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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선박 피랍사건 (3) (89/250)

089. 선박 피랍사건 (3)2022.02.27.

린팡의 아지트. 화물선의 선장 김갑수는 두 눈이 가려진 채 의자에 포박당해 있었다. 부하들에 의해 온몸을 두들겨 맞은 김갑수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엄연히 우리 한국 쪽 피의자입니다. 근데 이렇게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다니요!” 허찬 경사는 불같은 화를 냈다. 하지만 린팡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우린 박강준 씨가 도움을 요청해서 그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신의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는 거죠!” 강준은 교도소에 있는 김우진으로부터 흑룡회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었다. 전대성이 홍콩에서 투자받았던 자금에 흑룡회가 관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흑룡회의 간부인 린팡은 한국의 사법권 따위는 본인들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했다. 강준은 일단 김갑수에게 다가가 눈을 가린 두건을 풀어주고는 그의 동공을 살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구타당했는지를 읽어 냈다. “린팡,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려도 될 것 같군요.” “……그렇게 하시죠. 하지만 당장 신병을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린팡은 김갑수를 통해 아부 사야프에 붙어 있는 마약 기술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린팡이 나가고 나자 허찬이 김갑수의 뒤로 묶인 손을 풀어냈다. “이봐요! 김갑수 씨! 정신 차려요!” “아흐흑…… 당신들 누구요? 한국 사람이면 나 좀 도와주쇼! 나보고…… 자꾸 마약상이라는데, 난 그냥 배 모는 선장이라니까!”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당신들 진짜 뭐 하는 사람들인데…… 으흑! 나 좀 여기서 빼내 줘요.” 강준이 의자를 끌어 그의 앞에 앉았다. “전 성원화재의 보험조사관 박강준입니다. 당신이 선장으로 있는 대인해운 화물선의 사고보험사이기도 하고요.” 김갑수는 무슨 영문인지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보험사에서 저를 구하려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네, 당신을 비롯해 사라진 화물선과 선원들을 찾으려고 여기 있는 허찬 경사와 공조해서 이곳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강준은 벌써 김갑수의 기억을 읽은 상태였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화물선에 선원들을 버려둔 채 배필립이 마련한 호텔로 혼자 빠져나갔었다. “그…… 그럼…… 아까 그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요?” “중국계 마약상들이고 당신이 만난 배필립과는 경쟁 관계죠.” “……네? 누구요……?” 김갑수는 배필립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꾹 닫았다. 옆에 있던 허찬 경사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박 과장님 말씀이 맞았나 보네요. 배필립 이름이 나오자마자 입을 딱 닫는 거 보니까요…….” “아무리 갑작스러운 납치를 당했다고 해도 아무런 구조신호를 보내지 않은 게 이상했거든요. 게다가 화물선 자체가 뽕하고 사라진 건…… 선장의 적극적인 협력이 없으면 힘든 일이기도 하죠.” 선박을 납치하는 데 있어서 해적들이 난항을 겪는 것이 바로 배를 조종하는 조타실을 점령하는 것이다. 갑판 위에 올라서게 되면 일제히 선원들은 선교의 조타실부터 보호하게 된다. 구조신호도 보내지 못할 만큼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건 내부에 호응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거였다. 그리고 바로 그 화물선의 선장 김갑수가 고급호텔에서 발견됐다는 점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거였다. 허찬 경사가 심문을 이어갔다. “김 선장님, 이번에는 제가 물을게요. 사라진 선원들과 화물선 어디 있습니까?” “…….”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외면하는 김갑수였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허찬 경사는 재차 물었다. “김 선장님, 배필립하고 공모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아셨을지 모르시겠지만, 배필립 지금 한국에 마약 유통하고 있어요. 여기 이슬람 반군단체랑 연계해서요. 이거 마약법 위반에 반국가 테러 행위면…… 족히 30년은 감방에서 사실 수도 있는데요?” 30년이라는 말에 부어 있는 눈을 번쩍 뜨는 김갑수였다. 그는 자신이 선박 납치의 자작극을 벌였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얼마나 형을 받는지를 계산하는 눈치였다. “근데 제가 보니까 김 선장님은 거기까지는 관여를 안 하신 거 같으다. 그쵸?” 강온전략을 쓰는 허찬 경사였다. 강준은 회귀 전 자신이 심문했던 수법이 여전히 쓰이는 걸 보며 혼자 피식 웃었다. “난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그냥 시키니까 한 일이라고요! 그러니까 호텔 방에도 감금되어 있었던 거고요!” 죄를 배필립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가려는 김갑수였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허 경사는 유도 심문을 계속했다. “아…… 김 선장님은 모른다? 화물선이 어디 있는지도 선원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이겁니까?” “모르죠…… 근데……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한데…….” “그렇죠! 짐작 가시는 곳이 있으시겠죠! 거기가 어딘데요?” “인도네시아 센바쿵(Senbakung) 지역에서 내가 내렸으니까…… 아마 그 근처에 있겠지요……?” 강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여 김갑수에게 건넸다. “김갑수 선장님! 우린 배필립을 꼭 잡아야 하거든요. 근데 그놈이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여긴 한국 경찰이 필리핀 경찰과 공조해서 힘을 쓸 만한 곳도 아니고요.” 담배를 받아든 김갑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슬슬 입을 열었다. “……민다나오 쪽은 원래 이슬람 반군 세력 근거지죠…….” “그래서 우리 계획은 여기 중국계 마약 조직 흑룡회와 이슬람 반군 세력과 싸우게 하는 겁니다. 우린 그사이에 배필립을 검거하고 화물선이랑 선원들도 구출해내는 거죠.” 김갑수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허찬 경사가 그런 김갑수의 속내를 뻔히 안다는 듯 마지막 확인사살을 가했다. “김 선장 당신 지금 피의자 신분이에요. 