던 박강준이었다. 보험조사 2팀의 성과를 단순수치로 비교해 깎아내리고 시간을 잡아먹는 업무를 일부러 떠넘겨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강준의 팀을 마비시키기 일쑤였던 이정훈이었다. “왜 놀랐어?” “아니…… 좀 의외라서요…….” “박 과장이 그러더라. 지금 자기가 SIU 전체 팀장이 되면 따를 사람이 많겠냐고? 언론 주목을 좀 받았던 거로만 팀을 이끌 수는 없다고…… 그래서 자네를 추천했어.” “아…… 그렇게 된 거로군요.” 김성호 이사의 말이 진짜건 아니건 이정훈 팀장에게는 새로운 국면이었다. “이정훈! 아까 너 회사 그만둔다는 얘기, 못 들은 거로 하자고.” 민망했지만,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네……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하긴 뭘 생각해! 변한 거 없어. 이정훈, 넌 예전처럼 보험조사팀 이끌어 가면 되는 거야.” 이정훈은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이사님, 그럼 박 과장이…… 제 밑에서 계속 보험조사팀에 있겠답니까?” “왜 부담스러워?” “그게 아니라…… 박 과장이 그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그게 문제죠…….” “그건 자네가 직접 물어봐! 지금쯤 다들 모였을 테니 같이 들어가 보자고.” 회의실에 들어간 이정훈은 보험조사 두 팀을 합친 스무 명도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는 걸 목격했다. “뭐야? 회의는 어떻게 되 가?” 태연한 듯 되묻는 이정훈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본부장님!” “축하드립니다!!” 회의실 직원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훈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강준과 보험조사 2팀의 김준혁, 송지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다들 이래?” “방금 인사과에서 발령 통보가 왔습니다. 오늘부터 본부장님이십니다!” 회사 내부 인트라넷에 공고가 직전에 뜬 것이었다. 이정훈 팀장은 강준을 바라봤다. “박 과장, 잘해 보자고…….”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겸손하게 답하는 강준이었다. 둘의 어색한 대화였지만, 이정훈의 목소리에서는 그간의 날 선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정훈 팀장의 자리에는 조직개편 내용이 간략히 적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의 진급이 있었고, 보험조사 1팀과 2팀은 SIU팀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최은정은 예정대로 전략기획팀으로 보직 이동되었다. “……박 과장도 이제는 차장을 달았군. 축하해.” “감사합니다.” 진급 대상자에는 송지희보다 먼저 입사한 김준혁이 대리를 달게 됐다. 혹독한 전산 업무에 시달린 그를 윗선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잘 들어! 어쨌든 이제는 같은 부서가 되었으니 어색한 사람도 있고 그렇겠지만…… 다들 서로 잘 보듬어주고 보험사기 잡는 거에만 최선을 다해 보자고! 보험업계 1위 보험사기 특별조사팀을 위해 화이팅하자고!” 새로 한 팀이 된 직원들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발언하는 이정훈이었다. 그런 이정훈을 보며 김성호 이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비켜 줬다. 그리고 그런 김성호 이사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는 한때 최진태 쪽에 섰던 이희성 이사였다. “이 이사, 윤미경 감사 쪽 움직임은 어때?” “일단 한국보험을 상장시킬 생각인 거 같습니다. 부채만 좀 털어 내면 대략 그림이 나오거든요.” “자네는 노선 확실히 정했어?” 김성호 이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이희성 이사에게 물었다. 얼마 전까지 남들이 봤을 땐 윤미경 감사와 최진태 쪽에 붙은 것처럼 보였던 이 이사였다. “직장인이 노선이라는 게 어딨습니까? 그러는 김 이사님께서는 최창식 회장님 노선이라 최진호 대표를 도우신 겁니까?”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이희성이었다. 어쩌면 그런 처신이 이희성 이사의 진짜 저력인지도 몰랐다. 김성호 이사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이희성 이사의 팔꿈치를 툭 쳤다. “자네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이왕 솔직한 얘기가 나왔으니 한번 물어보지. 최진태 이사가 정말 그룹을 분할할 것 같아?” “성원그룹을 먹는 데 실패했으니 독립하겠죠. 근데 최진태 이사는 회사를 오래 경영해 나갈 인물이 못됩니다. 중간에 M&A로 털고 한몫 크게 챙기려고 하겠죠.” 