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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생명보험사 인수전 (4) (72/250)

072. 생명보험사 인수전 (4)2022.02.10.

한국보험 신성재 회장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며 이를 박박 갈았다. “뭐? 나보고 1,200억에 회사를 내놓으라고? 미친 새끼!” 회장의 곁에서 쥐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는 신성재 회장의 참모인 홍 전무였다. 그는 간밤의 자리에 함께 있었기에 신 회장의 분노를 백분 이해하고 있었다. “홍 전무, 나 어떻게 해야 해?” 신 회장은 항상 남들에게 그런 식으로 원하는 답을 얻곤 했다. 홍 전무는 그런 신 회장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기분을 맞추는 답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가 볼 때는 최진태 이사가 한승일 시장까지 동원해서 온 거 보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뭐 회사를 그 돈 받고 팔라는 거야?” “전환사채 건도 걸려있고…….” 한국보험의 고질적인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발행할 전환사채 물량 대부분을 최진태 이사 측에서 받아주기로 한 상태였다. “그게 아니라! 전환사채 받아줄 다른 놈들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그렇죠.” “내가 최진태 그 새파란 놈 앞에서 암말 못 하고 있어야겠어?” 눈치를 보던 홍 전무가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던 얘기를 꺼내놓았다.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다른 쪽에서도 연락이 왔었습니다.” “어? 그래?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신 회장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최진태 쪽이 아닌 누군가의 대안이 있다는 건 간밤에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더는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게…… 들으시면 별로 좋아하실 거 같지 않아서.”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 봐. 누구야?” “실은 RS투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신 회장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홍 전무를 노려봤다. “RS투자? 그 사채업자 출신이 한다는 거기?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홍 전무는 그런 상황을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게 꼭 전대성 회장만 바라볼 게 아닙니다. 최근에 홍콩 쪽 자금을 끌어당겼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일개 사채업자였던 RS투자가 일전에 나진패션을 인수한 걸 보면 분명 배경이 따로 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거 금세 다시 토해냈잖아!” 한국형 SPA브랜드인 탑스퀘어를 전면에 내세웠던 나진패션은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정체불명의 홍콩회사에 팔렸다. “구체적으로 배경이 뭐야?” “회장님, SW에쿼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뭐? 무슨 쿼티?” “거기가 홍콩의 한 투자회사랍니다. 최근에 중국 본토에서 자금이 그쪽으로 몰리고 있다는 소문인데, 전대성이 그쪽 라인을 하나 잡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천억이 넘어가는 자금을 RS투자에서 핸들링할 수 있다고?” “얼마 전에 RS투자 쪽에 자금을 넣은 거로 소문이 났습니다. 물론 비상장주식 매입이라…… 공식 확인은 불가능하지만요.” “혹시, 그거 겉으로만 다른 이름이고…… 실은 최진태 이사 페이퍼컴퍼니 아니야?” 신성재 회장은 여전히 최진태 이사와 전대성 회장을 한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SW에쿼티는 최진태 이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회사랍니다.” 신 회장은 한패라고 생각했던 둘 간의 균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계속해 봐!” “전대성 회장이 우리 한국보험을 최진태 이사를 제치고 인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둘을 경쟁시켜서 손해 볼 게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신 회장은 갑작스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인수 금액을 얼마를 부른 거야?” “1,600억입니다…….” “하아…… 1,600억이라…… 애매한데?” 신 회장이 생각하는 매각액은 2,000억이었다. 예상 매각액보다 400억이나 모자란 숫자였다. 하지만 간밤에 당했던 모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번 일은 과징금 문제로만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솔직히 성원화재에서 잘못한 것도 있지만…… 비자금 문제는 검찰에서 움직여도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검찰 출신의 한승일 시장이 괜히 그 자리에 나온 게 아니었다. 금감원 감독으로 불거진 환수 보험금의 비자금 문제를 검찰 기소까지 이어갈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내가 검찰 인맥도 없이 지금까지 온 줄 알아!” 신 회장은 혼자 읊조렸지만, 홍 전무는 신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장님, 살짝 간을 한번 보는 게 어떨까요?” “뭐? 간을? 어떻게?” “이번에 발행할 전환사채 물량을 쪼개서 시장에 내놓는 겁니다. RS투자가 정말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지도 가늠해 볼 기회가 될 수 있고요.” 신 회장은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눈치를 보던 홍 전무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제가 RS투자 쪽에 전환사채 얘기를 살짝 흘려 볼까요?” 신성재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는 답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부고발자들을 부추겨 한국보험을 곤란에 빠트린 건 최진태 이사였다. 앞에서는 온갖 감언이설로 한국보험의 부실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뒤에서 더러운 짓을 해대며 기업가치를 후려친 격이었다. “에이…… 못 믿을 새끼들!” 신 회장의 혼잣말에 홍 전무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자신에게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 전무가 그렇게 태세 전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신 회장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전대성 쪽에 한 번 접촉해 봐. 