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주주총회2022.03.06.
2009년 3월. 성원생명 정기 주주총회. 최진태는 결국 칼을 빼 들었다. 최창식 회장의 병세는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부친인 최창식 회장이 주주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된 틈을 타 최진태는 이복형 최진호를 성원생명 대표 자리에서 밀어낼 생각이었다. 물론 그 계획에는 그의 모친 윤미경 감사의 입김이 작용이 있었다. “안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원건설 이종도 대표님, 발언하시죠!” “성원생명의 지난 두 분기 실적이 많이 저조합니다. 현 경영진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으며 성원생명 최진호 대표에 대한 해임안을 제출합니다.” 이종도 대표는 서류 한 장을 주주총회를 진행하고 있는 인사팀의 이희성 이사에게 전달했다. 실질적으로 최진태가 제기한 해임안이나 다름없었다. 짧게 술렁이기도 했지만, 주주총회장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해임안 의결을 반대하시는 주주분은 없으십니까?” 의례적인 사회자의 질문이었지만, 최은정이 거수하고 발언권을 얻었다. “성원생명의 대주주이시자 저의 부친 최창식 회장님께서는 이번 해임안에 의결권을 행사하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겨우 2분기의 실적을 가지고 경영성과를 논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최은정은 최진태를 노려보면서 발언했다. 그러자 최진태의 옆에 있던 이종도 대표가 눈치를 보면서 거수했다. “최 회장님의 건강 상태가 언제 다시 회복되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국내 보험업계는 해외 보험사들의 진출로 인해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영진의 선택은 기업의 생존을 좌지우지합니다! 해임안 진행을 요구합니다!” 마이크를 잡은 이희성 이사는 주주총회에 참석한 주주들의 면면을 한번 살핀 후, 발언을 이어갔다. “이종도 대표의 해임안은 상법상 합당하다고 판단됩니다. 의결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주주총회장은 술렁였다.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최진태의 지시를 받은 직원들이 투표함을 들고 일사불란하게 주주들의 표를 받아 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대인해운의 구상옥 회장이 아들인 구민철 과장과 함께 등장했다. 그리고 구상옥 회장의 곁에는 강준도 있었다. 강준은 주주총회장의 맨 앞자리에 앉은 최진호 대표와 멀리서 눈빛을 마주치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세요? 잘 지내셨죠?” 구상옥을 발견하고 득달같이 달려온 이는 최진태의 모친이자 최진호에 대한 해임안을 물밑에서 실질적으로 추진해온 윤미경 감사였다. “저번에 골프 모임에 왜 안 오셨어요? 제가 구 회장님이 오시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제가 끼기 좀 불편한 자리라서요… 그럼 이만…….” 윤미경 감사가 주최한 골프 모임에는 현직 검사장들과 차기 대권후보인 박상도 의원이 참가하는 자리였다. 돌려 말하자면 구상옥 회장에게 차기 정권에 줄 서게 해 줄 테니 후원금이나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구 회장은 그런 작당 모의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근데 구 회장님이 저희 성원그룹 직원과 같이 다니는 모습이 좀 우습네요…….” 강준은 나서서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구 회장이 먼저 나섰다. “윤 감사님 회사의 뛰어난 보험조사관이 지난번에 저희 대인해운의 화물선을 해적들로부터 구해 줬지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도가 있는 질문에 정중하게 받아치는 구상옥 회장이었다. 강준으로서도 사내에서 노선을 확실히 한 만큼 최진태 이사 편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었다. “호호! 근데 제 눈엔 왠지 박강준 과장을 통해서 저희 성원그룹을 호시탐탐 노리시는 거 아닌가요? 예전에 그러셨던 것처럼요…….” 윤미경은 IMF 시절 보험사 인수전에서 구 회장이 성원그룹에 밀렸던 일을 일부러 끄집어낸 거였다. 구 회장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이번엔 강준이 나섰다. “감사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전 정식으로 회사의 지시를 받고 보험계약사인 대인해운의 보험사고를 처리했을 뿐입니다.” “아? 그래? TV에 몇 번 나온 유명세를 이용해서 구상옥 회장님께 접근하려고 했던 게 아니고?” “원하신다면 언론 노출은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관심은 부담스러우니까요.” 강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언론에 노출되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강준이 보험조사 업무에 있어서 협조를 구하는 건 더 수월해졌지만, 그만큼 지켜보고 있는 눈도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박 과장, 그래도 꽤 겸손한 척은 하네…….” 윤미경 감사로서도 강준의 언론 노출에 대해 뭐라 할 입장은 아니었다. 대인해운의 선박 피랍사건 때 보여 준 강준의 활약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런 강준에 대한 호감은 곧 성원그룹 보험사에 대한 호감도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강준은 윤미경 감사가 자신을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여겼다. “박 과장, 들어갑시다.” “네, 구 회장님.” 강준은 구상옥 회장을 최진호 대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미 준비된 좌석에 앉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주주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대인해운 구상옥 회장이 가진 지분은 윤미경 감사와 최진태가 가진 지분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다들 최 대표님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거 같은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버티실 건가요?” 구상옥 회장이 대놓고 최진호 대표에게 의견을 물었다. “외람되지만 성원생명에서 제가 자리를 좀 더 지키고 싶습니다. 아버님도 그룹이 조각조각 나서 외국 자본에 팔리는 일을 보고 싶으시진 않으실 겁니다.” “최 회장은 좀 어떤가요? 아직도 의식을 못 찾으신 겁니까?” “……항암치료로 체력이 떨어지신 와중에 뇌출혈이 왔습니다. 의사들이 집중 치료를 하고 있으니 경과를 지켜보는 중입니다.” “제가 병문안하러 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은 힘드실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얼굴이라도 뵐 수 있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구상옥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투표함에 해임안에 대한 의결 표를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주주총회의 사회자 이희성 이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최진호 대표에 대한 해임안 표결 발표를 하겠습니다.” 