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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선박 피랍사건 (2) (88/250)

088. 선박 피랍사건 (2)2022.02.26.

뚜다다다! 뚜다다다! 쏭발란 지역의 상공을 날고 있는 헬기에는 강준과 구 과장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흑룡회의 중간보스인 린팡이 그 둘과 함께 있었다. “박 선생! 저기 불타고 있는 배가 보이십니까?” “……린팡 당신의 작품인가요?” “덕분에 얻어걸린 거죠. 쏭발란 지역이 마약 제조의 집산지라고 한 말이 사실이더군요. 물론 아직 공장을 찾진 못했지만요…….” 강준은 시선을 지상으로 돌렸다. 3천 톤급 화물선이라면 헬기 상공에서 내려다봤을 때 발견되지 않을 리 없었다. “화물선은 보이지 않는군요.” “박 선생. 이만하면 이 지역에는 피랍된 화물선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3일째 수색이었다. 쏭발란 지역을 비롯한 술루(Sulu)해 인근의 섬들은 거의 다 조사한 상태였다. “구 과장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거처로 돌아가시죠.” 구 과장의 얼굴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난번 선박 피랍사건 때는 선박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었다. 납치된 선원 1인당 10만 불의 몸값, 총 120만 불을 지급하고 사태가 마무리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규모가 더 커진 거였다. 스무 명 선원들의 몸값, 그리고 선박 자체의 금액과 그 화물선에 실린 화물들의 피해보상금까지 합치면 대인해운이 입는 피해액은 수백억 원에 달했다. 성원화재 역시 선박 사고에 대한 10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해야 했지만, 보험금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은 피해였다. 게다가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스무 명의 인명이 달린 문제였다. 이번 피랍사건을 해결하러 파견된 구 과장의 표정이 좋을 리는 만무했다. 헬기는 린팡의 거처로 방향을 틀었다. “그나저나 한국 경찰의 정보가 꽤 쓸만하군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 경찰에는 정의감 넘치는 몇몇 경찰이 있거든요.” 린팡은 정의로운 경찰이라는 말에 비웃듯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각국의 경찰에게 돈을 먹여 통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다. 한국 경찰도 매일반일 거로 생각한 것이다. 강준에게 배필립이 민다나오 지역에서 마약을 유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준 이는 광역수사대의 이진철이었다. 배필립의 송환을 추적하던 중 그의 탈옥 소식을 전해 들었고, 필리핀에 남은 정보원으로부터 그가 마약 유통 사업에 손을 뻗쳤다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린팡의 거처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그는 이진철 경감이 파견한 마약전담 수사팀의 허찬이었다. “허찬 경사입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검게 탄 얼굴, 현장에서 그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를 잘 말해주는 모습이었다. “성원화재 박강준입니다.” “대인해운 구민철 과장입니다.” 각자 인사를 나누고는 허찬은 린팡에게도 다가갔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날이 선 첫인사를 건네는 허찬이었다. 린팡은 경찰이라는 말에 허찬이 내민 손을 무시한 채 지나쳤다. “이거 꽤 살벌한데요?” 싸늘한 공기를 느낀 구 과장이 강준에게 속삭였다. “다들 친목질하려고 모인 건 아니니까요…….” 강준의 말처럼 그들은 각기 다른 목적이 있었다. 강준과 구 과장은 실종된 화물선과 선원을 찾는 것이고 린팡은 마약 사업의 경쟁자를 누르려는 것이었으며 허찬은 마약 유통업자 배필립을 검거하는 거였다. “자 다들 모여 봅시다!” 린팡이 마치 자신이 리더라도 된 양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입구 자 모양으로 된 널찍한 소파에 둘러앉은 셋은 린팡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시원한 거라도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린팡은 부하에게 얼음을 갈아 넣은 음료를 가져오게 했다. 거실의 통유리 너머로는 석양이 지며 하늘을 온통 붉게 만들었다. “박 선생, 일단 우리는 선생의 부탁을 해 줄 만큼 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우리 차례겠지요?” 수색에 참여해 준 대가를 요구하려는 린팡이었다. “잠깐만요! 린팡 선생. 한 군데 수색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강준의 말에 인상을 팍 구기는 린팡이었다. “거기가 어딘가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3국 국경이 접하는 지역입니다.” “……흠…… 거긴 필리핀 해안경비대도 손을 쓸 수 없는 지역이에요. 그런 곳을 우리보고 들어가라고요?” 강준은 린팡의 기억을 진즉에 읽고 있었다. 그는 화물선이 시부투 해협의 인도네시아 해상영역에 숨겨져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화물선 선박을 찾아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쏭발란 지역의 이슬람 반군 세력 아부 사야프의 마약 제조시설만 제거하면 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살을 내줄 각오 정도는 되어 있어야겠죠? 우리도 맨입으로 부탁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하! 맨입이 아니라…… 이미 쏭발란 지역에 아부 사야프의 제조 기지가 있다는 게 다 밝혀졌는데 우리가 박 선생으로부터 더 얻을 게 있을까요?” “허찬 경사님? 말씀해 주시죠.” 강준은 허찬 경사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있는 말투로 린팡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마약 제조 공장을 찾는다고 해도 그걸 다시 만드는 건 금방입니다. 결국은 공장을 짓는 건 사람이니까요.” “그럼 당신 말은 기술자를 잡아야 한다…… 그겁니까?” “네, 그리고 그 기술자를 잡기 위해 제가 여기에 온 거고요.” 린팡은 다시 피식 웃더니 허찬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뭡니까?” “이겁니다!” 허찬이 내민 사진에는 로웰 중령과 만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남자는 대인해운의 화물선 선장인 김갑수였다. “이 사람이 그 기술자라는 겁니까?” 물론 김갑수 선장이 기술자일 리는 만무했다. “한국의 필로폰 제조자로 유명세를 타던 놈입니다. 메스암페타민으로부터 필로폰을 합성하는 공정을 꿰고 있는 인물이죠.” “메스암페타민이라면…… 우리 사업과 겹치게 되죠…….” 린팡은 심각한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봤다. 