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아내 살인사건 (1)2022.01.26.
이태경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유명 로펌의 변호사를 선임해 보험사기에 대한 재판에 대비했다. 애꿎은 노숙자들만 보험사기로 이리저리 불려가는 형국이었다. 그들은 애당초 법원 출석에도 제대로 응하지 못했다. 핸드폰도 없고 주소지도 없는 그들이 출석요구를 통보받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궐석재판으로 치러진 재판에서 그들은 벌금 150만 원씩을 선고받았다. 판사가 노숙인이었던 피고들의 형편을 참작한 판결이었다. 반면 양태식에 대한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경찰이 그를 주범으로 여기고 수배령을 내렸지만, 조사가 끝나고 곧장 구속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양태식은 도망자가 되기를 선택해 버렸다. 잡히면 무거운 형량이 내려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송종철에 대해서는 검찰도 기소를 포기했네요.” 포차에 둘러앉은 이진철은 한탄하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그간 수사했던 자료를 검찰에게까지 넘겼지만, 묵살되고 만 것이었다. 덕분에 경찰 조직 내에서는 이진철을 따돌리는 분위기만 더 확산됐다. “결국, 처벌을 받은 건 알량하게 백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받아 챙긴 노숙자들이군요. 이제 보험금반환 소송은 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쨌든 박 대리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경감님은 최선을 다하신걸요.” 이진철은 유성온천의 사방팔방을 헤집고 다녔지만, 김용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용식을 통해 밝혀내려고 했던 송종철의 자금 경로도 함께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김용식을 찾는 건 저도 한번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경찰들이 떴다는 소문이 그 바닥에서는 금세 퍼지는 거 같더라고요. 얼굴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강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김탁수 씨와 오민철 씨는 어디서 지내는 겁니까?” “글쎄요. 다시 노숙인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아마 본인들은 벌금형을 받은 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 덕분에 양태식의 혐의가 입증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요?” “그건 그렇죠.” “제가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이진철은 선뜻 강준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강준은 자신이 말했던 대로 연남 기차역을 다시 찾았다. 강준은 무료 배급소 앞만 지키고 있으면 하나둘씩 노숙자들이 모여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준의 예상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김탁수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만, 가을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막을 수 있는 두꺼운 잠바를 구해 입고 있었다. “김탁수 씨!” “어…… 보험사 양반 아니여? 뭐여…… 여기서?” “벌금형이 선고된 거 알고 계세요?” 강준은 김탁수의 옆에 있는 오민철과 다른 노숙자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야 모르지. 근데 지난번처럼 그런 일 또 없나? 한동안 편하게 지냈었는데 말이야……쩝.” “아! 그러니까 돈도 벌고 먹을 것도 잘 먹고 얼마나 좋아.” 강준은 그들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여러분들 그거 범죄행위입니다. 한 번 더 그런 짓을 하다가 적발되시면 감방에 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술도 맘대로 못 먹고, 가고 싶은 곳도 못 가고, 교도소의 규율대로 움직이셔야 하는 거라고요!” 노숙인들에게는 자유를 빼앗기는 게 제일 두려운 일이었다. “그건 안 되지…… 암! 안댜!” 김탁수가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여러분들이 받은 보험금…… 그거 다른 사람이 낸 보험금입니다. 여러분들이 과다 청구한 병원비는 결국 다른 보험계약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거라고요.” “우리는 그런 것까지는 몰랐지…… 그냥 돈 벌 수 있다고 하니께, 양태식인가 하는 그 싸가지 없는 놈 따라간 것이여…….” 강준은 그들을 더 질책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또 그런 보험사기의 유혹에 취약하게 놓이게 놔둘 수만은 없었다. “김탁수 씨, 오민철 씨…… 제가 지낼 곳을 소개해 드릴 수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거기가 뭐 하는 데인데, 그랴? 병원만큼 좋은 데여?” “저희 보험회사에서 운영하는 복지재단의 시설입니다. 물론 병원만큼 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거기서 기술을 배우시면 다시 일자리를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일자리라는 말에 노숙인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인력시장에 나가도 결국은 선택받지 못해 왔었다. “……글씨, 생각을 좀 해 봐야것는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같이 갈 수 있는 것이여?” 강준은 실은 수사에 협조했던 김탁수와 오민철의 자리밖에 알아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일단 질러 보기로 했다. “네, 최대한 그렇게 하도록 해 보죠.” 