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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선박 피랍사건 (1) (87/250)

087. 선박 피랍사건 (1)2022.02.25.

필리핀 민다나오 남서부 삼보앙가(Zamboanga City) 해상경비대. 강준은 대인해운에서 파견된 구 과장과 함께 필리핀 해상경비대의 로웰 중령을 설득 중이었다. “우리 회사의 3천 톤급 화물선이 며칠째 실종상태입니다! 지금 통신이 완전 두절됐다고요!” “진정해요, 미스터 구!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강준이 한국에서 브리핑을 받은 바로는 대인해운의 납치 건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사건에서는 해상에서 선원들을 납치해 몸값을 요구한 것뿐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화물선을 자기네들 근거지로 끌고 갔다면 헬기로 수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흥분한 구민철 과장이 ‘쾅’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하지만 로웰의 표정에는 전혀 미동이 없었다. 답답해진 구 과장이 강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박 과장님, 뭐라 말 좀 해 주시죠! 이놈들 이거 완전히 손 놓고 있겠다는 건데요?” 강준은 로웰 중령이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로웰 중령은 이미 이슬람 무장반군단체 아부 사야프(Abu Sayyaf)와 내통하고 있었다. ‘한국 화물선의 진입 경로를 알려 준 것도 저 인간인데 ……실종된 화물선을 수색할 리가 없지.’ “로웰 중령님 헬기 사용이 힘들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아니라 해상경비대의 모든 작전에는 상부의 명령이 필요합니다. 미스터 구가 말한 화물선은 3국의 국경이 접하는 시부투(Sibutu) 해협에서 납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섣부르게 타국 해상에서 수색을 벌였다간 국경분쟁을 치르게 될 위험성이 있죠.”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대인해운의 화물선은 필리핀 남서부의 술루 제도 인근 해상의 시부투 해협을 통해 호주로 향하던 중이었다. 만약 시부투 해협이나 필리핀 쪽으로 더 치우친 바실란 해협을 거치지 않는다면 최소 하루 이틀 정도가 더 걸리는 항로로 우회해야 했다. 그렇기에 시부투 해협과 바실란 해협은 해적의 표적이 된 것이었다. “로웰 중령님…… 그럼 필리핀 영내에 있는 섬들은 수색할 수 있다는 거죠? 원칙적으로요?” “그야 그렇죠. 하지만 수백 개 섬을 일일이 수색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죠. 우리 해상경비대가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에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두 팔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로웰 중령이었다. ‘해적들이 노린 것도 바로 이런 거지…… 요지부동인 관료조직 그리고 적당히 썩은 지휘관!’ 강준은 한국의 화물선이 당하고만 있는데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내심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구 과장처럼 나서서 흥분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 우리가 직접 수색하겠습니다!” “네? 귀사에서 말입니까?” “전 선박 보험사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선박을 찾아 피해 규모를 줄여야 보험금 지급을 줄일 수 있는 거니까요.” 강준은 옆에 있던 구민철 과장을 바라봤다. 그 역시 강준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박 과장님…… 뭘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강준은 로웰 중령을 바라보며 답했다. “자체적인 수색팀을 구성할 생각입니다! 설마 우리 수색팀이 필리핀 영내를 수색하는 걸 방해하시진 않겠지요?” “흐음…… 혹시 불법적인 자들이라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제 관할 구역 내에서 일어날 불미스러운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제 임무니까요.” “물론 합법적인 선 내에서 활동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번 일까지는 한국군이 개입하게 않게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면 한국의 해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군의 개입을 운운하는 강준에게 로웰 중령은 꽤 심기가 불편한 듯 시가 파이프를 물고는 연기를 연신 내뿜었다. “……경고하는데 여긴 필리핀의 영토요! 함부로 경거망동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모릅니다!” 괜히 해상경비대 책임자의 심기만 건드린 것 같아 불안한 표정을 짓는 구민철 과장이었다. “로웰 중령님…… 그게 아니라…… 양국 간의 국가적인 문제로 확대하는 것보다는…….” 구 과장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 그때, 바깥에서 로웰 중령의 부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뭔가를 보고했다. “그럼 다…… 다음에 또 봅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웰 중령을 따라 부관이 따라가려고 할 때, 강준이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기억이 전해졌다. [마약을 실은 배가 불탔습니다!] [어디? 쏭발란 지역?] [네. 아마 마르케스의 구역인 것 같습니다!] [당장 대원들 출동 준비시켜! 기관총으로 무장시키고!] 긴장한 모습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이었다. 강준에게 기억을 읽힌 부관은 삼보앙가 해상경비대의 연락장교였다. “헤이! 미스터 박!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지금은 아무것도 알려 줄 수 없어요!” 부관은 강준의 손을 뿌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함께 있던 구 과장이 의아스러운 듯 강준에게 물었다. “박 과장님, 정말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직접 수색을 하시겠다니요?” “헬기를 섭외해 놨습니다. 물론 민간업자로요. 근데 그 전에 가봐야 할 곳이 있네요.” “……어디를 말입니까?” “쏭발란 지역이 어딘지 아십니까?” “아! 거기는 수풀지대인데…… 수상 가옥들만 있는 곳이죠. 더 큰 문제는 반군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거고요.” 구 과장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혹시 강준이 그곳에 같이 가자고 할까 봐 겁나는 거였다. 