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9. 금고지기 김우진 (1) (79/250)

079. 금고지기 김우진 (1)2022.02.17.

박영미의 등장에 김종문은 무척 당황했다. 잘못하면 보험사기 공모에 대한 혐의뿐만 아니라 이미 검찰 기소 중인 전대성과 연루된 추가적인 혐의까지 재판 중에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문 사장은 저희 가게에 자주 왔어요. 전대성 회장하고도 함께 만났던 걸 몇 번 봤고요.” “피고 김종문은 그럼 전대성을 통해서 김다혜를 소개받은 건가요?” “네, 전 그런 거로 알아요.” 졸지에 전대성과의 유착관계가 되어 버린 김종문이었다. “저도 전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재력가라길래 사업적으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만났던 것뿐이고요!” 김종문의 말은 사실이었다. 부동산 거부였던 김종문은 자신의 돈을 굴릴 곳을 찾아 전대성에게 기웃거렸던 것이었다. 물론 결과는 사기죄로 법정에 서게 됐지만 말이었다. 땅! 땅! 땅! “피고 자리에 앉으세요! 김다혜 피고에게 묻겠습니다. 증인의 말이 사실입니까?” “……네. 전 회장이 저한테 김종문과 같이 투자할 만한 사업을 찾아보라고 했어요.” “그 이후에 피고는 김종문과는 내연관계로 발전한 겁니까?” “……같이 어울려 다닌 건 사실이지만, 내연관계는 아니었어요.” 한 명이 부인하면 다른 한 명이 증명할 수 없는 말이었다. 김종문의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재판장님 예상치 못한 증인의 등장으로 피고를 변호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회를 요청합니다!” “인정합니다.” 정회 후, 증인석의 박영미는 피고인석의 김종문에게 다가갔다. 보석금을 내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김종문과 다르게 나머지 둘은 구치소로 돌아가야 했다. “치사하게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주변 좀 챙기죠?” “하하! 미쳤어? 날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려고 했던 여자를 내가 왜 책임져야 하는데?” 김종문의 대꾸에 박영미는 김다혜 쪽을 바라봤다. 김다혜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외면했다. 김다혜의 부탁으로 증언석에 서긴 했지만, 박영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채원아, 난 할 만큼 했다.” 박영미는 김다혜에게 그 말을 남기고는 재판정을 나갔다. 한때, 박영미까지 무시하며 전 회장을 등에 업고 잘 나가던 김다혜였지만, 한순간에 고꾸라진 격이었다. 전대성 회장도 사라져 버렸으니 그녀의 뒤를 봐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게, 김 사장이라도 잘 붙잡고 있으라니까…… 쯧쯧!” 박영미는 구치소로 끌려나가는 김다혜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박영미에게 강준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우리가 어디서 봤더라……?” “가스 폭발 사건 제보해 주셨잖아요?” 강준은 가스 폭발 사건의 제보자로 박영미를 찾아갔었던 때를 언급했다. 그때 박영미는 자신이 제보자임을 부인했었다. “아! 그 보험사 직원. 이번 사건도 당신이 조사한 거예요?” “네, 공교롭게도 박영미 씨 주변 인물들이 또 보험사기에 연루됐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저를 조사해 보시려고요?” 박영미는 강준의 말을 비꼬듯이 맞받아쳤다. “아니요. 이번에는 진짜 협조를 구하고 싶습니다.” “호호, 내가 박강준 씨와 협조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저 가게 정리했어요. 더는 전대성 회장과 엮일 일도 없고요.” 강준의 말에 더 대꾸할 게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는 박영미였다. “김우진 부장, 아니 아직 대표인가요? 워낙 직책이 많아서 말이죠. 어쨌든…… 지금 박영미 씨와 같이 있지 않나요?” 김우진을 언급하는 말에 박영미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죠?” “김우진 부장이 전대성 회장의 장부 가지고 있죠? 어디에, 누구에게 뇌물을 뿌리고 라성캐피탈 시절부터 빼돌렸던 법인 비자금 내역도 모두 적혀 있는 장부요.” 장부를 언급하는 강준의 말에 정작 놀란 건 그의 옆에 있던 광역수사대 특수경제과에 근무하고 있는 이진철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난 전혀 모르겠네……. 김우진이 어디 있는지도 내 알 바 아니고요! 난 이만 가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홱 돌아서는 박영미였다. 강준은 그런 박영미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박영미의 신경질적인 반응과는 별개로 강준은 그녀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전 회장이 장부를 빼돌린 걸 눈치챈 거 같아…….] [우진 씨, 그거 넘겨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우진 씨한테 전부 뒤집어씌울 거야.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잖아.] […….] [뭘 고민해? 자기가 빠져나갈 방법은 한 가지야. 그 장부 검찰에 넘겨!] [차명학 검사를 믿을 수 있을까? 지금은 전 회장 쪽을 턴다지만…… 오히려 뒤로는 도와주고 있을걸.] 우유부단하게 고민하는 김우진 부장의 모습이 강준이 읽은 기억의 끝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로 차명학 검사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차명학 검사를 언급하는 강준의 말에 박영미는 놀란 눈빛이었다. “이거나 놔요! 불쾌하군요!” 팔을 홱 빼며 돌아서는 박영미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모두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보험조사관이라는 박강준을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면 보험조사관 박강준은 끊임없이 전대성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을 추적해왔기 때문이었다. * * * 2주 후, 사건 선고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 법정. “해당 사건은 사회의 공적 자원인 보험 체계를 무너뜨리는 엄중한 위법행위로 함께 범행을 공모한 피고 김다혜, 김종문, 변재문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다.” 