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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대인해운 (91/250)

091. 대인해운2022.03.01.

대인해운 광화문 본사. 강준은 구민철과 함께 구상옥 회장이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구민철이 못 참겠다는 듯이 강준에게 물었다. “근데, 제가 회장 아들이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보험조사관 업무를 하려면 나름의 정보망을 가동하죠. 구 과장님이 구상옥 회장님의 아드님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요.” 태연하게 말하는 강준에게 구민철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더는 세상에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회장실에는 노련한 눈매가 돋보이는 하얀 머리의 노인이 강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자네가 우리 민철이를 많이 도와줬다고?” “보험사 직원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자기 돈을 들여서 실종 선박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하하!” 구상옥 회장은 강준을 맞은편의 소파에 앉혔다. 그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건 검소하지만 날카로운 최창식 회장과는 상반되는 구석이었다. “보험조사관 일은 좀 어떤가? 할 만한가?” “원칙적으로 보험금 지급을 줄여야 하는 게 일이라 고민이 될 때가 좀 있습니다.” “왜? 부당한 보험금 지급은 전체 보험계약자들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잖나?” 강준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때로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순간들이 더 많습니다. 보험계약자들은 원래 위험에 대비하려고 보험을 들었을 테니까요…….”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써 대는 보험업계의 관행을 에둘러 비판한 강준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준을 보며 구 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한때는 보험업계에 뛰어들려고 했었지. 물론 자네가 다니는 성원화재의 최창식 회장에게 밀려서 결국엔 그만뒀지만 말이야.” 애석하다는 표정을 짓는 구 회장이었지만, 속마음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저희 성원그룹 사정은 들어 아실 거로 생각하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최창식 회장님이 최근에 건강이 무척 안 좋으십니다. 그래서 물러나시려고 하는데 차후 경영권을 두고 잡음이 좀 있습니다.” “최진태 대표가 한국보험 대표에 오르면서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지?” 구상옥은 이미 강준이 최진호, 최은정 남매의 편에 서 있다는 걸 알고는 그런 질문을 던져 본 거였다. “보험사업은 수많은 보험계약자와의 약속입니다. 단기간에 수익이나 실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준의 말에 구 회장은 아들을 돌아봤다. “민철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최근에 보험업계의 인수합병이 활발히 논의되더라고요. 최진태 이사는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방점을 둔 거겠죠.” “그래서? 네가 볼 때는 지금 한국보험의 가치가 올라간 거 같냐?” “그건……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구상옥 회장의 표정은 아들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박 과장, 난 말이야. 인수합병이니 그런 것들이 딱히 와닿지 않아. 돈이 된다고 다 팔아 버리면 뭐가 남겠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혹시 최진태 이사 측에서 회장님을 찾아왔었습니까?” 구상옥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최진태가 찾아온 걸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 찾아와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하더군. 성원그룹의 보험사업을 손에 넣게 되면 한국보험과 묶어서 M&A시장에 내놓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주가를 두 배도 더 띄울 수 있다더군.” 대인해운이 가진 성원생명과 성원화재의 지분이면 수천억 원의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구상옥 회장은 단지 돈이 사업의 모든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 말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보험사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크니까요.” “근데 그거 아나? 최진태 대표가 팔아넘기려는 곳이 중국계 보험회사란 말이야…… 난 그게 좀 걸려. 우리가 중국 보험업계에 대해 알면 뭘 아나? 그리고 보험은 책임을 동반하는 사업이야. 근데, 그들이 그런 책임감을 한국 보험사를 인수하면서 가질까?” 강준은 회귀 전 중국계 보험회사가 국내 보험회사를 인수한 사례들을 떠올렸다. 중국의 국영기업이나 다름없는 중국 자본의 침투는 훗날 꽤 논쟁거리가 된다. 강준은 한 차례 뜸을 들인 후 답했다. “아마 그렇게 되면 계속된 손바뀜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보험사의 경영은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겠죠. 물론 그게 경영방침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요.” “……지금 성원생명을 맡고 있는 최진호 대표도 자네와 비슷한 생각인가?” “최 대표님은 보험사업을 절대 팔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보험업을 단지 사업으로만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사업가가 돈 말고 뭘 더 생각한다는 말인가?” 구상옥은 강준에게 되물었다. “보험계약자들을 위한 신뢰를 만드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더 이익일 수 있습니다. 보험을 계약하려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자꾸만 주인이 바뀌는 보험사 상품을 계약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긴 그렇지! 보험사의 이익이 꼭 고객들 자기 이익은 아니거든.” 이제 강준이 본론을 꺼내야 할 때였다. “구 회장님, 만약에 최창식 회장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최진태 대표가 성원생명의 주주총회를 소집할 겁니다.” “……그렇겠지. 