허찬은 한국 측이 실종자로 찾고 있는 화물선의 선장을 마약 기술자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계획은 린팡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강준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음…… 이놈의 행방은 제가 한번 알아보죠.” “저희도 함께 추적하겠습니다! 그러려고 이곳에 파견된 거니까요.” 허찬 경사의 확고한 대답에 린팡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로서는 한국 경찰을 자기 방식으로 주무르려던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 * * 다이아몬드 호텔. 대인해운 화물선의 선장인 김갑수는 갑자기 객실 내에 갇힌 상황이 못마땅했다. 더군다나 자기의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제이콥이 방문을 막아서자 심기가 더욱 뒤틀렸다. “야! 이 새끼야! 이거 안 놔?” “안 됩니다. 배필립 사장님께서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알겠다고. 멀리 안 가고 호텔 앞에 있는 바에서 딱 한 잔만 마시고 돌아온다니까?” “안 됩니다…….” 단호한 얼굴로 막아서는 제이콥이었다. “새끼가…… 근데 너 아까부터 태도가 삐딱하네? 시발!” 김갑수는 눈을 치켜뜨며 제이콥의 뺨을 툭툭 쳤다. 제이콥은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그를 위협하고 싶었지만, 차마 권총을 뽑지는 못했다. 그랬다간 지금보다 더 적대적인 관계로 한동안 지내야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제이콥! 우리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고…….” 복도에 있던 조슈아는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김갑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제이콥을 응시했다. 둘은 졸지에 김갑수의 경호원처럼 그를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김갑수는 항상 술을 마시던 바로 향했다. 간만에 미셸을 만나 수다를 떨 생각에 그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바에는 예상대로 미셸이 김갑수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했다. “캡틴! 왜 며칠 얼굴이 안 보였어요?” “연락하려고 했는데…… 문제가 좀 있었었거든.” “무슨 문제요?” “아니야, 이제 해결됐어.” 김갑수의 말에 환하게 웃어주는 미셸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갑수는 불쾌했던 마음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근데 캡틴, 어제부터 캡틴을 찾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를? 누가?” “저기 저 사람들! 저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인가?” 미셸이 가리킨 곳에는 동양인 얼굴을 한 남자 둘이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순간 김갑수는 그들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김갑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김갑수는 전화기를 들어 제이콥의 번호를 눌렀다. “제이콥! 나 지금 W버드니까! 그리로 와! 당장!” 김갑수가 아쉬울 때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제이콥뿐이 없었다. 전화가 채 끊어지기도 전에 남자들이 김갑수를 둘러쌌다. “우리 얘기 좀 할까요?” 영어로 물어오는 남자들이었다. “하하…… 글쎄, 무슨 얘기가 좋을까?” “당신이 좋은 기술을 가졌다고 하던데? 우리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습니까?” 남자들이 말하는 기술은 마약 제조기술을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 김갑수는 선박 항해술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야…… 얼마를 주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우리는 홍콩에 공장이 있죠. 그쪽에서 당신 같은 기술자들이 있고요. 돈은 섭섭지 않게 드릴 겁니다.” 김갑수는 남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배필립이 했던 말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 선장, 나 말고 필리핀에서 당신 찾는 사람 있으면 그건 경찰이야. 그게 아니면 당신 돈 노리는 납치범이던지.] “근데 당신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대?” “이 바닥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가죠. 아부 사야프가 당신 덕분에 공장을 차렸다는 얘기는 우리 귀에도 들어왔거든요.” 김갑수에게는 이미 그들이 하는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남자들이 경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에는 가지만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들은 언제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일단 화장실 좀 다녀옵시다!” 남자들은 바의 안쪽을 정중히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김갑수는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잰걸음은 그가 화장실이 아니라 도망치려 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은 김갑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악! 아악! 짧은 비명은 김갑수가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앉아 있던 고객이 지른 소리였다. “개새끼들아! 나 따라오지 마!” 남자들을 납치범으로 오인한 김갑수는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도로를 무단횡단했다. 빠아아앙! 빠아아앙! 창문이 없는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김갑수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이런 시발! 운전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캡틴 킴! 여깁니다! 여기!” 반대편 길가에는 김갑수를 발견한 제이콥이 두 팔을 휘저으며 조슈아와 함께 길을 건너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밴 차량이 지나갔다. “캡틴 킴!” 밴 차량이 지나가고 나자 제이콥의 시야에서 김갑수가 사라져 버렸다. “캡틴! 캡틴 킴!” 제이콥과 조슈아가 도로 양쪽을 둘러봤지만, 이미 그곳에서 김갑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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