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1. 생명보험사 인수전 (3) (71/250)

071. 생명보험사 인수전 (3)2022.02.09.

금융감독원 보험조사국 감독 당일. 을지로 성원화재 본사. 널찍한 테이블에 금감원 보험조사국에서 나온 3명의 감독관이 수북이 쌓인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보험설계사가 관여된 보험사기 건은 따로 추려 주시죠. 그리고 지난 3년간 보험설계사들의 퇴직자 명단도 부탁드리고요.” 서동휘 팀장에게 들었던 대로 금감원 박기용 팀장은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보험조사 1팀의 이정훈 부장은 김준혁을 불러 자료조사에 협조하게 했다. “여태껏 협조 안 해 주다가 본인이 아쉬우니 떠넘기는 거 좀 봐요…….”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우리도 같은 식구끼리 자료 좀 통합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게요. 이 부장이 저렇게 자기만 꽁꽁 쥐고 있을 줄은 저도 꿈에도 몰랐네요.” 최은정 팀장은 강준에게 귓속말로 이정훈 부장의 행태를 비난했다. 보험사기방지솔루션인 FDS(Fraud Detection System)가 보험업계에 도입되어 활용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김준혁은 새로운 FDS 시스템과 기존 금융감독원의 보험사기인지 시스템을 사용해 보험조사업무를 수행해 왔다. 하지만 정작 내부의 자료에는 이정훈 부장의 견제로 접근하지 못했었던 게 사실이었다. “참! 박강준 과장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박기용 팀장이 서류를 넘기다 강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말씀하시죠.” “한국보험 보험설계사들의 내부고발 건 말입니다…… 성원화재 측에서 부추긴 정황이 있는데 혹시 아시는 거 있으십니까?” 그 말이 나오자마자 이정훈 부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 누굽니까? 한국보험에서 그럽니까?” 민감한 이슈였다. 금감원 보험조사국으로서도 괜히 업계 간 갈등을 부추길 이유는 없었다. “한국보험에서 자기네들 물타기 하려나 본데…… 증거 있습니까? 우리가 거기 개입했다는 증거 있냐고요?” 이정훈 부장의 과민한 반응은 아무리 깐깐한 박기용 팀장이라도 더 파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 부장의 말마따나 명쾌한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강준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이 부장님, 박기용 팀장님이 질문을 저한테 하신 거 같은데요?” “뭐? 너…… 박 과장…… 너!” 뭔가 낌새를 눈치챈 건지 이 부장은 얼굴이 붉어져서 강준을 막아서려고 했다. “맞습니다. 저희 성원화재의 영업본부장 중 한 명이 한국보험의 내부고발자들에게 대가성 돈을 지급했습니다.” “박 과장! 무슨 그런 근거 없는 소리야!” “근거가 있습니다. 여기 정승태 본부장이 한국보험 설계사들을 만났던 장소와 시간이 모조리 적혀 있습니다.” 강준은 오미희를 비롯한 한국보험 내부고발자들에게 받은 자료를 박기용 팀장에게 건넸다. “그걸 왜 네가 들고 있어?” 이 부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강준을 바라봤다. “한국보험 보험설계사들이 내부고발한 사안은 물론 틀린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들이 나름 속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성원화재에서 교육 보직을 빌미로 내부고발을 부추겼는데…… 정작 금감원에 내부고발이 들어간 이후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으니까요.” 정승태 본부장이 간과한 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의 무게가 생각보다 크다는 거였다. 단돈 5백만 원으로 그들의 입을 막기엔 너무 소소했던 건지도 몰랐다. “이 문제는 저희 금감원에서도 검토해야 할 사안입니다. 업계의 불미스러운 일을 만든 사례로 징계받은 경우는 아직 없으니까요…….” 박기용 팀장의 말은 어떤 식으로든 징계가 내려갈 거란 얘기였다. “다음으로 성원화재 보험조사팀에서 환수된 보험금 처리 말입니다. 그거는 얼추 정리된 것 같네요…….” 하지만 금감원의 관리 감독은 당장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박기용 팀장이 수북이 쌓인 서류를 모조리 검토할 때까지는 말이었다. 벌컥! 회의실의 문을 열고 불쑥 들어온 자는 성원화재 관계자도 아닌 성원건설 대표 직함을 가지고 있는 최진태 이사였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는 대충 마무리가 되어 가나요?” “이제 시작입니다…… 근데, 들어오신 분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최진태가 누군지 모르는 박기용 팀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떨떠름하게 답했다. “미리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성원그룹 최진태 이사입니다! 제가 좀 전에 허 국장님과는 전화 통화를 끝냈습니다!” 감독관인 박기용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위의 인맥으로 찍어 누르기! “얘기 들어보니까 여기저기 감독해야 할 곳이 많다면서요? 우리도 최대한 협조를 해야죠. 이 부장, 필요한 자료들은 다 챙겨 드렸지?” “아…… 네. 요청받은 자료는 다 출력해서 이렇게 드렸습니다.” 최진태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들을 보며 과장되게 혀를 내둘렀다. “이야! 이거 며칠은 보셔야 할 거 같은데, 저희가 너무 많은 일거리를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며칠이 되더라도 들여다볼 건 들여다봐야죠…….”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하시죠. 제가 요 근처에 예약을 해뒀으니까 그리 멀지도 않을 겁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차야 감독도 잘하시지 않겠습니까?” 박기용 팀장은 최진태가 무슨 수작인지 뻔히 알고 있었다. 적당한 접대와 회유를 통해 관리 감독도 적당히 넘어가려는 수작이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따로 식사하겠습니다.” “역시 허 국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대쪽 같은 면이 있으시네요.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던지요. 근데, 한 가지 분명한 건…… 저희 성원화재를 사소한 문제로 괴롭히지는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그럼요, 저희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보고서를 올릴 겁니다. 그에 따른 징계 수위는 위에서 결정하는 것이고요.” 