판사는 세 명의 고미술품 보험사기범에 대해 똑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김종문에게 고액으로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사건은 이미 검찰 수배 중인 전대성 회장과 김종문의 관계에까지 확대될 기미였기 때문이었다. 불구속 상태였던 김종문은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에 의해 끌려나갔다. “제기랄! 난 꽃뱀한테 물렸을 뿐이라고!” 김종문은 끌려나가면서 자신과 범행을 공모한 채원을 원망했지만,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었다. 재판이 끝나고 텅 빈 방청석에는 강준에게 연락해 왔던 박영미가 앉아 있었다. 강준은 그녀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결정은 하셨어요?” “먼저 조건을 말하죠. 우진 씨, 출국 정지를 풀어주는 조건이에요.” 박영미는 강준과 함께 온 이은진 검사를 살폈다. 그녀는 송종철에게 살해된 김재관 검사와 함께 전대성 회장과 한승일 시장의 유착관계를 내사했던 장본인이었다. 지금은 한승일 라인인 차명학 검사 때문에 전대성의 수사 선상에서 밀려나 있긴 했지만, 진짜 전대성을 잡으려는 검사는 차명학이 아니라 바로 이은진이었다. “그건…… 검찰 내부적으로 한번 논의해 보죠. 그런 사법 거래는 일개 검사의 선에서 약속해 드릴 수 없는 사안이니까요.” 무척 솔직하게 말하는 이은진 검사였다. “김우진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걸 알려줄 순 없죠. 출국 정지 해제가 먼저예요.” “그 장부 확실히 보관하고 있는 거 맞죠?” 이은진이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다. 박영미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이은진을 쏘아보았다. “믿고 안 믿고는 그쪽이 선택할 문제예요. 우린 우리에게 협조해 주는 쪽에 붙을 거고요.” 하지만 박영미는 내심 차명학 검사가 더 두려웠다. 전대성이 밀항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전대성이 인천항을 통해 청도로 밀항에 성공했어요. 검찰에서 일부러 보내준 거 아닌가요?” 이은진 검사는 속으로 난감했다. 그녀도 전대성이 밀항했다는 사실을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건…… 장부에 적힌 대로 수사를 하게 되면 전대성 회장은 어디에 있건 국내로 송환될 거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김우진 씨는 본인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서만 죗값을 받으면 되는 거고요.” “아까 내 말 못 들었어요? 우진 씨는 해외로 나가기를 원해요. 전대성 회장처럼 밀항이 아니라 정식으로 출국 도장을 찍고요……!” 박영미의 말은 김우진이 수사에 협조해 주는 대신 완전한 사면을 요구한다는 거였다. 이은진은 머뭇거렸다. “박영미 씨, 이 검사님에게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은진 검사 대신 강준이 답했다. 밀항한 전대성을 국내로 송환하려면 김우진의 장부가 꼭 필요했다. “두 분께 한번 기대해 보기로 하죠.” 박영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준이 악수하려 하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만지려 한다는 걸 알고는 먼저 피했다. 자리에 남은 강준에게 이은진이 날을 세워 물었다. “박 과장님도 전대성이 밀항했다는 걸 알았어요?” “……아뇨.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근데 정말 차명학 검사가 밀항을 도왔을까요?” “잡을 수 있었는데 그냥 방관한 거겠죠. 차 검사는 절대 나중에 문제가 생길 일을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이은진은 생각이 복잡해진 듯했다. 김우진의 출국 금지 해제를 위해선 검사장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인천항 여객터미널. 칭다오에서 도착하는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커다란 짐꾸러미를 짊어진 따이공(代工)들이 우르르 배에서 내리고 난 후, 마지막으로 한 사내가 익숙한 듯 배의 출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평범한 한국 중년 남자처럼 등산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간단한 배낭을 메고는 출입구 심사대를 향해 걸어갔다. 출입구 심사대에 오른 그는 주머니에서 붉은색 커버의 중국 여권을 손에 쥐고 나머지 물품들을 바구니에 쏟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민머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는 청도에서 최기동과 강준을 해코지하려 했던 우 실장이었다. 출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온 우 실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방금 인천에 들어왔슴다.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우 실장은 짧은 통화를 마치고는 여객터미널을 빠져나와 맞은편 길가의 차량으로 향했다. 그 차량은 강준이 고병훈의 렌트카 업체에서 빌렸던 개조된 스포츠카였다. 그리고 그 스포츠카를 몰고 온 이는 도망자 양태식이었다. 노숙자들을 데리고 보험사기 행각을 벌였던 양태식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다. 그런 그에게 오랜만에 큰 건수가 하나 들어온 거였다. “양태식 씨?” “오! 우 실장님 되십니까?” “내가 맞소.” “타시죠. 제가 준비를 다 해놨습니다.” 양태식은 전대성 회장으로부터 우 실장이 지낼 숙소와 그가 작업에 사용할 2.5톤 트럭을 한 대를 수배해 두었다. 차를 출발시킨 양태식은 궁금한 게 많았다. “전대성 회장님은 잘 계시죠?” “잘 있슴다.” “근데, 어쩐 일로 칭다오에 가 계신 겁니까…… 연남시에서도 잘 안 보이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양태식은 도망자 신세라 전대성 회장의 RS투자가 검찰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건 나도 모르오. 나야 전 회장이 시키는 일만 할 뿐이니까.” 말을 짧게 끊는 우 실장이었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저기…… 그럼, 잔금은 트럭만 건네 드리면 직접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속고만 살았소. 여기 돈 있으니까. 걱정 놓으시오.” 우 실장은 배낭의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현금 뭉치를 꺼내 양태식에게 보였다. 그건 붉은색의 100위안짜리 중국 지폐 한 다발이었다.

16555209036432.png

1655520903643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