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금융위기 (1)2022.02.20.
남부지검 지검장실. “지검장님! 지금 당장 증거 물품인 장부 돌려주십시오! 뇌물혐의로 한승일 시장 기소할 거고요!” 이은진 검사는 김우진의 장부를 본격 수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지검장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은 차 검사가 핵심 증거품인 전대성의 장부를 가져가 버렸다. “그러게, 누가 너더러 언론플레이나 하래?” “……그건, 죄송합니다.” “검사가 수사 중인 사안을 언론에 흘려! 그러고도 네가 검사야?” 비꼬듯이 타박하는 허종필 지검장이었다. 그는 금테 안경을 한번 쓱 올리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그가 화가 날 만도 했다. 전대성의 뇌물 장부는 시사뉴스닷컴의 함 기자에 의해 다뤄졌고, 대문짝만한 크기로 한승일 시장이 100억 원의 자금을 RS투자로부터 받았다는 의혹이 폭로됐다. 하지만 이후의 반전은 검찰이 전대성의 장부에 대한 존재를 부정해 버렸다는 거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요! 이런 외압 때문에 사건이 묻혀버리면 안 되니까요!” “이은진! 너 옷 벗고 싶어? 나가서 변호사 개업도 못 하게 해 줘?” 검찰 출신의 한승일을 미는 그룹들이 여전히 검찰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은진은 그야말로 말단 검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노골적이시네요!” “……뭐든 순리대로 하자고 순리대로! 너 혼자 나댄다고 해결이 돼? 한승일은 위에서도 주목하고 있어. 때가 되면 수사에 들어갈 건데…… 왜 혼자 설쳐!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이은진을 에둘러서 달래는 지검장이었다. “김우진도 차 검사한테 넘기실 생각이세요?” “……RS투자 재무담당자잖아. 차 검사가 수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오히려 되묻는 지검장이었다. “김재관 검사님 사망 건은…… 어떻게 처리하실 거예요?” “그건 진범인 송종철이 사망했잖아?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송종철 뒤에 누가 있는지 잘 아시잖아요?” “이은진 너는 추측으로만 수사하냐? 감으로만 수사해? 전대성과 송종철의 연결고리…… 그거 밝혀낼 수 있겠어?” 한 명은 죽어 버렸고, 다른 한 명은 해외도피 중이었다. 그런 둘 간의 범죄공모 혐의를 밝혀낸다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고개를 돌린 이은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의 한계가 거기까지인 듯싶었다. 그녀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 * * 며칠 뒤. 언론에서는 RS투자에 대한 후속 보도로 중요 인물인 김우진의 검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검찰은 RS투자의 실질적인 재무를 담당해왔던 김우진을 검거하고 그간의 횡령과 한국보험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비자금 조성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할 예정입니다!] 김우진의 선에서 덮겠다는 의도가 묻어 나오는 보도였다. “이번에 검찰이 어디까지 밝혀 줄지 모르겠네요.” 이진철이 그 보도를 보고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검찰이 결국 한승일 시장을 보호하려는 것에 강한 불만이 있었다. “우 실장이라는 청부살인업자는 입을 열었나요?” 강준의 맞은편에 있던 함 기자가 경찰의 수사 과정을 물었다. 셋은 을지로 골목의 한 포차에 모여 있었다. “도통 입을 안 여네요. 우발적으로 그랬다는데…… 어디 그게 통하는 얘기인가요?” 그 말에 강준이 반박했다. “아마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 법정 싸움을 하려고 할 겁니다. 판사야 법리적인 부분만 따질 테니 형량이 생각보다 안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최악이네요. 제가 어떻게든 전대성이랑 엮을 수 있게 해 보겠습니다. 청부살인혐의가 추가되면 검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죠.” 아직 해외 도피 중인 전대성에 대한 인터폴 수배도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청부살인이라…… 사람들이 관심 가지기에는 딱 좋은 꼭지네요…… 어차피 심층 기사를 써 봤자 메이저에서 받아써 주지도 않는데, 저도 이제는 남들처럼 자극적으로 써 보렵니다! 휴우…….” 오늘따라 자조적으로 말하는 함 기자였다. 그때 낯선 여자가 포차 문을 열고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박강준 씨, 저도 같이 합석해도 될까요?” “이분은 누구……?” 함 기자는 처음 보지만 강준과 이진철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김우진 씨 지인이라고 해야 하나?” “연인이라고 해두죠.” 박영미는 이제 김우진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다.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하려고요. 재식 씨한테 들었어요. 우 실장이 트럭으로 덮치려고 했다는 거 알려 준 사람이 강준 씨라면서요?” “태백에서 우 실장을 봤었거든요. 그때 트럭 번호를 확인해 둔 겁니다. 여기 있는 이진철 경감이 그 트럭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고요.” 강준은 공을 경찰인 이진철에게 돌렸다. “그럼 이진철 경감님께 감사의 말을 드려야겠네요.” “전, 제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나저나 김우진 면회는… 가 보셨나요?” “네. 의외로 홀가분하다고 하더라고요. 우진 씨가 마음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이진철이 그 말에 반박하며 김우진의 죄명을 읊으려 했지만, 강준이 그의 팔을 잡고는 말렸다. 이미 김우진은 법의 심판을 받고 있었다. 더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었다. “동현이는 좀 어떤가요?” “잘 지내요. 이사했어요. 태백으로요…….”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신 거군요.” “우진 씨가 출소하면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거예요. 전 그때까지 기다릴 거고요.” 박영미는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을 들었다. 강준은 소주병을 빼앗아 그녀의 잔을 직접 채웠다. “전대성 회장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아마……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거예요. 