박기용 팀장은 교묘하게 최진태의 협박을 피해갔다. “아! 그럼,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얼굴이 붉어진 최진태는 이 부장에게 눈짓을 한 번 슥 보내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후폭풍은 거셌다. 금감원의 박기용 팀장은 한국보험의 내부고발자 5명을 일일이 만나 면담기록서를 작성했고, 그걸 토대로 금융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금융위원회는 7일간의 내부협의 끝에 성원화재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경고 처분을 내렸다. 한편 보험계약자들의 상품 해지를 유도한 한국보험에 대해서는 부당행위로 결론 내리고 언론에 사과문 게재와 수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보험업계를 다루는 기자들은 그 소식을 빠르게 실어 날랐다. “야 인마! 너 뭐 하는 새끼야!” 성원화재에서는 내부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자사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낸 강준에 대한 징계위원회였다. 정승태 강남 영업본부장을 건드린 건 영업부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징계위원회는 각 부서의 임원이 모였고, 그 가운데 제일 회장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전략기획팀의 김성호 이사가 위원장 격을 맡았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얘기를 들어봅시다.” 영업부 총괄 책임인 한종진 상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이사님,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상무님, 그게 아니라 애초부터 문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요. 이게 공개적인 망신이지 뭡니까?” 보험조사 2팀의 최은정이 나섰다. 그녀는 징계 대상인 강준의 상사로 징계위원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부하직원 관리 하나 못하면서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겁니까?” “네? 진짜 부하직원 관리 못 한 건 영업부 쪽이죠.” 한종진 상무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본인은 정승태의 문제에 있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금감원의 관리 감독이 나오고 나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겨우 파악했을 뿐이었다. ‘정 부장…… 이 새끼가 나를 엿 먹여…….’ 하지만, 그걸 대놓고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상무는 적당히 꼴도 보기 싫은 정승태를 적당히 옹호하는 척하다가 그를 지방의 한직으로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좌우간 저는 우리 영업부가 이번 일로 위축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직원들 사기 문제도 있는 거고요…….” “그럼 둘 다 적당한 선에서 징계를 내리는 건 어떨까요?” 김성호 이사는 타협안이었다.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안이었다. 인사팀장인 이희성 이사는 볼펜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더니 발언권을 얻었다. “제가 볼 때는 정승태 본부장의 행동은 분명히 독단적인 행동으로 자사에 피해를 준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징계까지 내려 버리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금감원에서도 경고 조치로 끝난 사안이기도 하고요.” 다분히 최진태 이사의 입김이 작용한 의견이었다. “한국보험 인수가격을 떨어뜨리려고 누군가 사주한 거겠죠……!” 성격 급한 최은정이 속내를 말해 버렸다. 좌중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최 팀장, 입 조심해!” 김성호 이사가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자중시켰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질 때쯤, 바깥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최창식 회장이었다. 앉아 있던 모든 임원이 벌떡 일어났다. “금감원에서 뭐 내려왔다며?” 안광을 빛내며 쏘아보는 최창식 회장에게 다들 눈을 내리깔았다. “불공정행위로 경고 조치를 받았습니다.” 김성호 이사가 임원들을 대표해 대답했다. “무슨 불공정행위? 한국보험 설계사들 후려쳐서 내부고발시킨 거?” 모든 사안을 다 파악하고 내려온 최 회장이었다. “그게 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명확한 사실관계도 서로 주장이 다르고요.” “복잡하긴 뭐가 복잡해? 경쟁사 털어먹으려고 수작 부린 거잖아. 누구야? 그거 생각해 낸 놈이?” 최 회장의 일갈에 임원들은 모두 시선을 피했다. “한 상무, 자네야? 자네가 영업부 책임자 아니야?” “……회장님, 제가 지시한 건 아닙니다만…….” “아니라고? 그럼 누구야? 누군지 말해!” 한종진 상무는 차마 정승태가 최진태 이사 라인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더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입으로 얘기해 줘? 진태 그놈이야?” 최 회장의 말에 이희성 이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최 이사가 의욕이 과해서 그렇게 된 거 같습니다…….” 최 회장은 불같은 얼굴로 이희성을 노려봤다. “의욕? 의욕만으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해? 그리고 그걸 너희들은 그냥 놔두고 불구경하듯이 지켜만 봤어! 머저리 같은 놈들……쯧쯧!” 좌중에 무거운 공기가 내리깔렸다. “이거 누구 징계위원회야?” “금감원에 일방적으로 자료를 넘긴 박강준 과장에 대한 징계위원회입니다…….” 최 회장은 휠체어 바퀴를 움직이며 비서에게 손짓했다. 그만 가자는 얘기였다. “그놈 덕분에 미꾸라지 한 마리 가려냈는데 벌은 왜 내려?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다들 때려치우고 가서 일이나 해!” 최 회장은 그 말을 남기고는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은 임원들은 머쓱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박강준 과장에 대한 징계는 구두 경고 정도로 갈음하시죠?” 김성호 이사의 정리하는 말에 징계위원회에 모인 임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16555208145229.png

1655520814523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