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금고지기 김우진 (3)2022.02.19.
2008년 4월. 강남역 사거리 이은진 검사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만나자는 김우진 측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허종필 지검장에게 보고한 내용은 차명학 검사 측에 새어 나간 게 분명했다. 입수되지도 않은 장부를 자기 쪽으로 넘겨야 한다며 차 검사가 직접 윽박질렀기 때문이었다. “……검사님?” “박영미 씨?” 옆에 김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이은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차 검사의 검찰 수사관이 따라붙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장부는요?” “우리 우선 자리를 옮길까요?” 박영미는 한참을 인파 속으로 걸었다. 그리고는 사람들과 CCTV가 많은 대형서점의 매장으로 들어갔다. 책장으로 공간이 구획된 곳을 돌자 김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사님, 제 출국 금지는 풀었나요?” “출입국관리국에 연락해 봐요. 오늘 오전에 풀렸을 거예요. 하지만 명심해요. 언제든지 내 전화 한 통에 다시 출국 금지가 될 수도 있다는 거!” 김우진은 자신에게 목줄이 채워졌다는 걸 알고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검사님,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이 거래는 내가 결정합니다!” 둘 사이의 공기가 금세 경직됐다. 박영미는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며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알겠어요. 원하는 게 뭐죠?” “우리가 완전히 한국을 빠져나가면 그때 장부를 넘겨드릴 겁니다.” “그 뒤에 입을 싹 닦으면요?” “언론에 터트리세요. 내가 장부를 가지고 있다고요!” 이은진이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그렇게 되면요……?” “제일 먼저 전대성 회장과 연루된 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중 누구라도 절 찾겠죠. 그 누가 절 찾게 되더라도 전 죽은 목숨입니다.” 김우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차라리 장부가 검찰의 손에 있는 게 본인에게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말이었다. “그럼 장부는 어떻게 넘겨주겠다는 거예요?” “장부가 있는 곳을 검사님께 전화로 알려드릴게요. 제가 말한 곳을 찾아보시면 장부가 있을 겁니다…….” 나름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 김우진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이은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검사님, 저흰 오늘 밤 출국합니다……. 약속하신 대로 별문제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김우진의 표정에서는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이 상황을 다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김우진 씨를 한번 믿어 보도록 하죠!” 김우진은 이내 박영미와 함께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을 뒤쫓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전대성 회장의 사주를 받은 우 실장이었다. 몇 블록이 떨어진 빌딩의 주차장. 김우진은 주변을 경계하며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서야 김우진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우리 이제 인천으로 가면 되는 건가?” “왠지 너무 조용한 거 같지 않아? 이은진 같은 말단 검사가 단독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우릴 속인 건가……?” 김우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불안감을 떠안은 채 김우진은 인천으로 핸들을 틀었다. 그때 박영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박영미 씨? “누구시죠?” ―설마 동현이를 두고 어디 가시려는 건 아니죠? “너 누구야? 누군데 우리 동현이를 알아?” 전화는 그렇게 뚝 끊겼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입술을 바르르 떠는 박영미였다. 둘은 잠시 침묵했다. “재식 씨한테 전화해 봐야겠어!” “일단 연남시로 가자. 그리고…… 동현이도 데리고 가자고!” 김우진은 결단을 내렸다. 박영미의 아들인 동현을 내버려 두고 가는 것이 더 위험할 것 같았다. 핸들을 쥔 김우진은 인천이 아닌 연남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김에 장부도 찾아와야겠어. 우리 목숨줄이 달린 거잖아.” 하지만 그건 김우진을 처리하기 위한 우 실장의 계략이었다. 김우진의 차가 연남시로 들어가는 IC를 지났을 때, 뒤에서 우 실장이 모는 2.5톤 트럭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번암교차로에 다다랐을 때, 트럭은 드디어 속도를 냈다. 운전석에 앉은 우 실장은 이를 드러내고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부와아앙! 부아아앙! 하지만 그 순간 때를 기다렸다는 듯, 한 무리의 트럭들이 교차로 우측에서 나타났다. 그 트럭들은 번암주류의 주류배송 차량이었다. 번암주류의 트럭들은 김우진의 차량과 우 실장의 트럭 사이를 가로막았다. 끼이이익! 터엉! 커다란 충격음에 뒤이어 트럭과 트럭들이 뒤엉켰다. 번암주류의 차량에서 내린 장재식이 조심스럽게 우 실장의 트럭으로 다가갔다. “영철아, 넌 거기 있어!” 직원인 우영철이 자신을 도우려 뛰어오자 떨어져 있으라 경고하는 장재식이었다. 상대가 칼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텅! 우 실장이 탄 차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민머리의 우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누구니?” “번암주류 사장이다. 이 새끼야!” 피식 한번 웃어 보인 우 실장은 트럭에서 뛰어내리면서 칼을 휘둘렀다. 칼끝이 장재식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싸움은 실전이었다. 아무리 해결사로 활약해 온 우 실장이지만, 개처럼 뒤엉켜 싸우는 싸움에는 장재식도 일가견이 있었다. 장재식은 앞발로 우 실장의 가슴을 뻥 차고는 그가 칼을 쥔 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근거리에서 긴 칼날은 오히려 방해 요소였다. 땡그랑! 손목을 잡힌 우 실장이 정강이를 가격당하고선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식한 쇠스케 새끼! 죽으라!” 반격을 시작한 우 실장은 뒷주머니에서 짧은 잭나이프를 꺼내 장재식의 발등을 찍었다. “아아악!” 