김성호 이사는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진지하게 물었다. “이 이사, 우리가 한국보험 인수전에 뛰어드는 건 어떨 거 같나?” “글쎄요, 핵심 사업의 시장점유율을 올린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인수합병으로 인한 이득이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성호 이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한국보험을 그대로 놔뒀다간 성원그룹의 보험사업의 잠재적인 경쟁자가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인수전에 뛰어들자니 출혈이 클 것 같았다. * * * 며칠 뒤. 성원화재 SIU팀. 이정훈 본부장은 자신의 방으로 강준을 불렀다. “박 차장, 팀 합쳐진 이후에 좀 어때?” 예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말투의 이정훈이었다. 그는 내심 대놓고 왜 자신을 추천했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상사로서 자존심이 그 질문을 망설이게 했다. “생각보다 처리해야 할 사건들이 많아서 좀 놀랐습니다. 그간 본부장님께서 얼마나 머리가 아프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자기 입장을 이해해 주는 강준의 대답이 이정훈의 마음을 더 누그러뜨렸다. 지난날의 갈등 따위는 이제 정말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박 차장이 그래도 우리 성원화재 보험조사팀에서는 나름 스타잖아.”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SIU팀으로서도 박 차장 같은 스타 한 명은 필요하지. 그래야 팀원들 사기도 살고 말이야.” 이정훈이 나름 강준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발언이었다. “본부장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앞으로 본부장님과 잘 지내보고 싶습니다. 제게 원하는 바가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강준은 이정훈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이정훈은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강준에게 내밀었다. “참! 그리고 오늘 박 차장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어. 이 사건 한번 맡아 줘야겠어.” “……이게 뭡니까?” “무역회사 적하보험인데, 거기 대표자 이름을 한번 봐봐.” “SI화학…… 김용식 대표라…… 이 김용식이 제가 알고 있는 그 김용식이 맞습니까?” “어, 맞아. 송종철 사장 살인 혐의로 체포됐었잖아. 근데 대법원에서 무죄가 났더라고. 나도 놀랐어.” 보험금 지급요청 서류에는 분명 구치소에 있어야 할 김용식의 이름으로 설립된 무역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I화학이라……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나 본데요?” “새로운 사기를 벌이려는 거겠지. 보험금 지급 액수가 10억 원이야. 딱 보험금 한도까지지.” “한국에서 선적한 합성수지가 홍콩항만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네요?” “종종 있는 사건이긴 한데 대표자 명의가 김용식이라서 박 차장한테 얘기하는 거야. 박 차장이 예전에 파헤치던 사건이잖아. 중간에 내가 가로챌 수도 없고 말이야…….” 나름의 배려를 해 주는 이정훈이었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근데 혹시 제 예전 팀원들 이 사건에 투입해도 될까요?” 민감한 문제였다. 이정훈으로서는 예전 팀원들을 박강준에게 붙여 줬다가는 부서 간 파벌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정훈은 자신을 본부장 자리에 추대해 준 강준에 대한 고마움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박 차장,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SIU팀 내 특별수사과를 한번 만들어 보는 거 어떨까?” “특별수사과요?” “어, 어차피 박 차장이 자동차 보험사기 쪽으로는 약하잖아.” “네. 그건 그렇죠.” 차량 보험사기는 전직 교통경찰 출신의 보험조사관들이 꽉 잡은 분야였다. 회귀 전 형사과 출신의 강준이 달려들기엔 힘에 부치는 형국이었다. “지금이야 개인 보험사기 건이 더 많지만, 앞으로는 더 조직적인 보험사기 비중이 높아질 거라고…… 우리 성원화재 SIU팀이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있고.” 이정훈 본부장은 책상에서 일어나 강준의 어깨를 짚어 줬다. 안경 너머 그의 눈빛에서는 강준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 있었다. “특별수사과를 만들어 주시면 한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강준은 고개를 숙이고는 본부장실을 빠져나왔다. 강준은 이제 사내 정치에서 한 발짝 벗어나 보험사기를 파헤치는 데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됐다.

16555210991633.png

1655521099164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