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금고지기 김우진 (2)2022.02.18.
양태식은 우 실장을 태우고 연남시 외곽의 한 공터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양태식이 미리 준비해 둔 2.5톤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대포차니까 사용하시고 아무 데나 버리시고 가면 끝! 아주 깔끔하죠?” “이거 받으시오.” 우 실장은 돈다발이 든 가방을 양태식에게 건넸다. 양태식은 가방을 열어 돈다발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정말 이걸로 누구를 작업하시려는 겁니까?” 양태식의 말에 우 실장은 뒤돌아서 그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쓸데없는 말 말라! 죽고 싶지 않으면.” “……에헤이! 그냥 한번 물어나 본 거예요. 같은 편끼리 뭘 그렇게 살벌한 말씀을 하실까…… 좌우간 이 돈은 어디서 바꾸면 되는 거예요? 중국 돈은 위조지폐가 많다던데…… 이거 진짜 맞죠?” 우 실장은 대답 대신 양태식을 다시 빤히 노려봤다. “아…… 알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갑니다.” 얼른 자신의 스포츠카에 올라타고 시동을 건 양태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양태식이 출발하려고 하자 운전석 창문에 손을 짚은 우 실장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지저귀고 다니면 알지비?” “그…… 그럼요. 걱정 놓으세요. 전 돈 받았으면 끝이니까……!” “처 알아먹었으면, 쓰잘떼기 없는 말 말고 얼른 가라!” 부릉~ 부우웅! 양태식이 사라지고 나자 우 실장은 지갑 속의 종이를 꺼내 거기 적힌 주소지를 확인했다. 그곳은 박영미가 출몰한다는 태백의 한 호텔 카지노였다. * * * 번암주류 사무실. “사장님, 누가 오셨는데요?” 우영철은 창고에 있던 장재식에게 사무실로 누가 찾아왔다는 걸 알렸다. “누군데?”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분인데, 여자분이세요.” “알겠다. 이거만 하고 들어갈 테니까 차나 좀 내드리고 있어.” “네. 사장님!” 장재식은 맥주 상자를 트럭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내일 나갈 물량이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번암주류의 사업은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게 장재식의 전부였다. 하지만 갑자기 그를 찾아온 사람은 장재식의 평온한 감정에 파동을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재식 씨, 여전하네.” 어느새 장재식의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골드의 사장이었던 박영미였다. “어! 너 언제 왔어? 여긴 어쩐 일이고?” 둘은 한때나마 연인관계였다. 장재식이 건달 생활을 청산하고 주류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남몰래 도와줬던 것도 바로 박영미였다. “작별 인사하러 온 거야. 나 이제 외국 가.” “외국 어디?” “그건 나중에 가르쳐줄게. 마지막인데 재식 씨한테 인사는 하려고, 그간 고마운 것도 있었고.” “아직도 김우진 그 녀석하고 같이 있는 거야?” 장재식의 물음에 박영미는 희미한 웃음만 지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떠났던 장재식이었다. 그런 그는 한 번도 박영미의 사생활에 대해 추궁해서 물은 적이 없었다. “왜, 인제 와서 그런 걸 물어?” “어차피 골드도 접었다며? 동현이랑 남들 모르는 데 가서 살아. 굳이 이제 연남시에서 있을 이유도 없잖아.” 동현은 박영미가 사별한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남몰래 키우던 아들이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외부에 노출하지 않았었다. “염치없지만 그래서 재식 씨한테 부탁하려고 온 거야.” “뭘 부탁해? 하지 마. 나 하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그러지 말고 동현이 잠깐만 좀 맡아줘. 동현이도 재식 씨 잘 따르잖아.” 장재식은 본능적으로 박영미가 위험한 일을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언제까지?” “얼마 안 걸려, 나 외국 가서 자리 잡을 때까지만.” 장재식은 땅바닥을 보며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박영미의 처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 회장 검찰에 쫓긴다며? 김우진 그 인간도 같이 쫓기는 거지? 그래서 도망가는 거고.” 장재식은 세간의 소식을 대충 들은 바가 있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맞아, 나 도망가는 거야. 근데 우리 동현이 버리고는 안 갈 거야. 그러니까 재식 씨가 잠깐만 맡아줘.” “알았어…… 지금 애는 어디 있는데?” “내가 내일 여기로 데려올게. 애한테는 출장 간다고 해놨어.” “너 지금 혹시 태백에 있냐?” 태백은 박영미의 고향이자 전 남편과 함께 살던 곳이었다. 박영미는 재식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차명학 검사가 자신과 김우진을 쫓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밥이나 먹고 가라.” “아냐, 나 지금 가봐야 해.” “바쁜 척은…… 알았다. 가봐.” 장재식은 박영미가 번암주류를 빠져나갈 때까지 묵묵히 배웅했다. 하지만 차가 빠져나갈 때, 차량을 막고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영미야, 너 외국 꼭 가야 하냐?” “왜? 나한테 미련이라도 남은 거야.”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박강준이 찾아왔었다. 영미 너 어디 있는지 아냐고?” “그래서 알려줬어?” “알려줬겠냐?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도망가서 잘 살 수 있겠냐고?” 따져 묻는 장재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재식을 지그시 바라보던 박영미는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괜찮아. 내 인생 항상 이래왔어. 근데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그렇게 넘겼었고. 이번에도 아마 그럴 거야.” 박영미는 다시 차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박영미의 차를 장재식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번암주류를 빠져나간 박영미의 차량을 또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며칠째 번암주류의 입구에서 잠복하고 있던 보험조사관 박강준이었다. * * * 정선 카지노. 술에 취한 김우진은 몇 시간째 카드 도박에 빠져 있었다. 멍한 눈동자는 오로지 딜러가 건네는 카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전대성 회장으로부터 장부를 내놓으라는 협박 전화를 받고 난 직후부터 김우진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시발! 