장중의 이목이 모두 이희성 이사의 입에 쏠렸다. 최은정이 주먹을 꾹 쥔 채 강준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해임안 통과가 절대 안 될 겁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네요…… 혹시 몰라서요.” “뒤를 돌아보세요. 전부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저들도 최진태가 확실히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는 걸 눈치챈 거죠. 절대 단합하지 못할 겁니다.” 지루한 표결 개표작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집계 결과가 발표되었다. “여기 모이신 주주분들의 의결권 주식 수는 총 86만 주이며 그 가운데 41만 2천 3백 주의 의결권이 해임안에 찬성했으며 43만 5천 2백 주의 의결권이 해임안에 반대하였습니다. 나머지는 기권입니다. 이로써 현 성원생명 최진호 대표의 해임안은 부결합니다!” 땅! 땅! 땅! 이희성 이사는 의결 봉을 두드렸다. “잠시만요. 이견 있습니다!” 거수한 이는 윤미경 감사였다. “최창식 회장님이 보유한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고자 합니다.” 18.5%에 달하는 최대지분을 가진 최창식 회장이었다. “표결이 끝난 상황이라…….” “아직 주주총회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재중인 대주주의 의결권 행사에는 문제가 없는 거로 아는데요?” 이희성 이사는 무척 곤란한 표정이었다. “……의결권 행사를 위한 대리위임장은 가져오셨나요?” “물론이죠.” 윤미경으로부터 대리위임장을 건네받은 변호사는 이희성 이사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고심하는 이희성 이사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회자님! 잠깐 쉬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네, 해임안은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대리위임장에 대한 검증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시간 동안 정회하겠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구상옥 회장 덕분에 한 시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최진호 대표가 대리위임장을 확인했다. 그 위임장에는 분명 최창식 회장의 인감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최진호 대표의 해임안을 설명하는 위임장의 문구는 모두 타이핑된 것이었다. 즉, 대리위임장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밝혀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위조입니다!” “윤 감사님, 지금 아빠는 말씀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라고요! 무슨 이런 위임장에 동의했다는 거예요!” 최은정도 거칠게 항의했다. 하지만 윤미경 감사는 이희성 이사에게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이 이사님, 분명 대리위임장에는 회장님의 인감 날인이 되어 있죠. 법적으로 문제가 전혀 없는 서류고요.” “감사님…… 그래도 이런 중차대한 사안에 회장님의 의결권을 이런 식으로 행사한다는 건… 좀…….” “만약 대리위임장의 효력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면 그건 법적 소송을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려내면 되는 문제죠. 하지만 우선 해임안 가결이 받아들여지고 난 이후의 문제겠죠?” 윤미경 감사는 이희성 이사가 빠져나갈 구멍까지 마련해 준 셈이었다. “……대리위임장의 효력이….”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이희성 이사였다. 우선 대표가 공석인 상황들을 이용해 윤미경 감사 쪽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성원그룹의 이사회를 장악할 생각이었다. 대리위임장의 효력에 관한 법률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최진태를 그룹 총수로 하는 사전 작업은 끝나 있을 터였다. 이희성 이사는 본인 손에 그룹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자 이마에 진땀이 났다. “이희성 이사님, 지금까지 현명하게 그룹 일에 헌신해 오셨잖아요? 이번에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리라 믿어요.” 윤미경의 부드러운 압박이었다. 이희성 이사는 최은정의 옆에 앉은 강준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침에 강준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검찰에서 한승일 시장에 대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중간에라도 밝혀진다면 최진태 한국보험 대표가 성원그룹을 차지하는 일은 없겠죠.] [뭐야? 박 과장,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아! 개인적인 감정으로 최은정의 편을 들어주려고 그러는 거야?] [이희성 이사님께서 최진호 대표님께 힘이 되어 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개인적인 바람?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이 이사님, 절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전, 다만 제가 보험조사 업무 중에 알게 된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이희성 이사는 강준의 말대로라면 한승일 시장의 정치 가도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최진태를 떠받치는 뒷배경 중 하나가 무너진다는 의미였다. “최창식 회장의 의결권 행사는 대리위임장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 주주총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추후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통해 최진호 대표 해임요구안이 다시 상정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희성 이사의 의사진행 발언이 끝나자 주주들은 술렁였다. 최진태의 경영권 반란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격이었다. 윤미경 감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최진태 측의 인사들과 함께 주주총회장을 빠져나갔다. 반면 주주총회장에 남은 이희성 이사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최진호 대표를 향해 다가왔다. “최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성원생명을 잘 이끌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이사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이희성 이사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가 최진호 대표 쪽 사람으로 완전히 돌아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