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고미술품 보험사기 (5)2022.02.16.
구) 나진패션 사무실 출소한 이석진은 그곳을 다시 찾았다. 탑스퀘어는 이미 중국 자본에 팔려 서울의 본사는 상하이로 옮겨간 지 한참이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사무실이었지만, 이석진은 얼마 전 다시 그곳을 임대했다. 전대성의 RS투자에 나진패션을 팔 때, 남겨 두었던 유일한 부친의 유산이 바로 편직공장이었다. 개발 제한 구역에 묶여 있어서 전대성이 인수를 거부했던 덕분에 오히려 지금의 이석진에게 그 공장이 남겨질 수 있었다. 이석진은 그 편직공장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했다. 외부 투자금 따위에 목메지 않고 원단에서부터 차근차근 사업을 꾸려 나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원단을 판매하는 영업소로 나진패션의 예전 사무실을 다시 임대한 것이었다. “대표님, 저기…… 최 과장이…….” 옛 나진패션 시절부터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했던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이 대표의 방으로 들어와 말을 꺼냈다. “어? 누구?” “최기동 과장이…… 왔는데요.” 이석진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가 기억하는 최기동은 자신을 배신하고 라성캐피탈에 붙어서 나진패션을 침몰시켰던 장본인이었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보험사기로 수감생활을 겪었던 최기동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이석진도 궁금했다. “……들어오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대표이사실에 들어온 최기동의 모습은 초췌했다. 먼저 허리를 숙인 최기동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표님.” “……자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기를 찾아와?” “면목 없습니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이석진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왜 온 거야. 여기는?” “실은…… 용서를 빌러 왔습니다…….” 이석진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최기동이었다.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용서해 주면 지금 뭐가 달라지나?” 냉담하게 반응하는 이석진에게 최기동은 조심스럽게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일명 CD로 불리는 무기명 채권이었다. 스무 장의 무기명 채권에는 각각 1억 원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20억입니다. 이걸로 나진패션을 다시 되살려주십시오! 대표님이 새로 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돈! 출처가 어디야? 내가 이런 걸 주면…… 덥석 받으리라고 생각했어?” 갑자기 거액을 내미는 최기동을 이석진 대표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무기명 채권입니다. 어차피 나진패션을 매각할 때 헐값에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때, 받아야 했을 매각대금 일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국에 자금 출처에 대한 해명에도 문제가 없을 거고요…….” 20억이라는 돈은 김종문이 도자기 사기극에 휘말려 변 선생에게 보낸 도자기 구매 대금이었다. 강준은 그 구매 대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무기명 채권으로 바꾼 것이었다. “글쎄, 생각을 좀 해 봐야겠는데…….” “이 대표님, 대표님이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진심입니다!” “알겠네…… 이만 돌아가 봐.” 냉담한 이석진의 반응에 머뭇거리던 최기동이 망설이듯 말을 내뱉었다. “실은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거긴 한데…… 보험조사관 박강준 아시죠?” 이석진의 기억 속에 강준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끝까지 라성캐피탈을 믿지 말라고 충고했던 박강준이었다. ‘그 말을 들었으면…… 어쩌면 나진패션은 헐값에 팔리지 않고 회생했을지도 모르지.’ “알지. 그래서?” “실은 이 돈…… 박강준이 절 죽이려고 했던 놈들에게 합의금 조로 받아 준 겁니다. 그리고 이 돈을 가지고 이 대표님께 가라고 한 것도 박강준이었고요.” 최기동은 그간의 자초지종을 이석진에게 설명했다. 우 실장에게 최기동의 폭행을 사주한 건 변 선생만이 아니었다. 최기동이 채원을 따라다니고 있다는 걸 안 김종문이 청부살인을 의뢰하면서 10만 위안을 선뜻 내놓았던 거였다. 강준은 김종문이 도자기 대금을 변 선생에게 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돈을 가로채고는 역으로 김종문을 찾아갔다. 그리고 청부살인에 대한 걸 파헤치지 않는 대가로 김종문이 채원에게 작업당한 20억 원을 합의금으로 받아 냈던 것이었다. 20억 원은 부동산 부자인 김종문에게 몇 년간의 수감생활과 맞바꿀 정도로 큰돈은 아니었다. “참나…… 그런 일이…….” 최기동의 설명을 듣고 난 이석진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한참을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했을 때, 최기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박강준이 널 설득했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나를 찾아온 건 네 선택일 거다. 넌 이 무기명 채권을 가지고 그냥 도망갈 수도 있었어…….” “…….” “근데도 나를 찾아왔다는 건 너도 진심이 있었다는 거고.” “……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석진은 최기동의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근데, 진짜 네가 나진패션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다면 이런 돈만 가지고서는 내가 널 용서해 줄 수가 없겠다.”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해합니다.” “진짜 용서를 빌려면 최 과장 네가 다시 나진패션에 합류해라. 그래서 진짜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그게 나한테 진짜 용서를 비는 방법이야!” 이석진이 그렇게 나올 줄은 차마 모르고 있었던 최기동이었다. 하지만 최기동 역시 생각해 보니, 출소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채원에 대한 복수심으로 모든 게 채워져 있던 과거였다. 최기동은 이제 진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시점에 놓인 거였다. 그런 타이밍에 이석진은 생각하지 못했던 제안을 해 준 거였다. “……대표님!” 