예전부터 그랬었거든요. 자기가 원하는 건 끝까지 놓지 않았죠.” “장부까지 나온 마당에 검찰에서는 전대성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데…….” “검찰에서도 겁이 나는 거예요. 전대성을 작정하고 털게 되면 다치는 사람이 한둘은 아닐 테니까요.” 강준이 회귀 전 겪었던 세계에서 박영미는 김우진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졌었다. 하지만 지금 강준의 눈앞에 있는 박영미에게는 나름의 희망이 남아 있어 보였다. ‘전대성은 못 잡았어도 나름 해피엔딩이군…….’ 강준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고는 혼자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진철이 강준의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우리 열심히 한 겁니다. 전대성 회장을 잡진 못했어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팔다리를 모두 잘라 버린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맞아요. 박강준 씨가 전 회장을 내내 괴롭혔었죠.” 예전의 적의를 버린 박영미가 건배를 제의했다. 강준은 당분간 전대성 회장의 존재에 대해서는 잊기로 했다. 이제 강준은 회귀 전 자신이 겪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맞닥뜨려야 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최창식 회장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성원그룹의 경영권이 최진태 이사에게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2008년 5월. 한국보험 강남지점. “네, 고객님. 해약하시겠다고요? 그게 지금 해약을 하시게 되면 해지환급금이 얼마 안 될 수 있어서요. 네 그럼 알아보고 연락을 드리죠.” 작년도 보험 판매왕 김미영은 고객 전화를 받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지점장을 찾아갔다. ‘길게 보자…… 보험왕 타이틀 유지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김미영은 입사 초기만 해도 고객이 해약한다고 하면 갖은 방법을 써서 해약을 막곤 했다. 하지만 영업 베테랑이 된 지금은 해약도 긴 영업의 한 과정이라 보게 되었다. 지점장실을 차지하고 있는 백상현은 거만한 자세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저 인간은 매번 바쁜 척은…….’ 김미영은 지점장이 설계사들의 실적으로 으스대는 꼴이 무척 아니꼬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티를 낼 이유는 없었다. “어? 우리 보험왕께서 웬일이야?” “고객이 해지환급금 알아봐 달라고 해서요. 상품명은 스타덱스 연금보험이고요.” “에이, 김미영 씨 요즘 자꾸 왜 이래…… 1년 이내에 해지하면 수수료 전액 환수되는 거 알면서.” “괜찮아요. 또 새로운 계약 하면 되죠.” 애써 당당하게 말하는 김미영이었다. 못 이긴 척 한참을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던 지점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 이거 해지환급금이 마이너스로 나오는데……?”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거 원금보장형 아니었어요?” “그거야 20년 계약 기간 다 채웠을 때고…… 그 전에는 손해가 날 수가 있잖아.” “5년만 납입하면 원금 보장되는 상품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백상현 지점장은 순간 낯빛이 변했다. “뭐야? 지금 고객한테 제대로 상품설명도 안 해 놓고 판매한 걸 회사 책임으로 돌리겠다는 거야?” 순간 김미영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얼마 전 퇴직한 동료 설계사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영아, 너도 회사 믿지 마. 고객한테 돌려줘야 할 돈을 결국은 우리 같이 힘없는 설계사들이 떠맡는 거야.]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보험설계사에게 청구되는 수당환수금! 고객에게 제대로 상품을 알리지 않고 판매한 불완전판매로 인한 고객보상금을 고스란히 보험설계사가 물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스타덱스 상품은 주가가 상승하면 이자를 주고 주가가 하락하면 이자 없이 원금이 유지된다고 했었잖아요? 저도 그렇게 본사에서 교육을 받고 판매를 한 거고요!” “아니 해지환급금은 운영비를 제하고 준다는 거 몰라? 운영비라는 게 뭐야? 상품 운용하면서 손실이 생기면 그것도 결국 운영비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김미영이었다. “요즘 연초보다 주식 떨어진 거 알지? 장이 안 좋을 때 해지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차라리 그러지 말고 고객한테 가서 좀 기다렸다가 해지하라고 해. 그게 서로 좋은 거 아니야? 고객도 손해 안 보고 김미영 플래너도 곤란해지지 않고.” 지점장의 말은 고객을 설득해 해지를 막으라는 거였다. 항상 써 오던 수법이었다. 하지만 원금보장이 안 된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는 김미영이었다. “그건 안 되겠어요……!” “뭐? 방금 뭐라고 했어?” 고압적인 눈으로 김미영을 쏘아보는 지점장이었다. “지금도 원금보장이 안 되는 데 앞으로도 그럴 거 아니에요. 20년 만기를 채우시던지, 아니면 해약하라고 하는 수밖에요…….” 김미영의 말을 듣고는 비꼬듯이 실실 웃는 지점장이었다. 그런 지점장의 모습이 김미영의 마음을 더 황폐하게 했다. 자신이 기댈 곳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든지, 대신 고객이 물어 달라는 돈은 회사에서 절대 책임 못 져 준다는 것만 알아두고!” “네. 알겠어요…….” “참나…… 판매왕 한번 달았다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쯧!” 회전의자를 획 돌리며 김미영을 외면하는 지점장이었다. 지점장실을 나온 김미영은 핸드폰을 꺼내 해지환급금을 물었던 김철수 씨의 번호를 찾았다. 김미영은 손실금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면 자기 수당에서라도 빼서 줄 생각이었다. ‘괜찮아. 김미영! 이런 거로 흔들리면 안 돼!’ 하지만 김미영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려오면서 시작되는 주가 폭락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또 다른 김철수 씨가 등장하는 건 시간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