그런 구 과장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강준이 말했다. “거기부터 수색해 봅시다.” “아니, 박 과장님 거기 이슬람 무장반군이 설치는 곳이라니까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인해운 직원들이 실종된 마당에 못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박 과장님, 죽는 거 안 두려워요? 혹시 목숨줄 두 개예요?” “괜찮아요. 안 죽어요!” 강준은 웃으며 구 과장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같이 가요!” 안 죽는다는 강준의 말은 일부 사실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 강준은 이슬람 무장반군단체 아부 사야프(Abu Sayyaf)와 적대관계에 있는 세력을 포섭해 놓았다. 그들은 바로 민다나오에서 제조되는 마약을 견제하려는 중국계 마약 조직 흑룡회였다. * * * 바실란(Basilan) 섬 이슬람 무장반군 아부 사야프(Abu Sayyaf) 본거지. “마틴 배, 정말 계획에는 문제가 없는 겁니까?” “물론이죠. 이건 어차피 서로 짜고 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한국인 선장을 구워 삶아놨거든요.” 마틴으로 불리는 배필립은 쓸데없는 염려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상대에게 장담했다. 배필립이 대화하는 상대는 아부 사야프의 술루 제도 리더인 오마르 마르케스였다. 초호화 리조트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대지에 수영장과 수십 채의 룸이 딸린 빌라가 그들의 근거지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밀림 지대를 전전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마약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가 세부교도소에서 닉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하하!” “당신이 우리 사업에 발을 들인 건 정말 잘한 거요. 덕분에 당신은 우리 물건을 팔 수 있게 됐고, 우린 이렇게 새로운 사업을 찾을 수 있게 된 거니까.” 청부 살인 혐의로 30년형을 선고받고 세부교도소에 갇혔던 배필립은 교도관들을 매수해 탈옥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만났던 닉이라는 자를 통해서 아부 사야프의 마약 사업에 선을 댄 것이었다. 그리고 배필립이 역으로 제안한 사업이 바로 선박 해상 납치사업이었다. 선원들의 목숨값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는 것! 그건 배필립의 전공 분야이기도 했다. 배필립이 자신에게 음료수를 가져온 이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마르케스는 부하로부터 뭔가를 보고 받았다. “마틴! 지금 문제가 생겼소. 여기서 마저 즐기려면 즐기시오.” “마르케스 무슨 일입니까?” “우리 물건에 누가 손을 댔소!” “로웰 중령이 보호해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왜 그런 일이…….” “별일 아니니 염려 놓으시오.” “잠깐만…… 마르케스…… 혹시 우리 쏭발란 구역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닙니까?” 배필립의 예리한 눈초리에 마르케스가 시선을 회피했다. 그곳에는 대인해운 화물선에서 납치한 스무 명의 선원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마틴! 여긴 내 구역이요. 그러니 내가 해결하겠소.” 마르케스는 권총을 허리춤에 꽂아 넣고는 부하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배필립도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야! 제이콥! 김 선장 지금 어디 있냐?” ―다이아몬드 호텔에 있을 겁니다. “객실에……?” ―그…… 그건……. “잘 들어 제이콥! 지금부터 김 선장 호텔 내에 사우나건 식당이건 절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 알겠어?”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합니까? “새끼야! 룸 서비스로 넣어주건 너희가 사다 주건 그건 알아서 하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제이콥은 세부어를 할 줄 아는 혼혈아였다. 그래서 배필립은 그를 자신의 측근으로 데리고 있었지만, 종종 그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먹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화를 받은 제이콥은 먹고 있던 햄버거를 얼른 입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랑! 햄버거 가게를 나와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이아몬드 호텔로 향했다. 자신을 무시하건 어쨌건 배필립은 자신의 고용주였다. 얼마 전부터 제이콥이 배필립에게 받은 임무는 대인해운의 김 선장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선장을 관리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김 선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인근 술집에서 진탕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덕분에 제이콥도 매일 같이 그의 주변에서 밤늦도록 일을 해야 했다. 호텔에 도착한 제이콥은 제일 먼저 로비를 지키고 있던 자신의 고향 친구이자 동료 조슈아에게 다가갔다. “미스터 킴은?” “몰라, 어떤 바바에랑 같이 올라가더니 아직 안 내려왔어.” “마틴이 오늘부터 객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래.” “왜?” “몰라 나도.” “제이콥 너도 알잖아! 미스터 킴이 우리 말 잘 안 듣는 거.” “잘 설명해야지. 안 되면…… 이걸로 위협하는 수밖에.” 제이콥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조슈아에게 보여줬다. “그러지 말고 네가 미스터 킴한테 얘기 좀 해 줘. 네가 한국말을 잘하니까 네 말은 들을 거라고!” 조슈아는 한국 혼혈인 제이콥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어릴 때부터 코피노라고 놀림 받던 그를 친구로 대해줬던 조슈아였다. 그리고 배필립과의 일에 조슈아를 끌어들인 것도 제이콥이었다. “알겠어…… 내가 말해 볼게.”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8층 객실로 올라갔다. 813호. 복도 가장 끝의 방이었다. 띠릭! 객실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 테이블에는 쓰러진 술병이며 음식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김 사장은 침대에 엎드려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잠에서 깬 바바에만이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른 옷 입고 나가!” 제이콥은 등을 돌리고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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