협조 안 하면 당신은 적극적인 주범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한테 협조해서 선원이랑 선박 구출을 도우면 정상을 참작해 종범으로 처리될 거고요. 형량 차이는 아마 어마어마할걸요?” “아흐흐…… 난 진짜 강압적으로 시켜서 한 거라니까!” “잘됐네. 그럼 이제 당신 선원들 구하러 갑시다. 설마 선장이 돼서 선원들 내버려 두고 도망치진 않겠죠?” 달리 거절할 명분이 없는 김갑수였다. 거액을 입금하겠다는 배필립의 약속은 일부만 이행됐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잔금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그였다. 김갑수는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배필립을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그는 자신이 경찰에 붙잡혔을 때 변명할 수 있는 쪽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선생님들…… 일단 절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시면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하죠…… 아이고 아파라…….” 앓는 소리를 하며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는 김갑수였다. 그런 그를 보며 강준은 허찬 경사에게 눈짓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대인해운 본사. 구상옥 회장은 임원들을 모아놓고 필리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종된 선원은 선장을 포함해 총 20인. 1인당 몸값은 100만 달러로 화물선을 납치한 아부 사야프에서는 총 2,000만 달러를 대인해운 측에 요구해왔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외화로 준비해놔.” “그래도 정부 입장을 좀 더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해군에서 직접 구출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출 작전을 하려고 해도 선박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목소리를 높이는 구상옥 회장에게 임원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거고…… 돈은 준비해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놔야지. 돈이야 이럴 때 쓰려고 벌어놓은 거 아니겠어?” 구상옥 회장은 지난날들을 돌이켜봤다. 선박 몇 척을 인수해 사업을 일으키던 때가 자신의 전성기였다. 한때 보험사 인수전에 뛰어들었었지만 포기하고 그간 해운업에 집중해왔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회장님, 구 과장 전화입니다!” “그래, 김 전무! 당장 받아 봐!” 모두의 시선이 김 전무에게 쏠렸고, 전화를 받고 있던 김 전무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직감적으로 구상옥 회장은 희소식임을 알아챘다. “회장님! 구 과장이 해냈습니다! 사라졌던 화물선이 어디 있는지 찾았답니다!” “그래? 당장 해군 쪽에 연락해! 우리가 위치까지 찾아줬으면 자기네들도 뭔가를 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구상옥과 둘러앉은 임원들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회장님, 아드님이 이번에 큰일을 해냈습니다!” 창업 때부터 구 회장의 곁을 지켜온 김 전무가 현지에 파견된 구 과장의 칭찬을 했다. 구민철 과장은 대인해운 구상옥 회장의 외아들이었다. “맨날 사고만 치던 놈인데…… 이제야 겨우 밥값 한 거지 뭘…….”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구 회장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차기 경영자로서 능력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구 과장이랑 같이 있던 보험사 직원이 유명한 놈이라며?” “네. 성원화재 박강준 과장이라고 그간 이런저런 보험 관련 사건을 맡아서 처리했답니다.” “혹시 화물선을 찾은 것도 그놈 덕분인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박강준이 홍콩 쪽 범죄조직을 이용해 술루해 인근을 샅샅이 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색 비용도 개인 비용으로 댔답니다.” 구 회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왜? 왜 자기 돈을 써 가면서까지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게 저도 의문입니다. 어차피 보험조사관은 샐러리맨 아닙니까? 아주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본인의 공명심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사건추적 24시에 출연하면서 나름 그 바닥에서 인지도가 생겼으니까요…….” 구 회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흠…… 일단 이번 일 마무리되면 한번 자리를 마련해 봐. 내가 직접 어떤 놈인지 확인해야겠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슬람 반군이 설치는 위험지역에서 자기 아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 회장은 이미 강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을 강준은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예측했었다. 대인해운에서 함께 출국했던 구민철 과장의 기억에서 그가 구상옥 회장의 친아들이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강준에게는 성원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됐을 때, 우호 지분을 가진 대인해운에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창구 하나가 확보된 거나 다름없게 된 것이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다시 구상옥 회장의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옆에 있던 김 전무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대인해운 비서실입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대령님께도 감사 인사 부탁드립니다!” 김 전무는 화색이 돈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군 측에서 작전 명령이 떨어졌답니다! 대한민국 해군이 직접 시부투 해협에 출동해 우리 화물선의 구출 작전을 개시한답니다!” “하하!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다시는 해적 놈들이 한국 선박을 못 건드리겠지!” 구상옥 회장은 팔걸이를 ‘탁’ 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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