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스킨스쿠버 살인사건 (4)2022.03.10.
에덴의 서쪽 포인트. 테크니컬 다이빙 전문가인 박철은 입수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최대 수심은 29미터! 수온 30도, 시야는 12미터입니다! 조류도 안정적이고요. 이 정도면 잃어버린 수중카메라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죠.” 박철의 반대편에는 강준과 피터 장, 그리고 최은정이 선상에 앉아 있었다. “그 말씀은 상대도 찾기가 쉬울 거라는 말씀이네요?” “네, 정확한 지점만 알고 있으면 쉽겠죠. 결국, 지금으로서는 상대의 선박을 쫓아가는 게 제일 좋다는 말입니다.” 강준 일행이 탄 배는 정민규의 전 매니저 이진섭이 섭외한 배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박철은 망원경으로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의 선박을 가리켰다. “박 과장님, 배가 출발했습니다!” “우리도 가시죠!” 이진섭의 배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한참을 달려 커다란 암석 근처에 정박했다. 마치 다른 배의 시선으로부터 숨어들 듯 암석 뒤쪽의 포인트에 말이었다. 조심스러웠다. 더 다가가자니 이진섭의 배가 강준 일행을 의식할 것 같았고, 반대로 다가가지 않고서는 증거물을 상대에게 빼앗길 것 같았다. “박 과장님, 어떻게 할까요?” 박철이 수중 마스크를 얼굴에 뒤집어쓰고는 강준의 지시를 기다린다는 듯 말했다. 강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이진섭의 배를 멀리서 바라봤다. “이진섭의 배가 완전히 멈춰 섰네요. 이 근처에 수중카메라가 있다는 겁니다. 어차피 수중 시야는 맑은 상태이고요. 이제 저쪽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제가 들어가서 저 일대를 모조리 뒤지겠습니다!” 강준 일행의 배가 이진섭의 배에 다가가자 시야에 다이빙 슈트를 입은 오지영이 강준의 시선에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강준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얼른 얼굴을 숨겼다. 오지영은 이진섭과의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강준이 탄 배의 선장은 더 노골적으로 바짝 배를 갖다 댔다. “오지영 씨! 한국에 안 들어가고 정리해야 할 일이 이거였나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노출한 오지영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당신들 뭐야! 뭔데 우리 따라다니는 거냐고!” “혹시 바닷속에 뭘 빠뜨리고 온 건 아니죠? 그래서 다시 온 건가요? 범인은 항상 현장을 찾는다는 속설, 이번에도 틀리지 않네요!” 강준의 말을 알아들은 오지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강준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증거품인 수중카메라를 먼저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박 과장님 저 먼저 들어갑니다!” “전 이진섭을 맡겠습니다. 그럼 물속의 증거품 확보는 박철 실장님께 부탁드립니다!” 풍덩! 풍덩! 강준은 회귀 전 자신이 배웠던 다이빙 훈련의 감각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귀에 압력이 높아졌고, 강준은 자연스럽게 이퀄라이징을 통해 수압을 견뎌 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강준이 제압해야 할 상대가 보였다. 그는 오지영의 수색을 돕고 있는 이진섭이었다. 강준은 오지영을 호위하고 있는 이진섭을 위에서 덮쳤다. 그리고 그의 몸을 붙잡고 수면으로 상승했다. 이진섭은 당황한 듯 강준을 뿌리치려 했지만, 부력 때문에 몸이 위로 끌려 올라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사이 다이빙 전문가 박철은 압도적인 하강 속도를 보이며 바다 밑바닥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오지영이 다가가려던 방향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부글부글! 오지영의 호흡이 빨라졌고, 호흡기에서는 공기 방울이 빠른 속도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테크니컬 다이버인 박철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수면 위. 이진섭과 강준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이진섭의 주먹이 몇 차례 강준의 얼굴에 꽂히기도 했다. 하지만 둘이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박철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아하! 푸하! 박 과장님 찾았습니다!” 