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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금융위기 (4) (85/250)

085. 금융위기 (4)2022.02.23.

강준은 송지희와 함께 은하아파트 101동으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갔다. 꼭대기 층인 13층이 김미영 설계사의 자택이었다. 둘은 복도식 아파트의 통로를 뛰어 김미영의 대문 앞에 다다랐다. “헉헉……! 박 과장님, 비밀번호는 알아요?” “57XX!” “비밀번호를 알아뒀다고요?” “……내가 미리 남편분께 전화해 봤거든.” 보험조사관에게 주변인 조사는 필수다. 송지희는 강준의 철두철미함에 놀란 채,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릭! 문이 열리자 송지희는 거실에 쓰러져 있는 김미영에게로 달려갔다. 아직 정신이 남아 있는지 김미영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주변에는 수면제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송지희는 재빨리 김미영의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동공을 확인했다. “아직 의식이 있어요! 박 과장님 뒤에서 받쳐주세요.” 강준이 허리를 들어 앉히자 송지희는 김미영의 입을 열어 기도를 확보했다. 그리고는 가져온 소금물을 김미영의 목구멍으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으으으……!” 의식이 희미한 김미영이 속으로 뭔가가 들어가자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신음을 냈다. 그러자 송지희는 재빨리 그녀의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박 과장님, 등을 좀 들썩이게 해 봐요!” 강준은 김미영을 뒤에서 잡고는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가 구토하기 쉽도록 말이었다. “윽…… 웨에에엑…….” 누런 위액이 김미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그녀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박 과장님, 119에 신고해 주세요! 거기 덮을 만한 것도 찾아와 주시고요.” 송지희의 응급조치가 아니었다면 김미영은 그대로 목숨을 잃어버렸을 터였다. 한숨을 돌리고 나자 송지희가 김미영에게 위로의 말을 쏟아냈다. “김미영 설계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김미영에게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 * * 한국보험 여의도 본사. 최진태 이사는 인상을 팍 구기면서 차에서 내렸다. 빌딩 입구에는 피켓을 든 설계사들 수십 명이 새로운 한국보험의 대표이사가 된 최진태를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기꾼이 아니다!” “책임을 일방적으로 설계사에게 떠넘기는 게 말이 되냐! 도둑놈들아!” “신임 대표 최진태는 물러가라!” “설계사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조끼를 입고 피켓을 든 이들은 얼마 전에 한국보험으로부터 대량 해촉된 설계사들이었다. 이들이 정말 길거리에 나앉은 건 단순히 해촉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상권청구 철회하라!] [고객보상금을 왜 설계사가 물어줘야 하냐? 설계사는 한국보험에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냐!] [우리는 교육받은 대로 판매했을 뿐이다! 불완전판매는 한국보험의 주범이다!] 시뻘건 글씨로 분노를 표현한 현수막이 설계사들의 천막에 걸려 있었다. 김미영처럼 고객에게 압박을 받거나 보증보험사 측에서 구상권청구 소송을 당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거액을 물어줘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것이었다. 그들을 쓱 훑은 최진태 이사는 옆에 서 있는 백상현 지점장을 돌아보며 짜증이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 과장! 저런 인간들 당장 안 치우고 뭐 하자는 겁니까? 우리가 선진 경영을 해내려면 저런 뻔뻔한 인간들부터 정리해야죠.” “죄…… 죄송합니다! 제가 누누이 얘기해 놨는데…… 도통 들어먹지를 않는 인간들이라…….” 말끝을 흐리는 백 지점장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최진태였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한참은 나이가 많은 그를 보며 훈계하듯 말을 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책임감이 없어요. 책임감이! 본인들이 회사 이미지에 얼마나 민폐를 끼쳤는데 오히려 저렇게 뭐라도 하나 얻어내려고 떼를 쓴다니까요.” “……제가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정리요? 정말 가능하겠어요?” 최진태는 백 지점장을 째려보며 물었다. 그러더니 백 지점장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털어주며 말했다. “지점장님…… 제가 그랬잖아요. 책임감이 중요하다고요. 지점장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신 거니 여기 한 명도 없이 깔끔히 정리하시고…… 다 정리가 되면 그때 사무실로 올라오세요.” 얼토당토않은 요구였지만, 백 지점장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최진태는 그런 그를 냉정하게 버려두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 지점장은 최진태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발…… 좆같네. 진짜…….”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시위하는 설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최진태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애꿎은 설계사들에게 모두 쏟아낼 생각이었다. “어이, 당신들!” 그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다가오라는 표시를 했다. 시위대는 모두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백상현 지점장! 당신이 제일 나쁜 인간이야! 고객들을 부추겨서 우리한테 각서를 받아 냈잖아!” “그러니까 이 새끼야! 이리 와서 우리 얘기 좀 하자니까! 내 말 안 들려!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피켓을 들고 있던 한 남자설계사가 땅바닥에 피켓을 던지더니 백 지점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새끼! 네가 사람 새끼냐!” 그가 멱살을 잡고 지점장을 흔들었고, 이내 주먹을 뽑아 들 때였다. 남자의 팔목을 잡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보험조사관 강준이었다. “박 설계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시위대를 흥분시켜 폭력을 유도하려는 게 이놈들 수법입니다! 