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연예기획사 마약 사건 (1)2022.03.02.
세련된 외모에 명품 시계를 찬 남자가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구민철과 함께 강준에게로 다가왔다. “로아 엔터테인먼트 길정훈입니다.” “성원화재 박강준입니다.” 간단한 악수와 함께 인사를 나눈 둘이었지만, 공기는 이내 냉랭해졌다. 강준의 옆에 있던 최은정 때문이었다. 둘은 최은정이 스무 살이 조금 넘었을 적 사귀었던 사이였다. 길정훈이 최은정을 알아보고 태연한 척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은정아, 너 여전하네. 얼굴 좋아 보인다?” 탐탁지 않은 시선의 최은정이 그가 건넨 명함을 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야? 엔터사 대표? 하긴 오빠는 예전부터 말은 그럴듯하게 했잖아. 어울리네……. 엔터테인먼트 회사.” 최은정의 대답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둘의 관계를 더 묻고 싶은 강준이었지만 말을 삼켰다. 반면 영문을 모르는 구민철은 어색함을 지우듯 말을 꺼냈다. “두 분 서로 아시는 사이이신가 봐요?” “네, 같은 고등학교 동문이에요.” 냉랭하게 답하는 최은정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여배우 배다인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다들 여기 모여 계셨네요.” “박 과장님, 전에 말씀드린 제 여자친구인 배다인이에요. 다인아 인사드려! 필리핀에서 오빠랑 같이 사건 맡으셨던 박강준 과장님.” 배다인은 화면에서 보던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강준에게 인사했다. “실종 선박을 직접 수색하셨다는 그 박강준 씨? 이렇게 직접 뵙게 되네요.” 강준은 그녀의 기억을 읽을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생각했다. 강준은 손을 불쑥 내밀고는 허리를 굽혔다. “박강준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다소 민망한 상황이었다. 최은정이 상황을 수습하듯 살짝 타박하듯 말했다. “박 과장님, 숙녀분에게 손을 내미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은데요?” 하지만 그녀의 몸에 접촉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강준은 묵묵부답으로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상대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었다. 침묵을 깬 건 배다인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영광인걸요.” 그녀가 강준이 내민 손을 살짝 잡았을 때, 그녀의 기억이 강준에게 읽혔다. [이번에는 두 장은 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 정도 양 구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게다가 지난번 아이스보다 이건 더 화끈한 거고요! 헤헤…….] [너 자꾸 말이 바뀐다…… 너 말고도 약 구할 데는 많아. 알지?] [에이…… 누님! 그래도 제가 제일 안전하지 않습니까? 보험이라고 생각하시고 좀 챙겨주시죠?]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는 한때, 양태식의 보험사기에 가담했던 박종길이었다. 강준은 박종길이 한때 최기동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최기동이 나진패션으로 돌아간 이후에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박종길이 마약의 말단 판매상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배다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저희 소속사 대표님이 달변가이긴 하시죠. 저도 거기에 넘어와서 계약한 거고요.” 기억에서 돌아온 강준 앞에 배다인은 사람들을 휘어잡으며 대화를 끌어가고 있었다. 길정훈 대표와 배다인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만큼 친분이 있다는 걸 남들에게 과시하는 듯 보였다. “길 대표님, 연예기획사는 소속 연예인들의 사생활 관리가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마약 같은 사건에 연루되면 치명적이라고 하던데…….” 강준의 말에 길정훈은 흠칫 놀란 듯했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마약 사건은 꼭 한 번씩 터지는 연예계 이슈죠. 검찰에서도 이미 연예인 마약 사범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으니까요.” “길 대표님의 로아 엔터테인먼트에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없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하하! 박강준 씨는 마치 저희 소속사 연예인 중에 마약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투로 들립니다.” 대화의 분위기는 다시 경직됐다. “우리 그러지 말고 식사나 같이하시죠. 제가 근처에 식당을 예약해 뒀습니다.” 화제를 돌리는 구민철이었다. 그는 어색해진 상황 때문이었는지 오히려 본인이 투자해 주려는 길정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박 과장님 이분들과 같이 식사하시고 오세요. 전 밀린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최은정 팀장은 옛 연인인 길정훈이 있는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저도 함께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길 대표님 제가 실례를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박강준 씨 명성은 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으니까요.” 길정훈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구 과장님,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참! 그리고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배다인에게 여운을 남기는 강준의 인사였다. 배다인은 그런 강준에게 싱긋 웃으며 화답했고, 구민철은 입구까지 강준과 최은정을 배웅했다. “박 과장님, 오늘따라 좀 날카로워 보이시던데요?” “구 과장님, 제가 실례되는 말을 꺼내서 불편하셨죠?”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씀을? 근데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어떤 거 같아요? 로아 엔터테인먼트 길 대표요?” “이미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닙니까?” 구민철은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하하! 아직 투자금 완전히 안 넣었습니다. 하하! 저도 은근 조심성이 있는 타입이라…….” “초도 투자금은 넣으셨다는 얘기네요? 얼마나 넣으셨나요?” “음…… 역시 박 과장님은 못 속이겠네요. 