박철의 손에는 방수케이스에 든 수중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뒤늦게 수면 위로 올라온 오지영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자신의 배 위로 올랐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오지영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박철과 강준을 바라봤다. “당신들 지금 절도야! 그 카메라 내가 얼마 전에 빠트린 거였다고! 당장 내놓지 않으면 여기 태국 현지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이진섭은 그녀를 도와 험한 말을 뱉어 냈지만, 강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카메라는 정민규 배우 거던데요? 경찰에서 벌써 확인했습니다. 태국으로 출국하기 며칠 전 정민규 씨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이 카메라를 신용카드로 구매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강준의 말에 오지영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계획대로 태국에서 버티기만 하면 정민규의 사망보험금과 미지급 정산금을 찾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 * * 청담동 JIN필름 사무실. 남궁진 대표는 인터넷에 쫙 퍼진 언론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정민규의 전처인 이해영이 앉아 있었다. ―얼마 전 안타깝게 사망했던 정민규 배우의 사망에 새로운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당초 태국 현지에서의 다이빙 사고로 전해졌던 정민규의 사망은 실제로는 거액의 사망보험금을 노린 보험사기 살인사건임이 경찰의 수사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이는 정민규의 재혼상대자로 알려졌으며, 정민규의 전 매니저와는 내연관계임이 밝혀졌습니다. 대한뉴스의 이유린 기자에 의한 특종은 국내의 모든 언론사로 퍼져 나갔다. “저도 너무 안타까워서 며칠 밤잠을 못 잤습니다. 회사로서도 크나큰 손해고요. 형수님께는 뭐라 위로의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민규 형 정산금입니다. 받으시죠.” 은행에서 발행된 거액의 수표 여러 장이었다. “아이들 아빠 유산이네요. 고마워요. 여러 모로요.” “제가 한 일이 있나요? 태국까지 가서 일 처리를 해 준 성원화재에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궁 대표가 현지 비용을 대 줬다는 얘기 전해 들었어요. 박강준 과장한테서요…….” 둘은 잠시 침묵했다. “오지영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 태국에 있다고 하던데…….” “아마, 송환 절차에는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한국에 들어오면 살인죄로 처벌을 받아야 하니까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려고 하겠죠.” “전 그 둘이 내연관계였다는 것도 충격이네요…… 그런 여자를 믿고 결혼까지 하다니…….” 이해영은 전남편 정민규를 안타까워했다. “그나저나 소속사 배우들을 많이 뺏겨서 어떻게 해요?”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만…… 버텨 봐야죠. 이보다 더 어려운 시절에도 버텨 냈는걸요.” 왕총은 결국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로아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했다. 길정훈이 구속된 로아 엔터테인먼트는 알려지지 않았던 각종 채권자가 몰려와 회사가 엉망이 됐고, 당연히 소속 연예인들도 뿔뿔이 흩어질 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의 신흥재벌 왕총의 등장은 매스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겉으로는 로아 엔터테인먼트의 구원자처럼 등장했지만, 실제로 그는 채권단과의 협상을 통해 헐값의 할인된 가격으로 회사를 인수했다. 채권단으로서도 허공에 돈을 날리느니 헐값이라도 파는 걸 선택한 거였다. “배우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들까지 빼간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콘텐츠 제작하는 데 어려워지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결국 비즈니스의 세계니까요. 좋은 계약 조건에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죠. 그걸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거고요.” 왕총이 로아 엔터를 인수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심복인 서광길을 시켜서 타 엔터사의 연예인들과 작가들을 빼 오는 작업이었다. 그중에서도 왕총은 남궁진의 JIN필름을 첫 표적으로 삼았다. 왕총은 일전에 자신이 받았던 수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돈 JIN필름에 투자하죠. 민규 씨도 그걸 원할 거예요. 남궁 대표님과 같이 이 회사를 세운 거나 다름없잖아요. 