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연예기획사 마약 사건 (4)2022.03.05.
군산항 국제여객터미널. 로아 엔터테인먼트의 길정훈은 덥수룩해진 수염을 한 채 낡은 차량을 부둣가에 주차했다. 그 차량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구한 대포 차였다. 길정훈은 핸드폰으로 차명학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님! 진짜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길 대표, 그냥 조사받아. 그게 다 같이 사는 길이야. 통화음 너머로 들리는 차 검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 중국 들어갑니다. 잠잠해지면 돌아오죠.” ―이렇게 막 나가면 안 되지! 길 대표! 어이…… 길 대표! 차 검사의 외침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은 길정훈은 컵홀더에 있던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윽! 시발! 내가 순순히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줄 줄 알아…?” 차 검사는 별장에서의 그날, 현장에서 김준혁이 찍은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칩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그대로 빼앗길 강준이 아니었다. 메모리칩의 복사본이 강준의 서랍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언젠가 차 검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 사용할 무기가 되어줄 터였다. 차 검사도 비밀 별장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에 부담을 느꼈는지 길정훈을 버렸다. 더 정확히는 길정훈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준이 소속 연예인들에게 마약 복용을 사주한 보험사기를 제기하면서 로아 엔터테인먼트를 둘러싼 새로운 국면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의 보도도 애초의 배다인의 마약 사건으로부터 길정훈 대표의 계획적인 보험사기로 옮겨 갔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해리츠 보험에서는 로아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강준이 타사인 해리츠 보험에 길정훈에 대한 보험사기 혐의자료를 넘긴 덕분이었다. “하… 시발! 다들 진짜 안 도와주네……!” 길정훈은 주머니에 있는 표를 꺼냈다. 한 시간 후에 군산에서 중국 스다오(石岛)로 가는 배편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소주병을 들이켰다. 그는 한때는 자신의 방패막이였던 차 검사에게 진한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차 검사의 비리를 까발리기엔 현직 검사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꼴이었다. 최악의 순간엔 형량으로 협상해야 하는 처지의 길정훈으로서는 마지막 카드를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 일단…… 넘어가자! 숨죽이고 있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거다…….” 길정훈은 체념한 심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다른 전화번호를 눌렀다. 왕총 대표와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조선족 서광걸의 중국 번호였다. “서 실장, 나 길정훈입니다. 저 지금 중국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일 왕총 대표하고 약속 좀…… 네? 뭐라고요?” 핸드폰을 손에 쥔 길정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길 사장, 우리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한국 뉴스 다 챙겨보고 있는데 길 사장이야말로 나한테 뭐 할 말 없소? “그거야…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사소한 문제라니까…… 나, 길정훈이야! 대한민국 검찰이 내 손에 있다고!” 흥분한 길정훈의 반응에 통화음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길 사장…… 나 무시하지 말라! 나도 한국 사정에 대해서 알 만한 것들은 다 알고 있소. 이만 전화 끊겠소! “야…… 서광걸! 너 나한테 뭐라 그랬어? 왕 대표 설득해서 투자금 받아 낼 수 있다고 했잖아!” ―그건 그때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않소? “서 실장! 우리가 어떤 사이야!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같이 대박 칠 수 있다니까!” ―맨날 그 대박이라는 얘기 지겹지도 않소?… 남조선 새끼들은 배때기에 허세가 가득 들어서……. 비아냥대는 서광걸의 말을 들은 길정훈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뭐야? 이 새끼야! 내가 너한테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시발새끼야!” ―에헤…… 길 사장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소? 이만 전화 끊겠소! 진짜 끊소! 서광걸을 제쳐두고 왕총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길정훈은 그제야 통역이자 브로커였던 서광걸만 믿고 일을 진행한 것이 후회됐다. “……시발새끼! 내가 너 아니면 안 되는 줄 알아!” 길정훈은 지갑에서 왕총에게 받았던 명함을 찾아 꺼냈다. 그곳에는 상하이 푸동 지구로 되어 있는 주소지의 사무실이 적혀 있었다. “그래!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왕총이랑 붙어서 투자를 받아낼 거다! 뱀 같은 새끼…… 처음부터 끼워 주는 게 아니었는데…… 제길!” 길정훈은 트렁크 가방을 하나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군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앞은 여전히 한산했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날씨까지 지랄맞네…… 쯧!” 드르륵! 드르륵!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트렁크 가방의 바퀴가 덜컹거렸다. “어이! 길정훈 대표!” 그가 뒤를 돌아보자 비를 맞고 서 있는 남자가 길정훈을 보고 씩 웃었다. 그는 보험조사관 박강준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광역수사대 마약반의 형사들이 함께 서 있었다. “성원화재에서 보험사기로 당신을 고발했습니다. 물론 여기 경찰분들은 마약 사범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지만요…….” 형사들이 길정훈에게 다가가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비는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시발… 다들 진짜 안 도와주네……! 지겹다 시발!” 왕총을 통해 회사를 팔아 보려고 했던 길정훈의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차 검사 전화라도 하시려고? 꺼냈으면 해 봐요.” 강준은 형사들에게 손을 들어 잠시 기다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울렸지만, 차명학 검사는 길정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길정훈의 얼굴에서는 눈물인지 모를 빗물들이 흘러내렸다. “형사님들… 갑시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길정훈은 모든 걸 포기한 듯 고개를 떨궜다. * * * 길림성 출신의 서광걸은 애초부터 왕총이 로아 엔터테인먼트에 투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광걸은 길정훈 대표와의 투자 협상을 중간에서 개입하면서 왕총이 원하는 게 뭔지를 정확하게 간파해 냈다. 