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실종자 사건의뢰 (5)2022.02.06.
“이야… 이게 누구야? 너 전에 전당포 한다고 깝죽대지 않았었어?” 강준을 본 배필립의 첫마디였다. 그는 일전에 파운샵 투자자로 위장했던 강준을 대번에 알아봤다. “박강준. 너 그나저나 내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하고 다녔더라…?” “……살인자 새끼……!” 배필립은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강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강준의 뺨을 툭툭 쳐댔다. “인마, 너 그러고도 무사할 거 같았냐? 어! 이 새끼야!” “……김상훈 ……김상훈 어떻게 했냐?” “뭐? 누구?” “2년 전, 네가 죽인 김상훈, 그 아비한테는 10억 원이나 받아 챙겼잖아!” “아…… 아, 그 건축 회사 한다는 그 양반?” “그래, 이 살인자야!” 짝! 짜작! 짜작! 배필립은 냉랭한 눈빛으로 강준의 귀싸대기를 때려 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불구경하듯이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강준을 버리고 배필립과의 사업을 선택했던 김종문이었다. “……김종문 사장님! 정말 이런 범죄자와 사업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비즈니스 하는 사람은! 비즈니스만 봐야지. 딴 거에 눈 돌리고 그러는 거 아니야.” 김종문은 히죽거리며 옆에 앉은 채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박강준, 네가 나와 배 대표를 어떻게 이간질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있는 이 여자가 너를 아주 잘 알더라?” 채원은 강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최기동의 화재보험 사기 사건 때 그녀는 최기동의 비자금을 보관했었다. “채원 씨, 여전히 골드에 있는 겁니까?” “언제 적 얘기를 하고 그래요? 그나저나 전 회장님이 당신이 여기 오게 될 거라고 했는데…… 정말 왔네요?” 전대성은 경찰 내부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진철과 강준의 밀착 관계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해결해야 할 사건이 하나 있었거든요. 김상훈 씨 시신을 찾는 건데…… 여기 이 사람이 라구나 지역 파인애플 농장에다 갖다 버렸더라고요. 김상훈 씨 시신을 말이에요!” 강준은 좀 전에 배필립으로부터 따귀를 맞으면서 그의 기억을 읽어냈었다. 그리고 김상훈을 묻었던 장소를 그 기억 속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철컥! 철커덕! 배필립은 강준의 말을 듣자마자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권총을 꺼내 장전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처음으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어!” “누구긴 누구야. 경찰이 벌써 네 뒷조사 다 했더라.” 강준은 공을 광역수사대의 이진철 경감에게 돌릴 생각이었다. 탕! 배필립은 강준이 아니라 송지희를 향해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은 빗겨 나갔지만, 송지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너 제대로 얘기 안 하면 저 여자는 죽는다!” 강준이 말없이 배필립을 노려볼 때쯤, 바깥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배필립의 총성은 주변에 잠복한 광역수사대와 필리핀 경찰에게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강준은 셔츠의 단추를 풀고는 밖에서는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금목걸이를 내보였다. 그 목걸이를 본 김종문이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 대표, 저거 위치추적기야! 경찰이 같이 왔을지도 몰라!” “뭐? 뭐라고!” 배필립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강준을 겨눈 총구를 내려놓지 않았다. 밖을 살피는 그는 경찰이 주변을 에워싸는 소리를 들었다. “시발! 차 대기시켜!” 배필립의 지시에 부하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미 현지 경찰에 의해 대저택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투다다탕! 투다다탕! 갑자기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쳤다. 총알은 2층의 모든 유리창을 일시에 깨뜨렸고, 배필립을 비롯한 부하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떻게 된 거야? 김 부장! 