지금 몇 대 치시면 당장 울분을 풀리시겠지만, 법정에 계속 끌려다니실 겁니다.” 박 설계사는 강준을 한번 돌아보고는 체념하듯 팔을 놓아줬다. “잘 참으셨습니다. 이게 다 시위대를 폭도로 몰기 위한 작전입니다.” 강준의 옆에는 연남시에서 온 변호사 민훈이 서 있었다. 도발하던 백 지점장을 내버려 두고 강준은 피켓을 든 설계사들에게 외쳤다. “설계사님들의 분노 충분히 이해합니다. 십 년 넘게 헌신한 회사로부터 버려지고 거액의 보상금까지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참담하시겠습니까?” “맞아요…… 흑흑!” 감정이 오른 몇몇 여성 설계사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시위를 이어간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기 한국보험의 경영진들은 여러분들이 지쳐 떨어지기를 기다리겠죠. 이렇게 간간이 도발하면서 말이죠.” “너 누군데…… 시발…….” 강준은 백 지점장을 가리켰고,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말을 삼켰다. “여기 계신 민훈 변호사가 앞으로 여러분들의 집단 소송을 맡아주실 겁니다. 아! 물론 변호사 비용은 전액 지원됩니다.” “정말입니까? 무료로 변호를 해 주신다고요?” “네, 여러분들께서는 그간 한국보험에서 받았던 교육 자료와 영업 지시 문건들, 그리고 고객들과의 면담자료를 재판 참고자료로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설계사들의 얼굴에서는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민훈 변호사는 강준의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박 과장님 수임료는 분명히 주시는 거 맡죠?” “에헤이! 민 변호사님 속고만 사셨나? 저 돈 많습니다. 걱정 놓으세요.” 강준은 염려 말라는 듯 민 변호사의 등을 두드려줬다. 돈이 많다는 강준의 말은 진짜였다. 강준은 최진호 대표에게 말했던 대로 최근의 폭락장에서 그간 벌어놓은 돈을 탈탈 털어 파생상품에 배팅했다. 덕분에 강준의 증권계좌에는 50억 원에 달하는 현금이 예치되어 있었다. 한편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최창식 회장의 측근인 김성호 이사였다. “최 대표님, 박강준 과장이 주도해서 해촉된 보험설계사들과 함께 집단 소송을 한다고 하네요.” “일개 보험조사관이 저렇게 나서는데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잘해 나가시면 될 겁니다. 회장님께서도 그걸 알고 대표님을 다시 성원생명의 대표로 세운 거 아니겠습니까?” 김성호 이사와 함께 있는 자는 최진태의 이복형 최진호였다. “진태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설계사들을 몰아붙이는지 모르겠네요…….” “주주들도 이제 슬슬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입니다. 이미지가 나빠지면 보험사로서 좋을 게 없죠. 단기적인 영업이익이 아무리 좋더라도요.” “한국보험의 재무 상황이 개선되는 건 분명 우리 그룹에도 좋은 일입니다. 만약 부실이 계속된다면…… 그룹 차원에서 구제해 주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런 방식은 절대 아니죠!” 최진호 대표는 한국보험 설계사 대량해촉 사태에 나서주는 걸 보고 고마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자연스럽게 강준을 더 신뢰하게 했다. * * * 다음 날 성원그룹 영업부에 공지가 떨어졌다. “그간의 불완전판매 건을 조사해서 고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라고?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정승태 영업본부장은 흥분해서 회의실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가 뽑은 지점장들은 정승태처럼 윗선의 비위만 맞추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본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최진호 대표님이 오신 뒤로……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김 과장! 말조심해!” 정승태는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자기 대신 최진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김 과장의 발언에 속으로는 흐뭇해했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의 지점장이 반대의견을 펼쳤다. 이희성 이사가 심어 놓은 강동지점의 지점장 채영준이었다. “단기적으로 불만이 생긴 고객들의 계약해지가 영업손실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길게 보면 나쁜 것도 없다고 봅니다.” 채영준의 말에 미간이 일그러지는 정승태였다. 이희성 이사 라인의 사람이기에 그를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원그룹의 두 보험사인 성원화재와 성원생명에서 판매된 변액보험 중에 불완전판매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 여론은 보험사들을 정조준하고 있죠.” “그게 무슨 말이야? 계속 말해봐.” “업계 자정 노력을 선제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몇십억 광고 비용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정승태는 바로 채영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의실에 모인 지점장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정승태 본부장의 눈 밖에 났다간 자리보전하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채 과장 얘기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 우리도 한국보험처럼 보험설계사들 탈탈 털어봐야 하나? 하하!” “하하하! 거기 지금 지점장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법원까지 불려가고 그런다는데요?” “채 과장 들었지? 괜히 들쑤셔서 좋은 게 없다고. 언론들이 보험사 쪽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다고 그래? 어디 연예 기사에서 스캔들 한번 터지면 사람들은 기억도 못 할걸? 다 그렇게 넘기고 하는 거야.” “맞습니다! 연말 목표 실적 맞추는 것도 버거운데 쓸데없는 데 힘 뺄 순 없죠.” 정승태 본부장의 말은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다. 안 그래도 일에 치여 있는 영업지점의 지점장들에게는 일거리를 덜어주는 정승태의 말이 더 달콤했다. 채영준 과장은 거기서 더 반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누가 정승태 본부장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하고 누가 미적지근한지를 가려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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