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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금융위기 (3) (84/250)

084. 금융위기 (3)2022.02.22.

“아니 그래도…… 미영이가 그냥 서류만 써 주면 되는 문제 아니야?” 어색한 침묵을 깨고 한 상인이 말했다. 그들로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누가 잘못을 했던 그들은 자기 돈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죠. 일이라는 게 쉽게 갈 수 있는데 굳이 돌아갈 이유는 없지 않아요?” “맞아. 우리가 미영이 너한테 부탁 좀 할게! 정말 부탁이야.” 중년 부인으로 보이는 상인이 김미영의 두 손을 잡으며 더욱더 곤혹스럽게 했다. 정을 빌미로 다가오는 그들에게 김미영은 버티기 힘들었다. “……써 드릴게요. 근데 정말 이것만 알아두세요. 전 진짜 여기 계신 분들한테 단 한 번도 사기 친 적이 없어요. 거짓말한 적이 없다고요!” 그런 김미영의 외침에 상인들은 시선을 외면한 채 딴청을 피웠다. 잠깐만 눈을 감으면 자신들의 돈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상현 지점장의 표정은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김미영을 쳐다봤다. 그런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송지희였지만, 그렇다고 고객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려는 김미영을 나서서 말릴 수는 없었다. * * * 성원생명 대표이사실. 최창식 회장의 장남인 최진호는 적당히 마른 몸매에 진중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평소에 자기관리가 얼마나 철저한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자인 최진태와 같은 독기는 없었다. 부드러운 인사말로 강준을 맞이하는 최진호였다. “어서 오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월나라를 멸하지 않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와 같은 인물인가? 버림받는 참모인 오자서가 되지 않으려면 확실히 각인을 시켜 줘야겠다.’ 강준은 독하지 못해서 월나라 왕을 살려 줬다가 되치기를 당한 부차를 떠올렸다. ‘나를 확실히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번에 만들어줘야겠네…….’ 강준의 맞은편 자리에는 미리 부탁해 놓았던 자산 운용팀을 맡은 이삼 이사가 앉아 있었다. 이 이사도 강준을 보며 살짝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사 직급이 과장 직급인 강준에게 예를 차린 격이었다. 그만큼 강준은 이제 성원화재 보험조사관으로서만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 “자산운용팀 이삼 이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원화재 보험조사 2팀의 박강준입니다.” 강준은 이삼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는 외국계 은행의 딜러 출신으로 몇 년 전 변액보험이 판매되면서 성원생명으로 스카웃되어 넘어온 인물이었다. 최진호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박 과장님이 여러 사건을 훌륭히 처리해내셨더군요. 특히, 지난번 고미술품 보험사기의 경우 대물보험에 있어서 하나의 참고사례가 된 것 같습니다.” 자신과 관계된 민감한 얘기는 피하며 강준을 칭찬하는 최진호였다. 하지만 강준은 에둘러 갈 것 없이 바로 본론을 얘기하려 했다. “한국보험에서 들려오는 얘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주가 연동 상품에서 문제가 생겨서 보험계약자들이 대거 해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더군요.” “알고 있습니다. 한국보험 측에서 최대한 언론에 새어 나가는 걸 막고 있습니다.” “과연 그게 막는다고 해결될 문제겠습니까?” 최진호 대표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뭔가 오늘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앞으로 주식시장이 더 폭락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원생명의 재무구조에도 악영향을 끼칠 거고요.” “연초부터 지금까지 하락 폭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자그마치 30%입니다. 근데 여기서 더 떨어진다고요?” 최진호는 강준의 말이 얼토당토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산 운용팀장인 이삼이 뭐라도 반박해 줄 것을 기대하고 그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삼의 눈빛은 좀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무척 긴장한 표정이었다. “지금보다 주식시장이 더 하락할 거라는 근거가 있으신가요?” 이삼은 조심스럽게 강준에게 되물었다. “아시다시피 이번 금융위기는 200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부동산 담보 대출의 부실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 문제는 올 초부터 계속 불거졌던 문제입니다. 작년에 파산했던 베어스턴스도 3월에 JP모건에 인수되면서 파장을 수습했고요.” “베어스턴스가 가지고 있었던 부동산 담보 부실 채권을 베어스턴스만 가지고 있었을까요?” 강준의 말에 이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최은정이 슬쩍 흘려준 정보에 따르면 이삼은 시장 비관론자였다.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에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강준은 대략 짐작이 됐다. ‘처음 보는 시장의 움직임이 당혹스럽겠지…… 불안하고 때때로 안도감이 들겠지만 날아드는 뉴스에 다시 혼란스러울 거다.’ 하지만 이삼은 이내 표정을 되찾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여전히 시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국내에도 많습니다. 그들도 박 과장님처럼 한결같이 폭락을 얘기합니다.” “성원생명의 변액보험 중 주식시장에 투자된 금액이 천억을 넘어가더군요.” 옆에 있던 최진호 대표가 강준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자료는 어디서 접하신 겁니까?” “최근 IR자료를 한번 살펴봤습니다.” “은정이가 힌트를 준 게 아니었군요.” 최 대표는 빙그레 웃었다. 성원생명은 상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최근의 생명보험사 상장허가를 대비해 IR자료를 만들어 공개했기 때문이었다. “천억이라는 금액이 단순 주식에만 들어간 건 아닙니다. 선물과 옵션 파생상품을 통해 나름의 헷지를 할 증거금들에도 투자된 돈이죠. 일종의 위험관리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있죠.” 강준은 거액의 트레이딩을 책임지고 있는 이삼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너인 최진호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떨어지는 칼날 같은 차트를 보며 무기력함을 느꼈겠지. 아무것도 못 하고 보고만 있었을 테니…….’ 