뒤에 있는 놈들이 혹시 어떤 사기꾼 새끼들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 “네, 알겠습니다!” 홍 전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전대성 회장이 이면으로 한국보험을 인수한 이후에 홍 전무를 대표이사 자리에 앉혀주겠다는 약속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 * * 일은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갔다. 전대성 회장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전환사채 500억 원에 대한 물량을 장담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홍승표 전무와 전대성 회장 측과 만남은 잦아졌다. “김우진 부장님이 나오셨네요?” 전대성이 보낸 김우진은 더 이상 나진패션의 대표가 아니었다. 나진패션을 매각한 김우진은 원래의 부장 직급을 달고 있었다. 어쩌면 김우진에게는 직급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번 이런 데서 만나는 것도 좀 부담스럽군요.” “하하! 뭐 우리가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문제가 될 게 있나요? 전 회장님께서 사실 답답한 곳들을 좀 싫어하시는 스타일이셔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대성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호텔의 비즈니스 라운지였다. 홍승표 전무는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이런 만남이 최진태 이사 쪽으로 퍼져 나가는 날에는 어떤 잡음이 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 전무님! 오셨습니까?” 전대성 회장이 손수 자리에서 일어나 홍 전무를 맞이했다. 그런 상황에 홍승표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한국보험의 전무이사이긴 했지만, 늘 신성재 회장의 변덕에 마음을 졸였던 그였다. “아이고, 이렇게 직접 맞아주시고……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국보험 전무이사이신데 제가 모시는 게 당연하지요! 하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연배의 둘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아온 홍 전무와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온 전대성의 결은 완전히 달랐다. 완곡하고 정중했지만, 전대성의 태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거침이 묻어 있었다. “신 회장님께서는 뭐라고 그러십니까?” “전환사채 문제는 전환가액 조정을 원하십니다.” 전환사채는 사채의 일종이지만, 주식으로 전환하여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채다. 전환가액이 낮아진다면 더 많은 주식을 매입할 수 있어 경영권 확보에 유리해진다. “전무님, 편하게 말씀하시죠. 회장님께서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주당 2,900원을 원하십니다.” 장외주식으로 거래되는 한국보험의 현재 주가가 2,600원이었다. 주당 300원의 웃돈을 얹어 달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전대성은 뜸을 들이며 홍 전무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홍 전무는 속으로 뜨끔했다. 신 회장이 제시한 전환가는 2,800원이었다. 100원의 차액을 높여 부른 건 중간에서 거래를 주도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거였다. “가격은 알겠습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2,900원의 전환가를 받아들인다는 건지 아니면 거절한다는 건지 홍 전무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음식부터 드시죠.” 정갈한 스테이크 요리가 나왔지만, 홍 전무는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어색한 식사를 마치고 난 전대성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보시기에…… 제가 한국보험을 인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지금 한국보험이 새로운 수혈 없이 이대로 흘러가기엔 문제가 많습니다. RS투자의 의지만 있다면 지금이 적기라고 볼 수 있겠죠.” 협상의 정석적인 접근이었다. 과감하게 투자금을 더 쓰라는 얘기였다. 전대성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쩌면 신 회장님께서는 동종업계 누군가가 아닌 제3자가 인수하는 모양새를 더 선호하실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먹히는 게 아니라 한국보험의 간판을 계속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저도 그런 면에서 전무님이 한국보험의 차기 대표로 적합하시다는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홍승표 전무는 속없이 전대성의 말을 냉큼 받았다. 그만큼 그는 전대성의 말을 표면적으로 믿었다. “근데 말입니다…… 전무님.” “네, 말씀하시죠.” “전 보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업가입니다. 어찌 보면 장사꾼이죠.”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전대성이었다. “전 손해나는 장사는 안 합니다…….” “그야 그렇죠.” 바싹 긴장하는 홍승표 전무였다. 아까 전 그가 느꼈던 우월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신성재 회장 앞이나 전대성 앞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근데 전무님은 자꾸 저보고 손해 보는 장사를 하라고 하시니 제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 “한국보험 정말 제가 인수할 수 있는 겁니까? 앞으로 대표가 되실 전무님께서 한번 조언 좀 해 주시죠. 아까처럼 말고 허심탄회하게요!” 홍 전무는 목이 탔다. 앞에 놓인 유리잔의 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제가 신 회장님과 자리를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중간에서 어쩔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전대성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애초부터 홍승표 전무는 한국보험 신성재 회장에게 접근하기 위한 용도였다. ‘내가 네깟 놈을 대표에 앉혀 줄 거 같아? 아둔한 새끼…… 전무 자리도 과분한 놈!’ 전대성은 다시 포크를 집어 남은 고기를 입속에 밀어 넣었다. 자신이 용도폐기 되는 건 줄도 모르는 홍 전무는 전 회장에게 웃음을 건네며 잔을 마주 들었다. “앞으로 보험업계를 이끌어 가실 전 회장님의 모습, 기대해 보겠습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게 다 홍 전무님이 어떻게 저를 도와주느냐에 달린 거지요. 하하!” 둘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카메라로 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녀는 대한뉴스의 이유린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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