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고미술품 보험사기 (3)2022.02.14.
칭다오 크라운 호텔. 김종문은 대명갤러리 교류전이 열린다는 세미나 홀을 찾아 올라갔다.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걸 제외하면 교류전이 열리는지도 알 수 없는 행사장이었다. 당연히 내부의 홀은 무척 작았다. 십여 개의 고려청자와 조선 시대 백자가 유리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다만 시선을 끄는 것은 작은 금동관음보살상이었다. “채원아, 이거 분위기가 너무 휑한 거 아니냐?” “김 사장님, 원래 이런 경매는 아무나 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변 선생하고 얘기가 된 사람만 오기로 되어 있거든요.” “그래……?” 김종문은 필리핀에서부터 채원과 일종의 동지애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배필립의 험악한 소굴에서 김종문이 믿었던 건 역설적으로 가장 연약한 채원이었다. 물론 채원의 뒤에 있는 전대성 회장을 믿는 것이긴 했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이성적으로 흐르지 않는 법이었다. “저기 변 선생이 바이어 데리고 오네요.” “여기 놈들은 어떻게 생겼나 한번 보자고! 흐흐!” 김종문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는 손해를 볼 게 없는 비즈니스였기 때문이었다. 교류전에 나온 도자기와 금동불상은 변 선생이 지인들에게서 끌어온 물건들이었다. 이번 교류전에서 바이어가 구매 의사를 밝히고 계약금을 걸게 되면 그제야 김종문이 거액을 들고 한국의 원소유자에게 구매하려는 계획이었다. 중개 브로커를 자처하는 변 선생에게는 수익금의 20%를 나눠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인사하시죠. 여기는 칭다오 대학 리궈성 교수님입니다.” “반갑습니다. 리궈성입니다.” 한국말로 밝게 인사하는 리궈성 교수였다. 하지만 이내 변 선생과 심각한 눈빛으로 교류전에 나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김종문은 그런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중간중간 변 선생이 통역해 주는 내용으로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리 교수님께서는 도자기보다는 불상에 관심을 더 보이시네요. 아무래도 백제 시대의 물건이라는데 높은 점수를 준 거 같네요.” “……저게 백제 시대 불상이라고요?” “저도 감정사이긴 하지만, 사실 불상 감정이 제일 까다롭습니다. 위조품도 많고요.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웠던 겁니다.” 입을 벌리며 놀라워하는 김종문이었다. 변 선생은 불상에 대해 흔한 고려 시대의 불상 중 하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건이었다니 김종문의 마음은 흥분되기 시작했다. “어머! 이게 웬일이에요! 우리 잘하면 크게 한몫 잡는 거 아니에요?” 호들갑을 떨며 김종문을 부추기는 채원이었다. 덩달아 리궈성 교수도 목소리를 높이며 변 선생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김 사장님, 리 교수가 3천만 위안을 부릅니다. 어떻게 할까요?” “네? 3천만 위안이요? 그게 얼마죠?” “대략 52억 원 정도 됩니다. 불상 소유자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인데 얘기를 나눠봐야겠지만, 대략 20억 정도면 오케이 할 겁니다.” 두 배도 넘는 장사였다. 파운샵 다단계처럼 조직력이 필요한 것도 그렇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업도 아니었다. 그저 돈으로 사서 되팔기만 하면 그만인 아주 노나는 사업이었다. 김종문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채원을 바라봤다. “채원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김 사장님! 여기서 무슨 생각을 더 해. 무조건 오케이지.” “네 생각에도 그렇지?” 김종문은 자기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채원의 말에 더 생각을 굳혔다. 변 선생의 말대로 불상을 매입하기로 말이었다. “변 선생님, 리 교수 말대로 합시다! 내가 한국 들어가서 물건은 확보할 테니까!” “그래도 제가 가격이나 한 번 더 흥정해 보죠. 단박에 우리가 수긍하면 아마 리 선생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테니까요.” 변 선생은 중절모 아래의 눈빛을 번뜩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한참을 리궈성 교수와 대화를 나누던 변 선생은 채원과 눈빛을 몇 번 주고받더니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교류전을 끝냈다.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바이어가 오간 교류전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김 사장님, 원래 교류전이라는 게 뒤풀이가 중요합니다. 어차피 큰 거래는 전부 뒤풀이에서 이뤄지는 거니까요.” “갑시다. 뒤풀이. 뭐 아는 데는 있으시고?” “그럼요. 제가 청도 오간 지가 15년이 넘었습니다. 하하! 여기 근처에 괜찮은 베이징 카오야(오리구이) 식당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시죠.” 김종문은 일이 잘 풀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사업 기회를 만들어 준 채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변 선생을 대동하고 이렇게 몇 번만 움직이면 앉아서 돈이 돈을 버는 격이 되는 거였다. 김종문은 앞으로 들어올 이문을 생각하며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그런 김종문의 모습을 채원은 놓치지 않았다. 채원이 골드에서 일하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요령이었다. 안 좋은 소식은 상대가 가장 기분이 좋을 때 던지는 게 원칙이었다. “김 사장님, 저번에 도자기 파손에 대한 보험금 청구 말이에요. 한국보험에서 아직 심사가 안 끝났다네…….” “뭐? 아직도 심사 중이야? 심사할 게 뭐가 있어? 창고에 있던 게 도둑을 맞았는데! 보안회사도 확인시켜 준 거잖아?” “그러게요. 뻔한 걸 이렇게 질질 끄는 거 보면 보험회사 직원들 일 처리 하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드네…….” 겉으로는 태연히 보험회사를 욕했지만, 채원은 도자기 파손 건이 보험사기로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동휘 팀장으로부터 한 차례 조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제 채원은 오랜 작업에 끝을 볼 타이밍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 * 강준은 변 선생이 주최한 대명갤러리 교류전이 열리는 8층 호텔 세미나홀로 향했다. 