강준은 한차례 침음하고는 최진호 대표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숏에 걸어야 합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진호는 갑자기 하락장에 배팅하라는 강준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이삼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준의 말이 이어졌다. “옵션 파생상품에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셨다면 분명 지금쯤은 대규모 손실이 나고 있을 겁니다. 맞죠?” 강준은 베이링스 은행 파산사태를 다룬 영화에서 옵션 파생상품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들은 언제나 시장의 안정성에 돈을 걸었었다. “……허험…….” 바로 답이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이삼은 대답하지 못하고 커피잔에 손을 댔다. 그때 강준이 실수라도 하듯 그가 짚은 커피잔을 함께 쥐며 말을 이었다. “손실이 난 거 맞죠?” 강준은 질문한 직후, 이삼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야! 김 과장, 어떻게 된 거야?] [달러가 계속 솟구칩니다…… 이거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1,400원에서 막아!] [그럼 손실이 500억입니다…….] […….] 이삼은 입술이 바짝 탔다. 그들은 위험한 환율 선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경영진에게 보고한 포트폴리오에서 엄연히 벗어난 투자행위였다. [이사님! 상승이 멈췄습니다. 다…… 다시 떨어집니다.] 이삼은 4개로 분할된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각 화면의 차트는 시시각각 점멸하고 있었다. 파란색 불빛! 달러의 상승이 반전되고 있었다. [1,350원…… 1,340원…… 1,320원…….] [지금 청산해!] 이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 과장은 마우스 버튼을 눌러댔다. ―계약이 청산되었습니다! 모니터 화면에서 옵션이 청산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휴우우우…… 김 과장, 총 손실액이 얼마야?] [……380억 원입니다.] [됐어. 그 정도면 막을 수 있어. 당분간 시세 파악하고 좀 있다 뉴욕장 시작되면 다우존스 지수 파악해 놓고!] 이삼은 덜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사무실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는 착잡한 마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삼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어떤 손실을 말하는 겁니까? 전체 자산운용 성과는 각각의 펀드들 손익을 합산해 봐야 하는 겁니다…….”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이삼이었다. “달러 환율 옵션에 투자한 거 말입니다. 380억 원 손해 보셨죠?” “……그…… 그걸…… 어떻게…….” 말을 잇지 못하고 강준을 노려보기만 하는 이삼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했다. 타부서인 강준이 구체적인 금액을 알고 있다는 건 내부의 스파이가 있다는 거였고, 그렇다면 최진호 대표도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이사님, 솔직히 말씀해 보시죠.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최 대표의 질문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이삼이었다. 외국계 은행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전부터 새로 달러 환율 옵션을 시작한 건 맞습니다. 글로벌 금융환경이 워낙 급변하다 보니 환율 쪽에도 신경을 써놔야 할 거 같아서 한 조치였습니다.” ‘지랄! 말은 잘한다!’ 강준은 속으로 이삼이 변명을 늘어놓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 현재 성원생명의 자산운용 상황은 어떤 겁니까? 정말 박강준 씨 말대로 손실을 보고 있는 겁니까?” “지난달 말까지는 별다른 수익률 변화는 없습니다…….” “이 이사님, 우리 자산은 일반 증권회사의 돈과는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고객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든 보험금을 우리가 대신 운용해 주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최진호 대표는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됐습니다…… 이 이사님, 이 문제는 당장은 덮어 두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 고민하면 되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손실이 났다는 걸 감으로 알아챈 최진호였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그 손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까 했던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자면…… 월가의 파산사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미국 부동산 담보 대출업체인 페니맥과 프레디맥이 파산할 거란 뉴스 말입니까?” 날이 선 이삼이 강준에게 되물었다. “페니맥과 프레디맥은 파산하지 않을 겁니다.” “방금 파산사태가 끝나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그 둘도 파산하는 게 맞지 않나요?” “파산이 아니라 국유화가 될 겁니다. 엄청난 공적자금을 쏟아부어서요.” 그 말을 들은 이삼은 아차 싶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 방향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미국 중산층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이 터지면 그야말로 미국 경제는 끝장이었다. 연준에서 그걸 내버려 두지는 않을 터였다. “이 이사님, 박강준 과장 말이 맞는 겁니까?” “……시장은 항상 예측할 수가 없는 거니까요.” 자신감이 한풀 꺾인 이삼이었다. “대표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몸통이 국유화되더라도 그걸 제외한 투자은행들까지 공적자금이 살릴 순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주가가 당분간 더 폭락하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강준의 주장은 꽤 명확했다. 당시에는 혼란스럽지만, 모든 시장의 장세는 돌이켜보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저점을 오로지 회귀한 강준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박강준 씨 말을 어떻게 믿죠?” “제 말대로 페니맥과 프레디맥의 국유화 얘기가 흘러나올 겁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는 월가의 투자회사인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할 겁니다.” 옆에 있던 이삼이 미쳤다는 듯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리먼 브라더스가 망한다는 건 월가가 망한다는 얘기나 다름없어요!” 이삼의 격한 반응에도 강준은 속으로 웃었다. 이제 며칠 만 있으면 자신의 말이 사실로 드러날 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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