장재식의 비명이 들리자 지켜보고 있던 우영철과 번암주류의 직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중 우영철은 정확히 우 실장의 턱을 발로 가격했다. 쪽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우 실장의 잭나이프는 땅에 뒹굴었고, 우 실장 역시 바닥에 짓눌린 채 발길질을 당했다. 그렇게 청도의 해결사 우 실장은 장재식의 손에 완전히 제압당했다. * * * 번암주류 사무실. 강준은 장재식에게 맡겨졌던 10살 아이인 동현을 옆에 앉힌 채, 박영미와 김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현아! 엄마가 미안해!” 박영미는 동현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김우진은 강준에게 입을 열었다. “……트럭이 우리를 덮치려고 했어요…… 다행히 피할 수 있었지만요…….” “그게 우연히 피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그럼?” “여기 장재식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손을 쓴 겁니다.” 김우진은 장재식이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김우진은 박영미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자기야…… 자기는 그냥 여기 남아.” “혼자 가겠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 같아…… 돈은…… 정리되면 보내 줄게.” 박영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 씨, 진짜 이대로 도망갈 겁니까?” 강준이 김우진을 도발했다. “그럼 나보고 도망가지 말고 이대로 당하고 있으라는 거야? 난 전대성 회장이 시키는 대로 한 거밖에 없어!” “시키는 대로 했다고 그게 죄가 아닌 건 아니죠.” 김우진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그는 우 실장이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온 일 때문에 검찰을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장부 여전히 뉴월드 상가 사무실에서 있습니까?” “뭐? 그걸 네가 어떻게……!” “뉴월드 상가 사무실 맞죠?” “……확인해 봤으면 알 거 아니야!” “전 김우진 씨의 결정에 맡길 겁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장부를 검찰에 넘기고 법의 심판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쫓기면서 도망치실 겁니까?” 그때 밖에서 우 실장을 막던 장재식과 직원들이 들어왔다. “박강준 씨! 우 실장이 도망쳤습니다!” “네? 아까 완전히 제압되지 않았었나요?” “묶은 줄을 끊고 도망치더라고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그 말을 들은 김우진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동현을 안고 있는 박영미를 향해 말했다. “자기야…… 나 지금 가 봐야 할 거 같아. 여…… 연락할게!” “우진 씨, 그러지 말고 우리 검찰로 가자. 어차피 재판받아 봐야 형량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을 거야…….” “……아니야, 아니야. 갈 수 있어…….”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한 김우진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준은 그런 김우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공항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우 실장이 김우진 씨가 출국하리라는 걸 알고 거기서 기다릴 거라고요!” “……비켜!” 김우진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미 결심이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강준은 김우진을 이대로 놓친다면 그가 살해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로 혼자 가면 당신 죽어!” 발걸음을 멈추고 강준을 한번 돌아본 그는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도 김우진을 억지로 말릴 수는 없었다. * * * 인천항 여객터미널. 김우진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출국하게 되면 검찰에 정보가 흘러가게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김우진은 먼저 용성물류라는 곳에 들러 가짜 여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한국을 빠져나갈 셈이었다. 장부는 차량의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점점 날이 밝아지고 있을 때, 김우진은 여객터미널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가 손에 든 서류 가방에는 위조여권과 비자금을 넣어 둔 해외계좌의 카드, 그리고 10만 위안의 외화가 들어 있었다. 김우진은 뚜벅뚜벅 여객터미널 내부로 걸어갔다. 눈앞에 보이는 출입국 심사대를 지나기만 하면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게 끝나는 일이었다. 10년이 넘게 전대성 회장을 따라다녔던 시절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온갖 더러운 꼴들을 보면서 매 순간 라성캐피탈을 떠나는 순간을 생각했었지만, 정작 떠나는 순간이 오니 아쉬움이 남았다. 결론은 배신자였지만, 오랜 시간 참아 왔던 보람이 있었다. 그의 해외계좌에는 500만 불의 비자금이 들어 있었다. “그래…… 이건 내 인생에 대한 보답이야! 흐흐!” 김우진은 위조여권을 한 손에 쥐고 출입구 심사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김우진의 옆구리에 칼날을 뽑아 들었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여객터미널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잠복 경찰이 칼을 빼든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체포된 남자는 전대성의 사주를 받은 우 실장이었다.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잠복 경찰은 강준이 정보를 알려 준 이진철 경감이었다. 그는 우 실장을 체포하자마자 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 실장이라는 놈! 잡았습니다! 박강준 씨 덕분에 또 한 건 했네요!” ―저야말로 결정적일 때마다 경찰의 도움을 얻어 고맙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쪽으로 오실 겁니까?” ―아닙니다. 전 검찰청으로 갈 겁니다. 나중에 또 연락드리죠. 강준은 여객터미널 주차장에 있던 김우진의 트렁크에서 전대성의 뇌물 장부를 찾아냈다. 그 모든 게 강준이 번암주류에서 읽었던 김우진의 기억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