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4. 고미술품 보험사기 (1) (74/250)

074. 고미술품 보험사기 (1)2022.02.12.

새벽 시간. 한 대의 택시가 인사동 골목길로 향했다. 더는 차가 진입할 수 없는 대로에서 택시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인사동입니다.” “……잔돈은 됐어요.”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만 원짜리 지폐 3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서 건네고는 차에서 내렸다. 가을이 시작되는 장맛비가 추적추적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또각! 또각! 여자는 하이힐을 신었기 때문에 빗물이 옷에 튀기지는 않았다. 익숙한 듯 발걸음을 옮기는 여자는 한때는 골드에서 일했던 채원이었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녀는 몸을 사렸었다. 배필립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아직 식지 않았을 무렵이었으니, 괜한 불똥이 자신에게 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내연관계로 지냈던 김종문 사장과는 은밀히 관계를 이어 나갔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이용 가치가 많은 호구였다. 인사동 큰길에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꽤 고즈넉한 2층 벽돌 건물이 나왔다. 그곳의 2층 대명갤러리가 채원의 목적지였다. 또각! 또각! 촤라락! 접이식 우산을 접었지만, 다 털지 않은 우산에서는 빗방울이 추적추적 계단 위에 흘러내렸다. 띵동! 미닫이식 자동 유리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을 것 같은 시각이었지만, 내부의 불은 이내 켜졌다. 그리고 안에서 막 중절모로 머리를 가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 드르르륵! 안에서 자동 버튼을 누른 중년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며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김다혜 씨?” “네, 제가 김다혜예요.” 김다혜는 채원의 진짜 이름이었다. “일단 앉으시죠. 감정을 원하신다고요?” “네, 변 선생님께서 고미술품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셔서요.” 대명갤러리의 주인인 중년 남자는 변 선생이라 불리는 자였다. 한때 서해안에서 발견되던 송나라 도자기를 판매하며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었다. 물론 한참이 흐른 후 그가 판 송나라 도자기가 위조품이라는 구설수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말이었다. “제가 고미술품협의회 이사로 있긴 하죠. 헤헤…….” 변 선생은 작은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라 김다혜에게 건넸다. “우롱차입니다. 식기 전에 드세요.” 김다혜는 말없이 찻잔을 두 손으로 집어 입가에 갖다 댔다. 상대에 대한 경계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듯 그녀는 찻잔을 입에만 갖다 댔을 뿐이었다. “근데 감정을 하려면 물건을 봐야 하는데…… 어떤 물건이죠?” “변 선생님이 감정하시면 딱 좋을 명나라 시기의 도자기예요. 전 잘 모르긴 하지만 빛깔이 아주 좋다고 하더라고요.” “물건은 어디에 있는데요? 창고?” “아직 중국 청도에 있어요. 한국으로는 선박으로 들어오기로 했고요.” 변 선생은 물건이 청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위조품이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청도는 그가 진품을 판매할 때 끼어 파는 위조품을 제작하는 도자기 공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도에서 오는 물건이라면…… 감정가를 좀 세게 불러야겠는데요?”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변 선생이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의 입에서는 기다란 송곳니가 삐져나와 보였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죠. 문제는 감정서를 얼마나 정교하게 써 주실 수 있는지예요.” “감정서를 제출할 곳이 어딘가요?” “……보험사요. 한국보험 대물 보상보험에 가입하면서 제출할 서류로 보낼 거고요.” 보험사라는 말에 변 선생의 눈이 크게 떠졌다. 웬만한 감정서 가지고는 먹히지 않는 곳이 바로 보험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보고 이 바닥 목숨줄을 내놓고 일하라는 건데…….” “……변 선생님, 지금 돈 필요한 상황 아니에요? ……이 갤러리도 매물로 나왔다던데.” 김다혜는 은근슬쩍 재정적 구석에 몰린 변 선생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변 선생은 그 말을 듣고는 기분이 상했는지 중절모를 벗어 책상 위에 ‘탁’하고 올렸다. 듬성듬성 모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민머리를 드러낸 변 선생은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웃었다. “다 알고 오셨다니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죠. 큰 거 한 장! 그 정도는 있어야 나도 일하는 재미가 있지.” “……알겠어요.” 잠시 뜸을 들이던 김다혜가 답했다. “잠깐! 나 괜히 떠보고 이러는 거 질색인데…… 지금, 알겠다는 건 한 장으로 하겠다는 거요. 아니면 안 하겠다는 거요?” 변 선생이 굳은 안색으로 확인 질문을 던졌다. “나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돌아가서 파트너와 상의해 봐야 해요.”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런 건 젊은 아가씨가 혼자 다룰 만한 사안이 아니거든…… 직접 오라고 해요. 뒤에서 간만 보고 있지 말고.” 변 선생은 김다혜 뒤에 김종문 사장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에게 큰 거 한 장을 쥐여 줄 사람이 김다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고미술품으로 보험사기를 기획한 장본인은 김종문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김다혜라는 거였다. * * * 2007년 11월. 한국보험이 성원그룹의 품으로 들어왔지만, 두 회사를 단박에 합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 엄격히 얘기하자면 성원건설을 담보로 발행된 대규모의 부채로 한국보험을 인수했기 때문에 한국보험은 성원건설 최진태의 소유나 다름없었다. 물론 덕분에 성원건설의 부채비율은 엄청나게 치솟아 있었다. ―박 과장님, 혹시 박종길이라는 사람 알고 계십니까? “박종길이요……? 글쎄요. 가만 보자…… 아! 예전에 양태식 자해공갈단 사건 때 연루되었던 사람 같은데요?” ―그렇죠? 