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실종자 사건의뢰 (3)2022.02.04.
2007년 3월. 필리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강준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김종문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강준은 남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됐다. 송종철의 파라나케(Parañaque) 빌라에서 김진아의 시신을 발견하고 현지 경찰에 신고한 건 바로 강준이었다. 더군다나 배필립이 사건추적 24시에 나온 강준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강준은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켰다. 현지 통신사의 신호가 잡혔을 때, 강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저 박강준입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강준이 연락한 사람은 마닐라에 미리 도착해 있던 이진철의 필리핀 파견수사대였다. * * * 김종문은 필리핀에 도착해 말라떼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자신을 마중 나온 번듯한 리무진에 고급호텔! 그리고 밤새 이어지는 술자리와 유흥. 마음속 한편에 찜찜함은 있었지만, 김종문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는 배필립에 대한 호감은 그가 범죄자이건 살인자이건 상관없었다. “저기 김 부장, 오늘 밤에는 어디서 보기로 했나?” “대표님께서 직접 다운타운으로 나오시기로 했습니다. 여유 있게 저녁 드시고 사우나 즐기시다가 만나 뵈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녁을 같이 안 먹고?” “네, 대표님이 선약이 좀 있으셔서요.” 김종문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김 부장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그 선약이 혹시 전에 얘기했던 로이첸 그 사람이랑 하는 자리인가?”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가 좀…….” “아휴! 뭐 그렇게 비밀이 많아? 나랑 배 대표가 아직 그거밖에 안 됐나?” 에둘러서 불만을 표시하는 김종문이었다. 김 부장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근데 김 부장은 여기 필리핀에는 언제 온 거야?” 계속해서 말을 걸어 보는 김종문이었다. “원래는 캄보디아에 있다가 2년 전에 이쪽으로 왔습니다. 전에도 배필립 대표님 밑에서 일을 했었고요.” “그래? 어떤 인연으로 일하게 된 건데?” 전보다 질문이 많아진 김종문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카지노에서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배 대표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죠.” “오! 거기도 카지노가 있나 보지?” “그럼요, 국경 지대에 카지노를 만들어 이웃 나라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이죠.” 김종문은 그제야 자신의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종문이 필리핀 사업에 빠져든 건 카지노 때문이기도 했다. 배필립은 김종문이 방문할 때마다 카지노의 VIP룸을 잡아줬고, 그때마다 김종문은 몇천만 원씩의 돈을 땄었다. 그런 김종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김 부장은 넌지시 운을 띄웠다. “김 대표님, 오늘 밤 자리 한번 마련해 둘까요?” “……허험…… 뭐, 이따가 시간 봐서…….” 리무진은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김 부장은 김종문의 캐리어를 끌고는 스위트룸까지 안내했고, 정중히 고개를 숙인 다음 객실을 빠져나왔다. 객실 복도를 빠져나온 김 부장은 차가운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 호구 새끼, 내가 언제까지 똥 닦아 줘야 하는 거야! 쯧!” 그때 김 부장을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김종문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들어온 강준이었다. 똑! 똑! 잠시 후 객실의 문이 열렸고, 놀란 김종문이 강준을 안으로 들였다. “아니, 왜 이래? 보는 눈이 많을 텐데…… 진짜 당신 말대로 배 대표가 위험한 사람이면, 당신 지금 나를 위험에 빠트리는 거야.” “일단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강준은 김종문의 팔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오늘 밤 그가 배필립과 약속을 한 것도 알게 됐다. “아마 오늘은 배 대표와 만나지는 못할 겁니다.” “뭐? 그걸 박강준 네가 어떻게 알아?” “배 대표한테 또 다른 호구 한 명이 걸려들었거든요.” “호…… 구?” 인상을 찌푸리는 김종문이었다. 눈치 없는 그도 강준이 자신을 호구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김 사장님이 한국에서 하기로 한 역할이 뭡니까?” “그야…… 한국지사지. 한국 투자금은 내가 세운 회사를 통해서만 모집되고 수익금도 그 회사를 통해서 배분되는 거고…….” “만약 또 다른 누군가가 한국에서 투자금을 모집한다면? 그건 배필립이 사장님을 배신하는 거네요. 맞죠?” 떨떠름한 표정의 그였다.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죠.” “이게 뭐야?” “위치추적기요. 어디 계시든 저희가 찾을 수 있는 겁니다.” 강준이 건넨 위치추적기는 목걸이 형태였다. 금줄로 된 싸구려 목걸이 같았지만, 안에는 GPS와 통신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전자장치가 들어 있었다. 김종문은 목걸이를 채워 걸면서 강준에게 물었다. “근데, 너 여기 혼자 온 거 아니냐?” “저라고 목숨이 두 개겠습니까? 회사에서 지원인력을 한 명 더 붙여 줬습니다. 물론 이 위치추적기는 제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거고요.” 강준은 이진철의 광역수사대 특별팀이 마닐라에 와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지원인력을 보냈다는 건 진짜였다. 최은정 팀장은 강준에게 특별 휴가를 주면서 송지희에게도 똑같은 기간의 휴가를 줬다. 휴가 동안 강준을 지원하는 건 그녀의 자유였지만, 그녀는 강준을 따라나서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송지희는 국내 대기업 후계자의 애인 행세를 하며 배필립에 접근한 상태였다. 