조슈아 서장한테 전화 연결해!” 잠시 뒤, 김 부장이 전화기를 들고 배필립에게 뛰어왔다. “(조슈아! 나 미스터 배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고요!)” 잠시 통화를 하던 배필립은 서서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뭔가를 알아듣고는 ‘땡큐’라는 말을 연발했다. 그리고 배필립은 잠시 총성이 멈춘 틈을 타 권총을 다시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항복! 항복이라고 새끼들아!” 창가에서 다가선 배필립은 바깥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투항을 받아 주겠다는 신호를 받은 건지 부하들에게 무장해제를 지시했다. “다들 총 버리고 체포에 응해! 내가 뒷일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곧 다들 풀려날 거다.” 하지만 그 말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필리핀 감방을 경험한 적이 있는 김 부장이었다. “대표님, 저는 항복 못 합니다.” “왜?” “이번에 잡히면 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알아서 해!” 갑작스러운 체포 작전에 모두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상황이 가장 당황스러운 건 20억 원을 투자한 김종문이었다. “배 대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파운샵 사업 어떻게 되는 거냐고?” 김종문의 옆에 있던 채원도 전대성 회장에게 일이 어그러지는 상황을 보고해야 할 처지였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나가리된 거지! 병신아!” 배필립의 무책임한 발언에 김종문은 얼굴이 벌게져서 그를 따라가며 따졌다. “내 20억 어떻게 할 거야! 몇 배로 돌려주기로 했잖아!” “시발 너는 지금 상황 안 보이냐? 지금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네가 알아서 투자금 받아서 진행해 보던가?” 배필립은 자신이 빠지면 파운샵 체인 사업에서 김종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이봐, 김 사장, 돈 있으면 내 변호사 비용이나 대 줘. 내가 나와야 파운샵 체인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김종문과 배필립이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강준이 주목한 건 혼자 도주하려는 김 부장이었다. 김 부장은 저택의 반대편 창문을 통해 아래로 뛰어내리기 직전이었다. “야! 김 부장!” 철컥! 김 부장은 강준을 보자마자 총을 겨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준도 배필립의 부하들에게 빼앗은 총이 있었다. 타탕! 강준은 망설이지 않고 김 부장에게 총을 발사했다. 총알은 김 부장의 오른쪽 어깨를 맞고 관통했다. “크으으흑!” 외마디 외침과 함께 뒤로 밀린 김 부장이었다. 강준은 그에게 다가가 이마에 총을 겨눴다. “어딜 도망가? 앞으로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많거든!” 콰직! 강준은 김 부장의 바닥에 떨어진 선글라스를 구둣발로 밟아 버렸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채를 잡고는 1층으로 질질 끌고 내려왔다. “박 대리님!” 1층 계단 입구에서는 2층으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던 이진철과 광역수사대의 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놈이 김상훈의 시신을 직접 묻은 놈입니다! 경감님, 이놈을 잡아 족치면 그간의 한국인 청부살인사건에 대한 전말을 토해낼 겁니다!” 강준은 끌고 오던 김 부장을 이진철 경감 쪽으로 던졌다. “우우으…… 개새끼……! 너…… 두고 보자…….” “뭘 두고 봐? 지금 실컷 봐라!” 강준은 김 부장의 칼자국이 난 눈두덩이를 꽉 쥔 주먹으로 가격했다. 퍼퍽! 김 부장은 뒤로 나뒹굴었고, 그 모습을 수갑을 찬 배필립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넌, 이렇게 안 될 것 같지? 조만간 너도 이렇게 될 거다!” “야, 박강준…… 난 한국으로는 절대 안 가게 될걸? 내가 여기서 뿌려 놓은 게 얼마인데…… 크크…….” 그 말을 듣고 있던 이진철이 배필립의 얼굴을 뒤에서 땅바닥으로 내리박았다. “한국은 필리핀과 범죄인 인도조약이 마련되어 있어! 넌 곧 청부살인혐의로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질 거고, 그렇게 되면 과연 필리핀 경찰이 아무리 부패했다고 해도 널 그냥 놔둘까?” “이거 경찰이 이렇게 폭력을 써도 되는 거야……! 이거 인권 탄압이라고!” “뭐? 인권? 네 말대로 여긴 필리핀이잖아! 내가 남의 나라 땅에서 범죄자 인권까지 신경 써 줘야 하냐!” 이진철은 뾰족한 팔꿈치로 배필립의 등을 짓눌렀다. “으아아악! 아악!” 