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아내 살인사건 (3)2022.01.28.
컹컹! 컹컹컹! 어느새 대형견인 셰퍼드가 강준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맹렬히 짖었다. 목줄이 있었지만, 배필립과 부하들 그 누구도 그 목줄을 쥐고 있지 않았다. 강준은 세퍼트의 단단한 이빨에 물려 버릴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박 다니엘 너 정체가 뭐야? 나를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온 거야? 겁대가리 없이!” ‘큭큭’대며 웃다가 싸늘하게 표정이 식은 배필립은 강준을 말없이 노려봤다. 컹컹! 컹컹컹! 둘의 침묵에도 아랑곳없이 세퍼트는 더 맹렬하게 짖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던데요? 곽재환…… 그분도 파운샵 투자에 참여하신다면서요……?” 강준이 필리핀에 오기 전 그에 대해 알아낸 또 하나의 정보는 그가 국내의 다단계 회사를 운영하는 곽재환과 최근에 접촉했다는 점이었다. 그 정보를 강준에게 제공한 사람은 시사뉴스닷컴의 함지훈 기자였다. 함 기자는 곽재환의 다단계 회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미 배필립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박강준 대리님, 이거 가셔서 월척을 낚으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곽재환 이 인간이 아주 유명한 다단계 사기꾼이거든요.] 정보에 따르면 곽재환이 배필립을 보러 필리핀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다단계 업계에 퍼졌고, 새로운 사업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돈 것이었다. “하여간 인간들이 참 입이 싸! 곽재환 그 인간도 별수가 없구먼, 그래!” 입꼬리를 지그시 올리면서 비웃는 배필립이었다. “근데 넌 전당포 한다는 거 맞아? 또 무슨 나한테 사기나 치려고 온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강준은 가져온 서류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놨다. 그건 다수의 사람이 돈을 빌려준 채권 서류였다. “제가 그간 고객들과 거래한 소소한 대출서류들입니다. 제 신분인증 때문에 가져온 거고요.” 그 채권 서류는 흑곰이 운영하던 사채 사무실에서 압수한 물품들이었다. 채권 효력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은, 그야말로 증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유효했을 채권 서류 더미는 배필립을 속이기엔 적당했다. “영업을 아주 열심히 하셨구먼! 연남시…… 이쪽이 주 무대인가 보네?” “네, 거기도 알음알음 하우스들이 열리곤 하거든요. 제가 거기에 고객들 도박자금 대주고 하면서 영업을 텄었습니다.” “그럼, 거기에 누구 아는데?” 배필립은 당장 국제전화기를 손에 들면서 질문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거짓말한 게 그대로 들켜 버릴 수도 있었다. “박성우 부장 소개로 일을 했었는데…….” “뭐? 박성우…… 그 새끼 빵에 들어가지 않았나?” “네, 그래서…… 저도 새로운 사업을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뭔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배필립은 강준이 내민 채권 서류들을 더 믿는 눈치였다. “나 바쁜 사람이니까 본론부터 말하자고, 창립 멤버로 미니멈 투자금액은 20억이야. 대신, 수익은 투명하게 공개하고 투자금대로 나누는 거고.” “전…… 투자도 투자지만, 같이 일을 했으면 합니다.”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배필립이 빤히 강준을 응시했다. “뭐, 나도 투자금만 홀랑 먹고 그러는 사람은 아니니까 편하게 말해, 편하게.” 배필립이 눈치를 주자 옆에 서 있던 부하가 셰퍼드의 목줄을 꽉 잡아당겼다. “제가 모집하는 금액의 10%를 받았으면 합니다.” “뭐? 10%씩이나?” “파운샵의 운영수익이 25% 내외라고 들었습니다. 10%는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해외사업이라는 게 말이야…… 그냥 돈놀이랑은 다르게 여기저기 이곳 공무원들한테 기름칠도 좀 하고, 필리핀 현지에서 파운샵 관련 시장조사다 뭐다 해서 이것저것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들이 많아요.” “……그럼…… 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강준이 바라는 건 박성우가 지목한 이태경의 아내 김진아의 시신이 묻혀 있는 장소였다. 굳이 깊게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강준은 회귀 전 경찰 시절의 본능이 작동했다. ‘이거 이진철한테 넘기면 바로 광역수사대로 진급할 규모의 건수다……!’ “아니…… 뭘 그렇게 서둘러서 결론을 지어? 먼 곳까지 날아와서 이렇게 칼로 자르듯이 딱 잘라 버리면…… 여긴 왜 왔어? 그냥 이메일로 하지!” 그 말을 하고는 배필립은 태연한 척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먹어! 일단 먹고 생각하자고. 그래야 머리도 팽팽 돌아가는 것이니까!” 테이블 옆에는 새끼 돼지 통구이가 놓여 있었고, 부엌일을 돕는 현지인 둘이 길쭉한 칼로 고기를 잘라 강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근데…… 박성우 부장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돈놀이하려면 뒷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희야 제3금융권도 아니고…… 누가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소개를 받은 겁니다.” “오…… 그래? 누구한테?” 집요한 배필립이었다. “아가씨한테요…… 원래 제가 처음에는 술집 다니는 아가씨들한테 돈을 꿔주면서 이 일에 뛰어들었던 거거든요.” 배필립은 이에 낀 고기 때문인지 혀로 앞니를 한번 훑더니 낄낄거리며 강준을 바라봤다. “하긴…… 박성우 그 무식한 새끼가 싸움은 좀 하니까…… 그나저나 당신한테 진상은 안 피웠어? 자기 고집이 있어서 한 번씩 뒤집어 놨을 텐데…… 안 그래?” “뭐 서로 지켜야 할 것들만 지키면 문제는 없죠.” 강준의 대답을 들은 배필립은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비즈니스 앞에서 도덕과 법은 따지지 않겠다는 우회적인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동질감이라도 느껴지나 보지……?’ 강준은 동상이몽을 하는 배필립을 향해 살짝 눈웃음을 쳐줬다. 