이 사람……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보험사기범인데…… 저희한테 제보를 하나 해왔네요. “네? 무슨 제보요?” 강준에게 서동휘 팀장의 전화가 걸려온 건 늦가을로 접어들던 시점이었다. “누가 고미술품을 가지고 보험사기를 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얼마 전 저희 쪽에 골동품인 도자기로 대물 보상이 발생한 건이 있긴 했거든요.” “그 보험계약자가 누굽니까?” “김다혜 씨라고 젊은 여성분인데…… 저도 그 점이 조금 의심스럽긴 합니다.” “혹시 제가 보험계약 내용을 들여다봐도 될까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서 팀장님 사무실로 넘어가겠습니다.” 서동휘 팀장은 잠시 망설였다. 성원그룹으로 인수합병이 된 이후로 한국보험의 사내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얼마 전 성원건설 출신의 이종도 이사가 한국보험의 대표로 부임했기 때문이었다. 보험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건설사 출신의 임원이 자신들의 수장이 됐다는 건 한국보험 직원들로서는 일종의 모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원화재에 업무적으로 얽힌다는 건 일견 불편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오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서동휘 팀장은 강준의 도움이 절실했다. 익명으로 제보된 고미술품 보험사기 건을 신고한 사람이 강준이 잘 알고 있을 박종길이었다. 서 팀장은 뭔가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야 할 처지였다. 강준은 한국보험이 있는 여의도로 향하기 전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게 있었다. 강준은 보험사기방지솔루션인 FDS에 접속해 김다혜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보험사기의 전과자인 박종길이 누군가를 보험사기로 제보했다고 했다. ‘혹시 같이 범행을 공모하다가 틀어졌나……?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나?’ FDS 시스템에 김다혜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사건은 없었다. ‘책상머리에서의 조사는 이제 끝났고…… 그럼 직접 만나볼 차례인가……!’ 강준은 겉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박 과장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강준이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과다지급된 병원의 자료를 조사하고 있던 김준혁이 물었다. “한국보험 보험조사팀! 김준혁, 혹시 고가품 관련해서 대물 보상 보험사기건 좀 조사해 봐 줄 수 있냐?” “아…… 대형병원 건 때문에 바쁜데, 뭐! 그래도 과장님 일인데 해드려야죠. 몇 년 전부터요?” “최근 5년! 사건 관련자 중에 중복된 인물 있으면 뽑아두고!” “네, 알겠습니다!” 김준혁도 점점 보험조사팀의 전산 업무에 베테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한국보험 서동휘 팀장의 사무실. “명나라 시절 도자기 15점. 그중에 3억이 넘는 고가 도자기가 10점이고요…… 총 45억 대물 배상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서동휘 팀장은 심각한 얼굴로 김다혜의 보험계약 내용을 확인해 줬다. “서 팀장님, 김다혜가 납입한 보험금은 총 얼마죠?” “1억 5천만 원이요.” “45억 상당의 보험에 가입하면서 엄청난 보험금을 납부했네요?” “그것도 알아봤는데…… 본인 명의의 주상복합 건물이 하나 있어요. 그 정도 보험금 납입에 대한 여력은 충분히 있었다고 봐야죠.” 김다혜가 계약한 도자기는 평택항 인근의 창고에서 도난되었다. 15점 모두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한국보험은 보안 시설 업체의 도난 기록을 확인하고는 정상적인 대물 사고로 보고 45억 원을 지급을 준비하던 와중이었다. 그사이에 박종길로부터 제보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박종길이 제보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우리도 나름 조사를 했죠. 제보 전화의 발신자 기록을 경찰에 의뢰해봤습니다. 그랬더니 박종길이라는 인물이 나오더군요.” 서동휘 팀장은 제보가 들어온 이상 45억 원의 보험금 지급을 미루고 조사에 본격 착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보험사기가 아니라고 판명이 날 경우엔 보험금 지급 지연에 따른 이자를 지급해야 할 처지였다. “서 팀장님, 보험보상액 45억 원은 어떻게 책정한 겁니까? 도자기에 대한 감정평가는 누가 했죠?” “그게 고미술협의회가 발행한 감정평가서가 있었습니다. 대물 보상팀에서는 그 감정평가서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고미술협의회라…… 신뢰 있는 기관인가요?” “협의회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고미술 관련해서 공인된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강준은 기본적인 사항부터 체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인된 곳이라고 해서 감정서가 100% 맞는 건 아니죠…….” “그렇긴 하지만 고미술협의회를 상대로 싸우려면……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법정에 가게 되면 판사는 전문가들인 고미술협의회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고요.” 베테랑 보험조사관인 서 팀장은 법정에서의 결과까지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서동휘 팀장님 이 사건…… 혹시 저희 쪽에 넘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좀 곤란합니다. 하지만 이제 같은 그룹이니 공식적으로 협조공문을 보내드리죠.” “네. 감사합니다. 전, 이 감정서의 주인공부터 만나보겠습니다!” 강준의 말에 서 팀장이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그게…… 저희도 그 감정서를 써준 변재문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지금 국내에 없더라고요. 중국 청도에 있다는데 거기까지 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살펴보죠.” 강준은 서동휘 팀장이 제공한 서류들을 챙겨 한국보험의 본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건물 앞에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답십리로 갑시다!”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감정서를 써준 기관인 고미술품협의회였다.

16555208371758.png

1655520837176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