배필립의 고통에 찬 비명이 그의 3층 대저택을 가득 메웠다. * * * 한 달 뒤. 김상훈의 부친인 김철희는 파인애플 농장에 묻힌 아들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 이미 백골이 되어 있어서 신분 확인은 어려웠지만, 시신이 입고 있던 옷은 한국에서 김상훈이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상훈아…… 흐흑! 어째서 여기서 묻혀 있는 거냐……!” 사업을 해 보겠다며 방문한 필리핀에서 김상훈은 납치를 당했었다. 지인과 함께 인근을 여행하겠다는 소식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제 아빠랑 같이 집에 돌아가자…… 너 죽인 놈들은 반드시 처벌해 주마!” 결국 김상훈의 시신은 현지에서 화장됐고, 김철희는 아들의 유골함을 들고 허망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장담했던 대로 배필립 일당들은 한국으로 송환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답답한 상황들은 시사뉴스닷컴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범죄자 배필립, 왜 한국으로 데려오지 못하나? 여론은 들끓었고, 배필립을 둘러싼 범죄행각도 서서히 밝혀졌다. 그가 캄보디아에서 운영했던 도박사이트의 실체가 드러났고, 전대성이 뒷돈을 대서 운영했던 송종철 사장의 필리핀 도박사이트도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제 라성캐피탈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 흐름만 밝혀내면 전대성 회장을 잡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필리핀 경찰은 그사이 배필립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해 버렸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충무로 시사뉴스닷컴 편집국. 함지훈 기자는 뜨뜻한 둥굴레 차를 강준에게 내어 줬다. “함 기자님 심층 기사 덕분에 여론이 시끌시끌하네요.” “온라인에서는 배필립을 송환하라고 난리입니다. 하지만 필리핀 경찰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그게 답답하죠.” “그래도 여론이 계속되면 우리 정부도 다시 송환요청을 할 수밖에 없겠죠.” “요청만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배필립은…… 분명히 송환될 겁니다. 한번 지켜보시죠.” 함 기자는 그런 강준의 말에 답답해했지만, 강준은 배필립이 곧 현지 마약상들과 손을 잡고 한국에 유통하다가 한국으로 송환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강준은 그런 회귀 전 일어났던 일들을 논리적으로 함 기자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배필립이 언젠가는 송환될 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함 기자는 답답함을 느꼈는지 대화를 다른 화제로 돌렸다. “참! 이진철 경감님도 광역수사대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죠?” “네, 광역수사대 경제과 소속이 됐네요. 앞으로는 좀 더 편하게 보험사기 사건 공조를 요청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하!” 함 기자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보충하며 다시 슬쩍 화제를 강준에게로 돌렸다. “그나저나 박 대리님에 대한 궁금증을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일개 보험조사관이 마닐라까지 가서 살해당한 김상훈의 시신을 찾아준 것이나…… 배필립의 정체를 밝힌 것이나 말이죠.” “그건 엄연히 광역수사대의 이진철 경감의 활약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요?” 함 기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강준에게 꽂혔다. “언제 나오실 겁니까?” “네? 어디를 말입니까?” “앞으로 성원화재 안에서만 계시기엔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세상이 박강준 대리님에게 거는 기대가 있으니까요.” “전 일개 보험조사관입니다. 성원화재 밖에서 뭘 하려는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강준은 단호하게 함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함 기자는 그 답변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일부 대기업들에서는 퇴직한 보상 직원들로 구성된 독립 보험조사팀에 사건을 많이 의뢰하는 거로 압니다. 일종의 업무 아웃소싱이죠!” 바야흐로 비정규직의 시대였다. 좋든 싫든. 자의든 타의든. 강준은 머지않은 시기에 성원화재를 나가야 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