중국 쪽 지사를 확장한다며 자금이 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5억 원은 먼저 투자를 한 상태입니다.” 옆에 있던 최은정이 흥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길정훈 저 인간 말은 한 번 걸러서 들어야 해요. 예전하고 변하지 않았다면요…….” “전에 안 좋게 헤어지셨나 봅니다.” “좋게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나요? 근데 제 말은 길정훈이라는 인간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원래 언변이 좋은 사람은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나는 법이니까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구민철이었다. “지금 최은정 팀장님의 말을 들으니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게 있네요…….” “그게 뭐죠? 제가 누구보다 길정훈 저 인간을 잘 알고 있으니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세요. 그 인간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확인해드릴 테니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구민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저와 함께 로아 엔터테인먼트를 글로벌 회사로 키워 보자는 얘기를 하더군요. 최근에 한류 바람도 있고 해서…… 전 나름 괜찮은 생각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요?” “근데 최근에 중국 투자자가 생겼다며 얘기하더라고요. 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니 왕총이라는 젊은 사업가가 자기 회사에 투자의사를 밝혔다는 거예요.” 왕총은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연예기획사를 들썩들썩하게 했던 중국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장본인이었다. “그건…… 길정훈 저 인간이 양다리를 걸치려는 거네요.” 입술을 잘근 깨문 최은정이 확신한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는 발언이었지만, 강준은 그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구 과장님은 그 문제에 대해 길 대표님과 깊게 얘기를 나눠 보셨는지요?” “네…… 제 생각은 좀 다르지만, 중국 쪽에서 투자 의향을 보였다는 건 호재라면서 로아 엔터테인먼트를 몇 년 키워서 왕총에게 매각하자고 하더라고요.” “그게 투자관점에서 좋은 거라고 설득했겠죠?” 강준의 말에 구민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5억 원의 돈을 투입한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을 터였다. “구민철 과장님, 혹시 이번 일에 여자친구분도 끼어 있는 겁니까?” 선뜻 답하지 못하는 구민철이었다. 강준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배다인 씨는 길 대표에게 뭔가 약점을 잡힌 건지도 모릅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 마약 얘기…… 혹시 뭔가 알고 말씀하신 겁니까?” 표정이 굳는 구민철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난번에 배다인 씨와 사귄다는 얘기를 듣고 조사해 본 바가 있습니다. 물론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요. 그 전에 당사자인 구 과장님께서 한번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러죠.” 어깨에 힘없이 축 처진 구민철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최은정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박 과장님, 이번에도 뭐 냄새 맡으신 거 있으신 거예요?” “네, 맡았습니다. 근데 아시잖습니까? 전 항상 감으로 접근한다는 거.” 최은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강준을 흘겨봤다. “진짜 여전하네요! 여전해!” “팀장님, 우리 이번 기회에 연예기획사와 관련된 보험상품들 한번 조사해 보죠.” “상해보험 같은 거 말이에요? 연예인들은 몸이 재산이니 얼굴이나 다리 같은 신체 부위에 보험을 들어 놓는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아…… 그런 거 말고 엔터테인먼트 회사 쪽에서 손해를 입었을 때 보상을 받는 보험 같은 건 없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최은정은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쪽은 아니지만 해리츠 보험에서 엔터사들을 대상으로 기업보험을 파는 거로 알고 있어요. 원래는 공연이나 영화 제작을 할 때 위험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상품인데 최근에는 배우들에 관한 위험까지 포괄하는 상품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팀장님, 이번 사건 아무래도 로아 엔터테인먼트의 보험사기가 의심됩니다.” 강준의 말에 최은정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도 길정훈이 양아치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근거도 없이 보험사기를 의심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아까 길정훈 대표 말입니다…… 회사 재정이 많이 엉망입니다. 로아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광역수사대 경제과에 있는 이진철 경감에게 부탁한 게 좀 있었거든요.” “아… 역시 사람은 안 바뀐다니까…….” 최은정은 옛날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길정훈 대표가 전에도 비슷했었나요?” “저한테도 사업에 필요하다며 돈을 빌려 갔었죠. 전 그때 대학생밖에 안 됐었는데…… 그때까지 모은 제 돈을 몽땅 갖다 바쳤죠.” “……결과는요?” “뻔하지 않겠어요? 매번 말이 달라지더니…… 결국엔 자기도 힘들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돈은…… 결국 받았나요?” “돈이 있어야 돌려받죠. 인생 수업했다 치고 눈 딱 감고 헤어졌어요.” 씁쓸한 표정을 짓는 최은정이었다. 강준은 거기서 뭘 더 물어볼 수 없었다. “팀장님, 전 여기서 이진철 경감한테 갔다가 사무실로 복귀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전 준혁 씨한테 해리츠 보험에서 판매하는 기업보험에 대해 좀 더 알아볼게요. 그리고…… 길정훈 그 인간 주변도 물어봐야겠네요.” “팀장님, 혹시 부담스러우시면…… 이번 일은 제게 맡겨 두셔도 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그 인간을 제일 잘 아는 건 저니까요. 오늘 만난 배다인 씨도 저 같은 피해자가 되게 해서는 안 되겠죠.” 단호하게 말하는 최은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배다인이 단순 마약 복용자일 뿐인지 아니면 길정훈의 적극적인 협력자인지는 강준도 확인해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