야심이 있을 테니.” “그리고 아마 최진호 대표의 불신임안을 제출할 겁니다. 몇몇 주주들과는 이미 입이 맞춰져 있을 거고요.” “최진태의 모친이 꽤 영업을 잘했더군…… 표 대결에서 과반 넘기는 건 기정사실이야.” “하지만 구상옥 회장님께서 최진호 대표 쪽에 서 주신다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대놓고 자신을 지목하자 구상옥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자네, 우리 대인해운에서 일하는 거 어떤가?” “월급쟁이는 성원화재에서 하는 거로 충분합니다.” “임원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 않지 않나?” 임원으로의 스카웃 제의였다. 강준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아직 성원그룹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전 당분간은 성원그룹에 남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여지도 남겨 두는 강준이었다. 그래야 결정적인 시점까지 대인해운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남겨 둘 수 있을 터였다. “최진호 대표가 부럽구먼, 자네 같은 참모가 있어서 말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회장님.” 구상옥 회장은 확답을 주진 않았지만, 대인해운의 지분을 최진호, 최은정 남매 쪽으로 가져온 건 분명해 보였다. “아버지, 갑자기 그러시니까 박 과장님이 당황해하시네요. 물론 저도 박 과장님이 탐나긴 하지만요. 하하!” “민철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는 그 엔터 사업이라는 거…… 그거 꼭 해야 하냐? 박 과장이 왔으니 여기서 같이 얘기나 좀 해 봐라.” 구민철 과장은 갑자기 화제가 자신에게로 쏠리자 곤란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구 과장님, 엔터 사업에도 진출하십니까?” “에이, 박 과장님, 아니에요. 그냥 관심만 좀 있을 뿐이거든요.” 구민철의 말에 구상옥 회장이 끼어들었다. “관심만 있긴! 여자한테 홀딱 빠져서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 투자한다며 설레발을 치지 않았냐?” “구 과장님이 빠졌다는 그 여자가 누굽니까?” 부끄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인 구민철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사귄 여자친구가 사실은 여배우거든요….” “여배우요? 연예인인가 보네요?” “네. 박 과장님 혹시 배다인이라고 아세요? 최근에 드라마도 찍고 했었는데!” 구민철의 대답에 강준은 깜짝 놀랐다. 강준은 물론 배다인이라는 여배우를 기억하고 있었다. 청순한 이미지로 주목받았지만 이내 마약 사건에 휘말려 반강제로 은퇴하게 되는 배다인으로 말이었다. “구 과장님 혹시 만난 지 오래되셨습니까?” 강준은 웃음기를 뺀 채 물었다.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3개월 정도 됐네요…….” “혹시 투자하시려는 회사가 로아 엔터테인먼트인가요?” “아 그걸 어떻게? 실은 다인이를 만난 것도 로아 엔터의 길 대표와 투자를 진행하다가 소개를 받은 겁니다.” 강준은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배다인은 구 과장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구상옥 회장의 눈에는 훤히 보였었다. “박 과장, 자네가 볼 때는 어때? 그 로아 엔터테인먼트인가 하는 회사 말이야.” “글쎄요……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요. 하지만 소속 연예인에 따라서 많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그만큼 리스크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나도 그리 생각하네. 민철아, 이러면 어떠냐? 박 과장이 그래도 보험조사관이라 날카로운 구석이 있으니 그 길 대표라는 사람하고 한번 같이 만나 보는 게?” 구민철이 난감한 듯 구 회장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도 속마음 깊은 곳에서는 배다인이 정말 괜찮은 여자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박 과장님, 실은 대인해운에서 허찬 경사와 함께 공로패를 전달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때 조촐한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그때 오시죠. 제 여자친구와 길 대표도 함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공로패를 주신다면 마다하지 않고 받겠습니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분들과 함께 자리하는 것도 좋습니다.” 넉살 좋게 구민철의 제안을 받은 강준이었다. ‘배다인…… 그녀가 정말 마약을 하고 있다면 로아 엔터테인먼트에 큰 문제가 있는 거다. 다른 소속 연예인들도 함께 마약을 한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하고….’ 강준은 회귀 전 경찰로서의 본능적인 감각이 다시 솟아나는 듯했다. * * * 며칠 후 대인해운 본사. 강준은 최은정 팀장과 함께 공로패를 받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들의 옆에는 이진철 경감과 필리핀 선박 피랍사건에 파견됐던 허찬 경사도 참석해 있었다. “본 공로패는 대인해운의 선박과 승무원을 희생적인 정신으로 구출한 공로로 대한민국 경찰 광역수사대의 허찬 경사에게 본 공로패를 전달합니다!” 짝짝짝! 짝짝짝! 단상에 올라간 허찬 경사는 경찰 정복을 입은 채 사진 촬영에 임했다. 어색하지만 활짝 웃는 허 경사였다. “다음은 강준 씨 차례네요.” “얼른 받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저기 저분들 좀 보고 계시죠. 로아 엔터테인먼트의 배다인 배우입니다.” “……잠깐! 저기 저 남자는 누구죠?” “배다인 바로 옆이 로아 엔터테인먼트 길 대표입니다. 구 과장에게 투자를 받으려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어느새 최은정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 있었다. “왜요? 팀장님이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로아 대표가 길정훈 저 인간이었다니… 참나…….”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최은정이었다. 강준은 뭔가를 더 물으려 했지만, 단상에서는 강준의 이름이 불렸다. “성원화재 박강준 과장님! 단상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모두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짝짝짝! 최은정 팀장도 함께 손뼉을 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길은 로아 엔터테인먼트 길정훈 대표에게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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