최기동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 두 가지의 감정이 뒤섞인 최기동은 차마 먼저 합류하겠다는 대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뭔가가 왈칵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의방화 보험사기로 전과자 신세인 두 남자는 마주 보며 서로의 감정을 나눴다. 나진패션의 진정한 재건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 법정. 고미술품 보험사기에 대한 재판은 한 달째 이어져 가고 있었다. 피고인석에는 김종문과 변 선생이라 불리던 변재문, 그리고 한때 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김다혜가 앉아 있었다. 검사의 질문이 시작됐을 때도 그들은 서로 눈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피고 김다혜는 변재문에게 허위 위조감정서를 부탁한 적이 있지요?” “……네.” “그리고 내연관계이던 김종문에게 부탁해 위조품인 걸 알고도 거액의 허위 거래를 성사시켰죠?” “……네.” 순순히 보험사기를 인정하는 김다혜였다. 그녀는 공범인 김종문과 변재문이 범행 일체를 자백하는 상황에서 달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방청석에서 강준이 이진철 경감과 함께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 정말 어떻게 설득한 겁니까?” “창고에서 도난당했다던 도자기가 튀어나왔으니까요.” “뭐 막말로 창고에서 직접 도자기를 훔친 변재문의 입만 막으면 끝나는 문제 아니었나요? 보험사기를 공모한 김종문과 김다혜는 빠져나갈 수 있었잖아요.” “그 둘이 변 선생 입을 막지 못했나 보죠.” 이진철은 강준의 말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김종문이 부동산 거부라면서 돈으로 입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강준이 그들의 청부살인을 입막음해 주는 대가로 20억 원의 합의금을 이석진에게로 준 걸 이진철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경찰인 이진철의 그런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원래 사람 사이의 일이 제일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저 둘이 변 선생을 설득하지 못했나 보죠…….” “분명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겁니다.” 팔짱을 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피고인석을 응시하는 이진철 경감이었다. “경감님, 그나저나 전대성 회장은 아직 잠적 중입니까?” “어디로 숨었는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여동생인 전미향의 자택에 잠복을 시켜 놓긴 했는데…… 저도 뭔가가 안 나오면 더 수사를 이어가긴 힘들 거 같네요.” “김우진을 한번 찾아보시죠. 어차피 전대성의 금고지기는 김우진이 아닙니까?” “안 그래도 김우진과 연락을 취하고는 있는데…… 모르겠네요. 설득할 수 있을는지.” 강준은 회귀 전의 세계에서 금고지기 김우진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준은 그 의문의 교통사고의 뒤에 분명 전대성 회장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마……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박 과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시죠?” “원래 보스가 자리를 비우면 밑에 있는 놈들이 딴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강준의 말에 이진철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했다. “맞는 말이네요…….” 김종문의 변호사는 김종문이 어쩔 수 없이 보험사기에 휘말렸다는 걸 판사에게 어필하고 있었다. 김다혜와 변재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전략이었다. “판사님, 보험사기의 기획은 김다혜와 변재문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이며, 피고 김종문은 그저 허위 거래계약서에 서명해 줬을 뿐입니다. 내연관계인 김다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변호사의 말에 발끈한 건 김다혜였다. “다 거짓말이야! 치사한 새끼! 너만 살려고 이러는 거야?” “피고 조용히 하세요! 자리에 앉아요!” 정작 당사자인 김종문은 김다혜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는 있었다. “검사 측 질문하세요.” “변호인 측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피고 김종문! 피고는 일전에 필리핀에서 일어났던 배필립의 청부살인사건의 현장에도 김다혜와 같이 있었죠?” 검사는 김종문을 적극적 공범이 아니라 수동적 종범으로 몰고 가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잠깐 검사 측! 지금 하는 얘기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네, 재판장님. 둘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미술품을 빌미로 보험사기를 치려고 공모했던 것입니다!” 재판은 점점 김종문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검사는 배필립의 사건기록을 들춰 피고인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증명하려 한 것이었다. “피고 김종문! 김다혜와는 언제 처음 만났습니까?” “…….” 김종문은 답하지 못했다. 김다혜와의 만남에는 검찰에 쫓기고 있는 전대성 회장을 언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피고 대답하세요!” “재판장님! 제가 대신 답하겠습니다. 피고 김종문은 일전부터 RS투자의 전대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김다혜도 전대성으로부터 소개받은 것입니다!” 검사의 발언에 김종문의 변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검찰 측에서는 근거 없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제 발언을 증명해 줄 새로운 증인을 신청합니다! 전대성이 주로 이용했던 유흥주점 골드의 관리인을 증인으로 세우고자 합니다.” 검사가 방청석을 바라보자 가장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증언석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골드의 주인이었던 박영미였다. “이 사건의 공범 여부를 확실하게 밝혀 줄 증인입니다!” “증인 신청 허락합니다.” 박영미의 얼굴을 확인한 김종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그가 보험사기의 공모 혐의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거의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