또 꽝이네!” 카드를 뒤로 엎은 김우진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모를 박영미가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진 씨, 많이 땄어?” “언제 온 거야? 일은 어떻게 됐어?”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난 김우진은 불안한 눈동자로 그녀를 휴게실로 데려갔다. “출금 금지 풀어준대.” 박영미는 모든 일이 다 잘됐다는 듯 싱긋 웃었다. 덩달아 김우진도 한고비 넘겼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부는 우리가 직접 남부지검으로 들고 들어가기로 했어.” “괜찮을까……?” “오히려 보는 눈이 많으니까 장부가 아예 묻혀 버리지는 않을 거야. 이은진 검사도 말단이긴 하지만 검사는 검사잖아.” “아니야…… 전 회장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그냥 우리도 밀항하자! 그게 깔끔해!” 미세하게 어깨를 떠는 김우진이었다. “우진 씨, 정신 차려! 이제 마음 굳게 먹어야 해. 밀항해서 얼마나 살 수 있을 거 같아. 금방 잡혀! 좀 위험해도 합법적으로 나가는 게 낫다고.” 김우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내 짐을 챙기려 원래 자신이 앉았던 테이블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우진이 맡아둔 테이블에는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보험조사관 박강준이었다. “김우진 부장님, 잘 지내셨죠?” 강준의 얼굴을 확인한 김우진은 얼른 주변부터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잡으러 경찰이나 검찰 수사관들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였다. “……혼자 왔어요. 걱정 놓으세요.” 뒤늦게 다가온 박영미가 날카롭게 물었다. “재식 씨가 알려줬나요?” “아니요. 박영미 사장님 차량을 쫓아온 겁니다. 보험조사가 원래 잠복 업무가 대부분이거든요.” 번암주류에 잠복해 있던 강준은 박영미가 한 번은 장재식을 찾아오리라 생각했었다. 강준은 회귀 전 기억 속에는 박영미의 아들 동현이 결국 장재식에게 맡겨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준은 번암주류의 입구에서 잠복했던 것이었다. “이은진 검사한테 장부는 넘기기로 했잖아요! 여기서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따라붙은 사람이 있어요. 저도 청도에서 만났던 사람인데, 아마 전대성 회장이 보낸 사람이겠죠. 이곳 태백까지 따라왔더군요.” 강준의 말에 김우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라성캐피탈에서 일해 오면서 전대성이 얼마나 냉혹한 인간인지를 몸소 겪어 오고 있었다. “영미 씨! 우리 지금 큰일 난 거야! 그 인간은 자기 앞길 막는 놈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죽였거든! 젠장! 당장 도망가야 해!” 충혈된 눈으로 소리치는 김우진이었다. “이 차를 타고 가요. 그리고 장부 건네줄 때, 남부지검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약속장소를 바꾸세요. 검찰이 아는 건 전대성 회장도 안다고 봐야 합니다.” 강준은 자신의 차 키를 김우진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머뭇거리는 김우진의 손을 강준이 붙잡았다. 강준의 눈앞에는 김우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곳은 빈 사무실이었다. 낡은 공간의 낡은 책상 서랍에 김우진은 뭔가를 넣고는 자물쇠를 채웠다. 그건 전대성의 스모킹 건인 뇌물 장부였다. 사무실을 나온 김우진은 서둘러 문을 잠그고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곳은 강준이 익히 알고 있는 연남역 맞은편에 위치한 뉴월드 상가의 3층 복도였다. 아직 뉴월드 상가의 관리권은 RS투자에 있었다. RS투자에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그곳 사무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뉴월드 상가! 거기에 숨겨둔 거였군……!’ 강준은 기억을 읽은 후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는 차 키를 손에 든 김우진이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우진 씨, 나 동현이부터 먼저 데리러 가야겠어!” “……어, 그래. 알겠어.” 박영미의 말에 정신을 차린 김우진이었다. “장부…… 뉴월드 상가에 있죠?” “……뭐?” 장부가 있는 곳을 정확히 짚은 강준의 말에 놀란 눈을 크게 뜨는 김우진이었다.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당최 알지 못했다. “당신 뭐야……? 여긴 왜 온 거야?” “출국 정지가 풀렸다고 해서 김 부장님에 대한 수사가 중단되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여러 혐의로 수사대상에 오르실 거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김우진이었다. “장부를 제출하고 검찰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시죠. 그리고 죄가 있다면 그 죗값을 그냥 받으세요. 어쩌면 전대성의 혐의를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김우진 당신이니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 나보고 죗값을 받으라고? 몇 년을 감방에서 썩으라고?” “몇 년 징역을 살더라도 한국에서 떳떳하게 사는 게 낫지 않나요? 평생을 도망자로 떠도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몰아붙이는 강준의 말은 김우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도망쳐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알겠으니까 비켜! 우린 나가야 한다고!” 강준은 김우진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카지노 입구에서 전대성이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지 말고 곧장 지하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제 차를 찾으세요.” 우 실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는 강준의 충고였다. 김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박영미와 함께 사라졌다. 홀로 남은 강준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진철 경감님, 차량 수배 부탁드립니다. 58소 284X 덤프트럭입니다. 우 실장이라는 조선족 해결사가 타고 있고요. 아마 교통사고를 위장해 김우진을 해치려 하는 거 같습니다.” 이로써 강준은 회귀 전 김우진이 교통사고로 살해당했던 사건을 막아 낸 셈이었다. ‘이제 우 실장을 잡으러 가 볼까?’ 청도에서 진 빚을 갚아 줘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