오늘 배필립이 김종문을 만나지 못하는 건 바로 송지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와 이런 것도 해 보고 참……! 이제 난 모르겠다!”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 김종문이었다.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문제가 생기시면 바로 연락을 주시고요.” “아, 그럼 알았어. 나 사우나로 몸이나 풀 생각이니까 얼른 가서 일 봐.” “알겠습니다. 그럼 또 뵙죠.” 강준이 객실을 나서자마자 김종문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채원아! 어디냐? 오빠 방금 도착했다!” ―어머! 진짜! 나 지금 배 대표 빌라인데 내가 눈치 봐서 그쪽으로 갈게. “알겠어. 좀 있다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 저번에 갔던 그 해산물 식당 어때? 크크! 좋지!” 전화를 끊은 김종문은 거울을 보며 씩 웃었다. 강준이 미처 읽지 못한 김종문의 기억이 있었다. 그건 필리핀에 올 때마다 같이 지냈던 채원에 대한 기억이었다. 채원. 그녀는 연남 골드에서 일하던 여종업원이었다. 한때 애인이었던 최기동은 방화 혐의로 구속됐고, 그녀의 뒤를 봐주던 전대성 회장이 그녀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동업자인 배필립의 근거지에 자기 사람을 떡하니 박아 둔 격이었다. “박강준 너만 똑똑한 줄 알지? 나도 믿는 구석이 있다고, 흐흐!” 20억 원의 자금을 투자하게 만든 것도 채원의 설득 때문이었다. 김종문은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따서 마시고는 호텔 사우나로 향했다. * * * 킹스호텔 VIP룸. 송지희는 진짜처럼 보이는 명품 이미테이션으로 치장을 하고 배필립을 기다렸다. 이진철 경감의 광역수사대가 인근에 있긴 했지만, 그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죠. 기다리시는 동안 딜러분과 몇 게임 하고 계시면 대표님께서 금방 도착하실 겁니다.” 몸에 딱 맞는 짧은 셔츠를 입은 김 부장은 딜러에게 직접 몇 가지 사항을 지시하고는 송지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젊은 나이의 송지희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김 부장이었다. 과일주스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인 송지희는 능숙하게 칩을 딜러에게 걸었다. “블랙잭 할게요.” “오케이!” “……스플릿(split)!” 카드를 몇 장 받아든 송지희는 자기 앞에 놓인 칩을 세 장의 카드 중 하나에 몽땅 걸었다. “21!” 딜러는 칩을 한 뭉치 가져가 송지희의 앞에 내밀었다. 그때, 누군가 VIP룸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공사다망해서요!” 두꺼운 어깨에 건장한 체격, 남들이 봐줄 만한 호감 어린 인상의 남자는 배필립이었다. 송지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인상의 그가 정말 배필립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송민정이에요.” 광역수사대에서 만들어준 그녀의 가짜 신분이었다. “반가워요. 이렇게 젊은 아가씨를 보니까 기분이 아주 좋아지네! 허허!” 언뜻 무례한 것 같기도 한 배필립의 인사는 송지희를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배필립 대표님이신 거죠?” “왜요? 아닌 거 같아요?” “기사에서는 얼굴까지는 안 나왔잖아요.” “아? 그 기사 보셨구나? 세상 사람들이 참…… 어찌나 제멋대로 떠들어대는지.” 자신이 등장하는 시사뉴스닷컴의 기사를 배필립도 확인한 듯했다. “좌우간 우리 일 얘기부터 할까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젊은 아가씨가 화끈하네! 본론부터 바로 말하자고 하는 거 보니까.” 배필립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전 비즈니스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이거 투자하면 얼마나 벌 수 있는 거예요?” “수익률을 말씀하시나 본데…….” “네, 전 복잡한 건 딱 질색이거든요.” “그러니까 매달 이자 조로 15%는 가져간다고 보셔야지? 흐흐!” 배필립은 짭짤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돈 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거뿐이에요? 꼴랑 15%?” 송지희는 상대를 자극했다. “꼴랑……? 크하하! 거, 아가씨가 말을 너무 막하네…….” “솔직히 말해서 그렇잖아요. 100억 원을 현금으로 박고 시작하려는 건데, 저한테 이거보다 더 괜찮은 제안해 오는 사람 많아요.” 송지희는 재벌 남자친구의 100억 원을 관리해 주는 송민정이라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다. 배필립은 이미 20억 원의 선금을 넣은 김종문보다는 아직 따먹지 않은 100억 원을 손에 쥔 송민정이 훨씬 더 중요했던 거였다. “그럼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업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빠를 거 같은데? 안 그런가?” “다른 데로 자리 옮기자는 거예요?” “그렇지. 여기서 아무리 입으로 서로 털어 봐야 나를 믿겠어?” “좋아요!” 송지희가 긍정의 답을 하자 VIP룸에 있던 김 부장을 비롯한 배필립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잠깐만요. 저 포대 자루 같은 거 안 써요. 그렇게까지 따라가고 싶지도 않고요.” 잠시 당황하는 눈초리의 배필립이었다. “그래! 알겠어. 뾰족하게 굴 거 없어. 맘 편히 놔. 서로 기분 좋게 가자고.” 배필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김 부장에게 눈빛으로 무언의 지시를 내렸다. 김 부장은 정중한 태도로 송지희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송지희의 손에서는 땀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핸드폰을 손에 꼭 쥐었다. “그 핸드폰 여기 필리핀에서 구매하신 겁니까?” “네. 그런대요. 왜 그러시죠?” “저희가 보안이 좀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그 핸드폰은 제가 잠시 맡아 둬도 될까요?” 김 부장은 송지희에게 정중한 말투로 부탁한 것이지만, 밀폐된 엘리베이터에서 그 부탁은 송지희에게 일종의 강압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