이렇게 허망하게 회사가 무너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겠네요.” “아닙니다. 형수님, 괜찮습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대로 극복해야 하는 거니까요…….” 에둘러 거절하긴 했지만, 상황이 힘든 남궁진이었다. 어떻게 압력을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투자사에서 제작하려던 영화의 투자가 철회됐다. 이유는 투자사의 시나리오 변경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제 걱정이라면 하실 필요 없어요. 보험사에서 민규 씨 사망보험금이 저한테 나왔거든요. 남은 유족들한테 나온 건데 아이들은 아직 미성년자라 제가 대신 받게 됐죠.” 민법 제1004조 1항에 의하면 피상속인을 살해한 자는 상속인이 될 수 없었다. 오지영이 정민규 재산의 상속인에서 배제되는 건 당연했다. “아…… 상황이 그렇게 된 거군요.” “투자에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JIN필름을 잘 키워서 주식시장에 상장해 주세요. 남궁 대표님은 잘하실 거예요. 민규 씨가 그랬거든요. 남궁 대표가 뚝심 있는 사람이라고요…… 괜히 외부에 흔들리지 말고 본인이 하려던 거 하세요.” 남궁진은 그렇게 말해 주는 이해영에게 마음속 깊이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 * * 그 시각 성원화재 본사. “이진섭이 홍콩으로 출국했다고요?” “네, 경찰에서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근데 이상한 건 오지영하고 같이 가지는 않았다는 거죠.” 김준혁은 상황 보고를 했다. “혹시 본인만 살겠다고 오지영을 버리고 간 건 아닐까요? 같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따로 움직이는 게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도 쉽고요.” 송지희가 나름의 추론을 펼쳤다. “일리 있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오지영을 앞세워 실질적으로 보험사기를 설계했던 건 이진섭 그놈이야. 태국에 버려진 오지영은 아마 체포될 가능성이 커! 한국 경찰에서 정식으로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을 했으니까.” “그걸 알고 일부러 먼저 움직인 거겠네요.” “잠깐…… 근데 그걸 어떻게 이진섭이 알았지?” 잠시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송지희가 침묵을 깨고 의견을 말했다. “겁을 먹고 먼저 내뺀 건 아닐까요?” “아니야…… 국경을 넘는다는 건 일부러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데, 적색수배를 앞두고 움직였다는 건……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거지.” “박 과장님은 그럼 경찰 윗선과 이진섭이 내통하고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내통까지는 아니지만, 누군가 정보를 준 사람이 있을 거야. 평소에 알고 지내는 고위 경찰급 간부겠지…….” 김준혁도 거들었다. “하긴 연예계에서 그런 일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기획사에서 전방위 로비를 펼친다고요.” 김준혁의 말에 강준의 머릿속에서 하나 스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구속된 로아 엔터테인먼트의 길정훈이었다. 소속사는 달랐지만, 이진섭은 접대를 빌미로 자신과 친분이 있는 검찰이나 고위 경찰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사건은 일단 여기까지만 손대는 거로 하자고. 나머지는 경찰의 몫이야. 우리는 보험금을 오지영이 아닌 다른 유족들에게 잘 지급했으니 할 일은 한 거고.” 강준의 말에 나머지 둘은 선뜻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둘도 사건을 더는 끌어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원화재 보험조사팀의 대대적인 개편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정훈 부장이 이끌던 보험조사 1팀과 최은정 팀장이 이끌던 보험조사 2팀이 합쳐지게 된 것이었다. “참, 박 과장님! 이번에 통합되는 보험조사팀 팀장 자리를 맡으시게 되는 거 아닙니까?” 김준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맞아요. 최은정 팀장님은 전략기획팀으로 가시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잖아요.” 송지희도 내심 강준이 통합되는 보험조사팀의 수장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서라! 괜히 머리 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어! 사내 정치 그거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다들 잘 알잖아.” 강준은 민간 기업의 보험조사팀장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팀원들과의 소주 한잔 기울일 시간이 더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