입안의 돼지고기가 아주 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배필립은 캄보디아에서 운영하던 도박사이트로 돈 더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다. ―너무 길게 해 먹지 말 것!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게 배필립의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과감히 사업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넘어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송종철은 그런 배필립의 철칙을 고대로 따라 배운 거였다. “배 대표님,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저도 20억 원이라는 돈을 그냥은 못 꼽습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서 파운샵 관련해서 대표님과 사업을 좀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정말 될 사업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꼭 25% 수수료가 아니더라도 다른 제 역할이 보일지도 모르겠죠.” “하하! 설마 내 사업 홀라당 벗겨 먹으려는 거는 아니지?” 배필립은 예비 동업자가 훅 치고 들어오는 걸 경계부터 했다. “여기에 아무런 커넥션도 없는 제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하긴 그야 그렇지. 필리핀에서는 어설프게 설치다가는…….” 갑자기 배필립은 의자 아래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강준을 향해 겨눴다. 그는 항상 권총을 휴대하고 지닌 듯했다. 강준의 몸이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따당! 이렇게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는 수가 있거든!”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낄낄대는 배필립이었다. “…조심해야겠군요…….” “좋아! 그럼 당분간 마닐라에서 지내도록 해. 나랑 같이 사업 세팅을 한번 해 보자고!”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강준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배필립은 그 손을 거만하게 보더니 슬쩍 잡았다. “잘해 보자고!” 강준은 그 순간을 이용해 배필립의 기억을 읽었다. 혹시나 모를 이태경의 죽은 아내와 관련한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배필립의 기억은 온통 핏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성과 함께 하얀 벽에 뿌려지는 피, 그가 직접 살해한 사람들이었다. “허……헉!” 강준은 그 기억을 계속 읽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강준은 배필립이 생각보다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강준은 필리핀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로 총기를 구매해야 할지도 몰랐다. * * * 말라떼 인근 호텔. 처음부터 배필립은 많은 걸 강준에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파운샵이 얼마나 잘 될 것인지 화교들이 그걸로 얼마나 돈을 벌어 성공했는지를 강조할 뿐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 술에 취하게 했다. 적당히 즐기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다른 투자자들을 물어오라는 의미였다. “어디 가십니까?” 강준의 호텔 방을 지키던 배필립의 부하가 물었다. “한잔 더 하고 오려고요. 같이 가실래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강준을 자신의 차로 안내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준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내가 너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거든!” 강준은 그를 주차장 한구석에다 끌어다 두고는 차 키를 빼앗아 밴에 올라탔다. 파라나케(Parañaque). 강준이 며칠간 배필립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기억을 읽으며 알아낸 송종철의 예전 빌라 주소지였다. 빌리지 입구에서 관리인의 검문이 있었지만, 차량 번호를 본 관리인은 이내 차량을 통과시켰다. 유유히 차량은 빌리지 안쪽 깊숙한 곳의 빌라에 도착했다. 작은 수영장이 딸린 조용한 빌라였다. 강준은 차를 파킹시키고 내부를 살폈다. 컹컹! 컹컹컹! 빌라의 안쪽에는 배필립의 3층 저택에서 봤던 셰퍼드가 묶여 있었다. “여기가 맞네……이제 나랑 좀 친해졌는지 볼까?” 강준은 벽의 울타리 사이로 조심스럽게 넘어갔다. 셰퍼드의 짖는 소리는 더 커졌다. 컹컹! 컹컹컹컹! 셰퍼드에게 다가갔을 때 강준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빌라를 관리하는 현지인이었다. [어떻게 오신 거죠?] 더듬더듬한 영어로 묻는 관리인이었다. [미리 연락을 못 받았습니까? 미스터 송의 직원입니다.] 그제야 관리인은 경계를 풀고는 빌라 내부로 안내했다. 그때, 강준은 박성우에게 들었던 창고를 살펴봤다. 하지만 창고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마당에 창고가 있지 않았나요?] [전에 와본 일이 있어요……? 거기 개 묶어둔 데가 창고였습니다.] 강준은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셰퍼드를 바라봤다. [오늘 여기를 땅을 좀 파야 할 것 같군요.] [네, 땅을 파라고요?] 갑작스러운 지시에 당황하는 관리인이었다. 강준은 그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어깨를 만졌다. [삽 같은 게 있으면 가져오시죠.] 관리인의 기억 속에 누군가의 시체를 묻었던 장면은 없었다. ‘하긴…… 보는 눈이 많은 데서 그 짓거리를 했을 리는 없겠지. 어쩌면 저놈이 목격자일 수도 있겠군.’ 강준은 멀뚱히 서서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셰퍼드를 바라봤다. 그때, 먹구름이 끼더니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관리인은 불만을 토로할 눈치였지만, 물러진 땅은 오히려 작업하기가 편할 것 같았다. 퍽! 퍽! 퍽! 강준과 관리인은 번갈아 삽으로 땅을 파헤쳤다. 한참을 그렇게 파고 내려갔을 때, 아래에서 비닐에 쌓인 물체가 나타났다. 강준은 조심스럽게 비닐에 쌓인 백골을 확인했다. [폴리스! 폴리스에 연락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