왕총은 한국 회사를 인수해 글로벌 연예기획사로 키우는 데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한국 엔터 산업계가 가진 노하우일 뿐이었다. 그걸 어떻게 빼 오는지가 관건일 뿐이었다. 투자든 인력수입이든 그도 아니면 콘텐츠 베끼기건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왕총은 투자라는 명목을 빌미로 한국 엔터테인먼트사들에 접근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상이몽! 검찰 수사로 불거진 길정훈의 마약과 보험사기 파동이 아니었더라도 왕총은 애초부터 로아 엔터테인먼트에 투자금을 넣을 생각이 없었다. “왕 대표님, 오늘 미팅하시기로 한 곳은 드라마 외주 제작사입니다.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들까지 있어서 콘텐츠 공급사로 역량이 단단한 곳입니다.” “그래요? 한번 가봅시다. 난 이런 미팅 참 좋아합니다.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거든요.” “그렇죠. 한국 사람들이 순발력 하나는 대단하니까요.” 왕총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서 실장이 일을 참 잘하는 거 같네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니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래요. 솔직히 길정훈 대표가 하는 일들…… 서 실장도 할 수 있지 않아요?” 왕총의 맞은편에 앉은 서광걸의 광대가 올라가며 미소를 보였다. “왕 대표님이 한국에 지사를 만드시면 제가 역할을 해 보겠습니다!” “네, 암 그래야지요.” 왕총은 두루뭉술하게 긍정의 답을 했다. 서광걸이 원하는 건 자신이 역할을 계속 해먹을 수 있는 왕총의 한국지사장이었다. “일단 일어납시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회사들과 미팅하려니 기운이 솟네요!” 왕총은 일어나면서 테이크아웃 잔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30대 초반의 젊은 왕총은 공산당 간부인 아버지의 회사로부터 엄청난 돈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상하이에서 시작하는 그의 첫 사업인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회사의 돈으로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서광걸은 왕총을 데리고 청담동의 한 빌딩 앞에 도착했다. 로아 엔터테인먼트가 있던 빌딩보다 훨씬 초라하고 작은 5층짜리 빌딩이었다. 그곳에는 남궁진이 운영하는 JIN필름의 사무실이 있었다. 서광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데스크에서 JIN필름의 대표인 남궁진을 찾았다. “잠시 앉아 계시면 나올 겁니다.” “아! 이분은 커피 안 드시니까 차로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그러죠.” 잠시 후, 미팅실로 들어온 남궁진은 한때 한국 영화계의 중흥을 이끌었던 감독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남궁진입니다.” “왕총입니다. 상하이에서 엔터테인먼트사를 준비하고 있죠. 저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근데 제가 사전에 듣기로는 저희 JIN필름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남궁진은 통역인 서광걸을 보며 말했다. “네, 왕총 대표님이 한국의 콘텐츠들을 중국 TV방송국에 독점으로 판매하고자 하십니다.” “음…… 저희가 준비 중인 작품들이 있긴 한데 그럼 그 작품에 대한 판권을 구매하시고 싶다는 생각이신가요?” 왕총은 서광걸에게 질문받고는 시원스럽게 답했다. “차후에 판권 구매까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JIN필름에서 제작되는 드라마의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습니다. 중국 시장은 한국과는 다른 점이 있어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좀 있으니까요…….” 한참의 통역을 듣던 남궁진이 관자놀이를 한 번 어루만지고는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희도 중국 시장이 크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저희는 중국 시장을 위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하! 물론 그렇겠죠. 저도 한국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한 콘텐츠를 중국 시장에 내놓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구체적인 투자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희가 왕총 대표님께 제작과정을 공개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건 다른 어떤 투자자가 와도 마찬가지겠죠.” 서광걸은 남궁진의 말을 듣고는 곤란한 듯 짧게 통역했다. “죄송하지만…… 서 실장님, 제 얘기를 정확히 통역해 주시겠습니까?” “원래 중국말은 함축적인 게 많습니다. 그래서 짧게 전달했습니다.” 서광걸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는 왕총에게 JIN필름에서는 중국 시장에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통역했다. 하지만 왕총은 그 말을 듣고는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투자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초기 투자금으로 20억 어떻습니까?” 서광걸은 놀라지도 않았다. 왜냐면 왕총이 그런 공수표를 던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통역을 듣고 난 남궁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송구스럽지만 저희 JIN필름은 이미 투자를 받은 상태입니다. 전 판권 구매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해서 미팅에 응했던 것뿐이고요.” “투자를 받았다고요? 혹시 어떤 분께 투자를 받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통역하던 서광걸이 눈빛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대인해운의 구민철 과장입니다. 개인주주 자격으로 투자하셨죠.” 그 말에 표정이 굳어지는 서광걸이었다. “참! 구민철 과장이 왕총 대표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더군요. 로아 엔터테인먼트에도 투자하시려다 철회하셨다고요?” “그…… 그건 로아 쪽에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제가 들은 얘기는 좀 다른데요?” “…무슨 얘기를 들으셨길래……?” “투자를 빌미로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하시더군요. 저희 JIN필름은 그런 왕총 대표의 행보에 함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남궁진은 정중히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그만 일어나라는 메시지였다. 왕총도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속셈이 들켰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서 실장님, 이만 갑시다.” “네, 왕 대표님. 한국에 연예기획사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서광걸은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안면을 싹 바꾸고는 무례한 태도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걸 지켜본 JIN필름의 남궁진은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 좀 있다고 저렇게 오만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