변 선생에 대한 정보는 칭다오 교민 사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강준은 몇 번의 수소문 끝에 그가 돈 문제로 교민 사회에서 여러 번의 물의를 일으켰다는 걸 알아냈다. [돈을 갚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면 무슨 핑계를 대고는 날짜를 계속 미루는 거야…… 그게 몇 번 반복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완전히 미쳐 버리는 거야, 미쳐!] [해외 나오면 같은 한국 사람 조심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니까…… 딱! 변재문 그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야.] [여기 좀 오래 있었던 사람은 다 알지…… 근데 뭐 새로 오는 사람도 있고, 한국 다시 들어가는 사람도 있잖아. 그렇게 계속 새로운 사람 물색해서 사기를 치는 거야…….] 변 선생에 대한 현지 교민 사회에서의 인식은 바닥이었다. 땡! 강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낯익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는 고의방화 혐의로 구속됐던 나진패션의 최기동이었다. “어! 너! 최기동! 네가 왜 여기에…….” 당황해하기는 최기동도 마찬가지였다. “박강준 너 이 새끼……!” 하지만 최기동은 강준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었다. 방화사건으로 감방에 갔던 건 전대성의 돈에 넘어간 자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채원에게 돈을 맡겼던 것도, 그녀를 진심으로 믿었던 것도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 “혹시 최기동 너…… 채원을 보러 여기 온 거야? 이번에도 보험사기 행각에 가담한 거냐?”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반말을…….” 최기동은 강준을 붙잡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덕분에 최기동의 기억이 강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채원아…… 시발,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오빠,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나 예전에 채원이 아니야. 오빠가 이러면 좋았던 우리 추억도 다 망가지는 거야!] [……뭐?] 2년간의 수감 기간에 채원은 단 한 번도 최기동을 면회하러 오지 않았었다. 최기동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출소 후 채원을 만난 자리에서 최기동은 자신이 진짜 배신당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박강준, 너 나랑 얘기 좀 하자!”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른 최기동은 강준에게 뭔가를 얘기하고자 했다. 그는 채원의 보험사기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채원과 김종문을 망가뜨리기 위해 그들을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최기동은 어쩌면 보험조사관인 강준과 같은 편이 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호텔 건물 뒤로 돌아간 최기동은 담배를 하나 꺼내 강준에게 내밀었다. “뭐냐?” “실은 내가 채원이 뒷조사를 좀 해 봤거든.” “왜? 배신감에 복수라도 하려고? 그거 너 잘못되면 스토킹이다.” “……에이 ……씨.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인상을 쓰는 최기동을 보며 강준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우. 강준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최기동의 눈빛을 살폈다. 그는 머릿속으로 뭔가를 정리하려는 듯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래서 뒷조사를 해 봤더니 뭐가 좀 나와?” “너 채원이 쟤가 얼마나 무서운 애인지 모르지?” “알아.” “뭐? 알아?” 단박에 수긍하는 강준을 보며 최기동은 놀란 눈치였다. “넌 이용당했던 거야. 애초부터 채원은 너한테 큰돈이 맡겨질 걸 알고 접근한 거였어. 지금 여기 와 있는 김종문도 마찬가지겠지.” “박강준 너……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여기까지 쫓아왔지. 아는 거 있으면 공유하자. 보아하니 넌 저 일당들하고 뭘 공모하고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망설이는 최기동이었다. “뭘 고민해? 괜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법적으로 응징할 생각을 하자고! 네가 감방에 다녀온 것처럼 채원도 감방에 보내야 하지 않겠어?” “…….” “한국보험에 채원이 가입한 고미술품 보험사기 건 제보한 것도 네가 한 거지? 박종길 시켜서?” 강준은 넘겨짚은 것이지만, 그건 최기동이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이었다. “박강준 너……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억울했겠지. 너만 당하고 있는 거 같아서…… 배신감에 복수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처음에는 복수심이었어…… 근데 지금은 불쌍한 놈이 한 명 보이더라…… 젠장…….” 최기동이 말하는 불쌍한 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새로운 사업을 찾았다며 눈이 돌아간 김종문이었다. “다 알고 왔다니까 바로 얘기한다. 채원이가 김종문한테도 작업하려고 하는 중이야. 변 선생인지 뭔지 하는 그 역겨운 새끼랑 짝짜꿍으로…… 시발!” 최기동은 자괴감으로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채원에 대한 복수심은 점점 더 자신을 향한 자책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럼 답은 나왔네! 최기동, 네가 직접 김종문한테 가서 알려 줘. 본인이 지금 무슨 작업을 당하고 있는지 말이야.” “내가 왜?” 최기동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강준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다. “김종문이 채원이한테 돈을 보내면 난 그걸 중간에서 가로챌 거다. 원래 내 돈은 찾아야 하지 않겠어?” 최기동의 눈동자에는 단단히 작정한 듯 핏줄이 서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최대의 복수는 채원으로부터 돈을 빼앗는 거였다. 강준의 말로는 쉽게 설득될 것 같지 않았다. “최기동, 네 맘대로 해! 넌 네 돈을 찾든지 말든지! 난 보험 사기꾼 세 놈을 잡을 테니까!” 강준은 최기동을 내버려 두고는 호텔 건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강준의 뒤로 최기동이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