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금융위기 (5)2022.02.24.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절정에 달했으며, 한국의 코스피 지수는 천 포인트를 뚫고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이 이사님, 우리 쪽 포지션은 어떻습니까?” “선물로 숏을 잡고 옵션으로 헷지를 해 뒀습니다.” “성원그룹에서 판매한 변액보험들은 문제가 없겠군요.” “네, 맞습니다. 오히려 자산 건전성이 크게 향상될 수도 있습니다.” 이삼 이사는 최진호 대표 앞에서 긴장해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삼 이사가 그간에 보고하지 않고 해왔던 투자행위들이 모두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사님, 이번 같은 실수는 다시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자산운용에 있어서는 투명성이 첫 번째입니다. 손실이 나든, 이익이 나던 투자자와 보험계약자들에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야 할 의무가 있으신 겁니다.” “아…… 알죠. 명심하겠습니다.” 이삼 이사의 맞은편에는 강준도 와 있었다. “박 과장은 이제 자산운용 쪽은 이 이사님이 더 신경을 쓰실 테니 너무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 대표의 말은 강준에게 원래 보험조사관의 포지션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네, 저도 마침 바빠지던 참입니다.” 강준은 짧게 답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있던 이 이사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강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근데, 박 과장한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까지 예견하셨으니 말인데…… 혹시 언제까지 지금의 장세가 계속되리라고 보십니까?” 이삼 이사의 궁금증은 말 그대로였다. 페니맥과 프레디맥의 국유화에 이어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까지 강준이 확신에 찬 태도로 맞췄으니 점쟁이한테 물어보듯 질문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그게 궁금하신 거겠죠?” “……그렇죠…… 아무리 금융시장 전체가 위기라도 끝은 있는 법이니까요.” “10월에 892포인트까지 떨어질 겁니다.” “네? 아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요?”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는 강준의 말에 이 이사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강준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사님, 저라고 어떻게 바닥을 알겠습니까? 그걸 알았으면 제가 이러고 있지 않고 투자회사를 차렸겠죠. 하하!” “……아…… 하하! 그렇죠.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강준의 실없는 답에 오히려 민망해하는 이삼 이사였다. 그 모습에 최진호 대표가 화제를 돌렸다. “언론에서는 그래도 우리 성원그룹에 대해 우호적으로 바라봐 줘서 참 다행입니다.” 공중파인 대한뉴스에서는 최진호와 최진태 이복형제의 보험사 경영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보도 기사를 내보냈다. 그 보도로 인해 여론은 돌아섰다. 최진태가 단기간에 영업실적을 흑자로 돌려놓았지만, 그 비결이 보험설계사들의 대량해촉과 수십 개의 지점 폐쇄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보험업계의 선두라고 할 수 있는 성원그룹의 조용한 자정 노력이 더 주목을 받았다. 한국보험을 기반으로 성원그룹을 집어삼키려 했던 최진태로서는 낭패인 결과였다. 강준은 최진호 대표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마련된 마당에 단도직입적으로 민감한 얘기를 꺼냈다. “그룹 내에 최진호 대표님이 성원그룹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하! 박 과장님이 언제부터 사내 정치에까지 신경을 쓰셨습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린 것이기도 합니다.” “……전 성원그룹에 돌아온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말씀이네요.” 겸연쩍어하는 최진호 대표였다. 하지만 강준의 진짜 의도는 그다음이었다. “한국보험의 주주들이 최진태 이사를 지지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야…… 윤미경 감사가 전방위로 주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갖은 수를 써왔으니까요.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애써 담당하게 말하는 최진호였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주주들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일각에서는 최진태 이사가 그룹을 장악하면 보험사업을 외국에 매각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박 과장님이 들었다는 소문의 출처가 어딥니까?” “대한뉴스 쪽입니다.” “대한뉴스라면…… 한국보험 인수전부터 관심을 기울여 왔던 매체가 아닙니까?” 표정이 어두워지는 최진호였다. 대한뉴스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라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최진태에게 경영권이 갔다간 성원그룹의 보험사업이 완전히 날아가게 생긴 것이었다. “박 과장님께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자면…… 아버님이 회장직을 내려놓으시고 제가 그룹을 맡게 되면 전문경영인에게 계열사들을 관리하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물론 제 계획일 뿐이긴 하지만요.” “최 대표님, 지금은 전문경영인 체재니 그런 것들을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일단 그룹을 지켜야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최진태를 방어하기에 최진호는 너무 나이브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님이 지켜온 보험사업입니다. 박 과장님이 말씀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이긴 하지만 윤미경 감사의 뒤에는 집권 여당의 실세인 박상도 의원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볼 수 있죠.” 최진호는 박상도 의원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방금 그 얘기도 대한뉴스 쪽의 정보인가요?” “네, 대한뉴스에서는 박상도 의원의 반대파를 밀고 있거든요.” “아…… 그렇게 된 거로군요.” 그제야 최진호는 성원그룹에 대한 경영권 문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더 실감한 듯했다. “그간 김성호 이사님께서 이런저런 언질을 주신 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윤미경 감사가 이렇게 정치판까지 발을 넓힌 줄은 모르고 있었네요.” “최진태 이사의 장인인 한승일 시장이 검찰 쪽을 꽉 잡고 있으니 정치 권력과 검찰 권력 그 둘을 모두 쥐고 있는 꼴이죠.” 한동안 듣고만 있던 맞은 편의 이삼 이사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표님, 주요 주주 중에 아직 방향을 정하지 않은 곳들도 꽤 있습니다. 게다가 최은정 이사와 대표님 지분을 합치면 아직은 대표님 쪽에 유리한 상황이고요.” 애써 최진호를 안심시키는 이삼이었다. 그리고 그는 강준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박강준 과장님, 혹시 대인해운이라고 아십니까?” “대인해운이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성원그룹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주요 주주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대인해운의 모든 선박은 성원화재에 선박보험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근데 최근에 골치 아픈 일들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골치 아픈 일이라면……?” “해상에서 선박들이 납치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답니다. 근데 그 해상이 얼마 전 박 과장님이 사건을 해결했던 필리핀해상이고요.” 최진호가 강준에게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대인해운은 IMF 때 아버님이 이끄시던 성원화재와 부실 보험사 인수전에 함께 뛰어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인해운이 밀리면서 보험사를 결국 손에 넣지 못했죠. 그래서 대신 성원화재와 성원생명의 주식을 사들인 겁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대인해운은 여차하면 성원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났을 때 캐스팅보트로 역할을 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강준은 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이사님 말씀은 대인해운의 골치 아픈 일을 우리가 잘 처리해 주면 대인해운의 보유주식을 최진호 대표님의 우호 지분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 거네요?” “네!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이삼은 보험조사관 강준이 최진호를 도울 방법을 제안한 것이었다. “최 대표님, 그럼 제가 대인해운 담당자들을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근데…… 선박의 해상 납치 같은 문제라면 박 과장님이 나선다고 해결이 될까요? 그런 건 군이 개입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요?” 최진호 대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강준이 타인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박 납치와 같은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최 대표님! 박강준 과장님이 일전에도 엄청난 사건들을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해외에서 일어난 청부 살인사건으로 사건추적 24시에도 출연하셨고요!” 옆에서 바람을 넣는 이삼이었다. 그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맞춘 강준에게 밑도 끝도 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준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강준은 필리핀에서 아직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은 배필립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가 여전히 필리핀의 감옥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보험조사관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죠. 물론 개인적으로 필리핀에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요.” 강준은 자신의 말에 호기심을 가지는 최진호 대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 * * 대한뉴스에서는 한국보험의 보험설계사 대량해촉 문제를 끈질기게 보도했다. 덕분에 한국보험 설계사들의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전은 전국에 알려졌다. 그리고 결국, 몇 개월의 걸친 소송 끝에 강준이 지원한 한국보험 설계사들의 구상권 청구 취소소송은 재판부로부터 승소를 끌어냈다. 송지희는 판결이 나오자 옆에 있던 김미영의 손을 꼭 붙잡으며 환호했다. “김미영 설계사님 축하드려요!” 병원에서 몸을 회복해 설계사들의 집단 소송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김미영이었다. “지희 씨 고마워요. 이제 정말 끝났네요. 박 설계사님! 우리가 이겼어요!” 백상현 지점장의 멱살을 잡았던 박 설계사는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소송 선고일 만은 법정에 직접 출두했다. “미영 씨, 우리가 틀리지 않았어!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고! 흐흑!” 방청석의 또 한 구석에서는 보험설계사 해촉의 악역을 맡았던 백상현 지점장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윗선에 보고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한 그였다. “백상현 이 새끼야! 너 이걸로 끝난 줄 알지? 아니야! 우리가 앞장서서 세상에 알릴 거다! 우리가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보험사가 얼마나 쉽게 돈을 벌어왔는지!” “맞아요. 최진태 대표한테 가서 전하세요. 쉽게 사람 자르고 실적 올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아마 앞으로 성원그룹 경영권을 확보하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거라는 말도요.” 박 설계사의 옆에는 어느새 대한뉴스의 이유린 기자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이 극적인 소송전을 일으켰던 주범으로 한국보험의 새로운 대표인 최진태를 부각할 계획이었다. “김미영 씨, 계속 소송을 이어갈 거죠? 부당하게 환수된 설계사분들 수수료 몽땅 받아 내야죠.” “네, 근데 그건 변호사님과 얘기해 봐야겠네요.” 어느새 다가온 민훈 변호사가 김미영의 말을 듣고는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추가 소송해야죠. 근데 저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이라 앞으로의 소송은 박 과장님이 수임료를 얼마나 주실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하하!” “죄송해요. 박 과장님이 오늘 오시려고 했는데 새로운 사건이 잡히셔서 여기 못 오셨네요.” 송지희는 강준이 대인해운의 보험 건을 처리하러 다시 필리핀으로 떠났다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