강준은 노숙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서 본사에 있는 최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혹시 쉼터에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나요?” ―두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몇 명이나 데려오려고요? “상황이 좀 꼬였습니다. 한…… 열두 명 정도 되네요.” ―열두 명요! 박 대리님 이렇게 미리 협의가 안 된 상태에서……. “죄송합니다. 제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김탁수 씨와 오민철 씨의 입장이 완고합니다. 동료들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하네요.”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분명 저들을 찢어놓고 설득하면 충분히 넘어올 것 같았다. 하지만 강준은 재활과 사회 복귀라는 쉼터의 취지에 저들이 잘 들어맞을 거로 생각했던 거였다. ―알겠어요. 쉼터 쪽 담당에게 전화해서 임시로라도 지낼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볼게요. 강준 씨 진짜 앞으로는 이러면 안 돼요. 알죠? “물론입니다. 이번만 봐주십시오.” 강준은 일부러 앓는 소리를 했고, 통화음 너머의 최은정도 강준의 부탁이기에 한풀 누그러든 목소리였다. 성원화재에서 운영하는 쉼터는 최은정의 친모였던 이영란이 설립한 그룹의 복지재단 소속이었다. 이영란은 민영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업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재활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 김탁수와 오민철 같은 사람들이 다시는 알량한 보험사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말이었다. * * * 을지로 성원화재 본사. “그러니까 강준 씨 말은 이태경 원장이 아내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받아 챙겼다는 거죠?” “네, 정황상 그렇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없죠.”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우리 보험조사팀도 이제는 이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움직여야 해요. 안 그래도 이정훈 부장이 우리를 공격하는 빌미가 바로 그거고요. 우리가 사건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한다는 거죠…….” 강준으로서는 최은정 팀장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간 많은 보험사기 사건의 성과를 올리긴 했지만, 이번 이태경 원장의 사건은 그저 강준이 읽었던 그의 기억에만 증거가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태경 원장이 받았던 사망보험금은 성원화재가 아니라 한국보험에서 나간 돈이었다. “박 대리님 의견대로 송종철 사장이 이태경의 살인을 도왔다면 분명히 목격자가 있을 겁니다.” “준혁 씨까지 왜 그래요?” “제가 송종철한테 감금되어 있었잖습니까? 송종철 사장이 직접 일 처리를 하는 경우는 드물죠. 분명 다른 누군가가 이태경 원장의 아내 시신을 처리했을 겁니다.” 최은정은 이태경의 사건을 더 파헤치는 것이 꺼림칙했다. 필리핀에서 범죄조직을 운영했다던 송종철이라는 인간이 너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강준이 송종철의 조사에 집중하는 걸 원치 않았던 거였다. “짐작만으로 이태경 씨 사건을 다뤄서는 안 돼요. 이미 일진병원과 관련된 보험사기 사건은 종결됐고요.” 이번에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송지희도 말을 거들었다. “저도 일진병원에서 일했던 간호사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태경 원장에 대한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긴 한 거 같아요.” “지희 씨까지 왜 그래요……?” “마취제가 간호사 스테이션의 냉장고에서 계속 사라졌다는 얘기가 들려요.” “네? 마취제요?” “그때는 그냥 넘어갔는데…… 제가 이태경의 전 부인이 필리핀에서 죽었다고 얘기하니까 다들 화들짝 놀라더라고요.” “그럼 일진병원의 간호사들도 이태경 원장을 의심하고 있다는 건가요?” “간호사들도 진료기록 위조나 유령 환자들에 대해서 짐작은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전산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원장이 틀어쥐고 있었으니 자기네들도 확인은 불가했겠죠.” 최은정의 고민이 깊어졌다. “평소에는 흠잡을 거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주변인들도 더 의외라고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좋아요. 그럼 박강준 대리,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건지 말해 봐요.” 모두의 시선이 박강준에게로 집중됐다. “당시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태경 부부는 마카티의 한 고급호텔에서 묵었었습니다. 근데, 실종 당일 이태경이 밤늦게까지 호텔 카지노에 있다 돌아와 보니 아내인 김진아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이태경의 진술에 의한 거고요.” “그럼 강준 씨가 볼 때는 그 호텔까지 찾아가서 실종자 동선을 확인해 봐야 한다는 건가요?” “아뇨. 그보다 더 빨리 한국 내에서 확인해 볼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이태경은 입을 열지 않을 텐데…….” 강준은 한차례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뺑소니 살인미수로 송종철의 부하였던 박성우가 교도소에 복역 중입니다. 형기를 1년 반 정도 채웠겠네요.” 옆에 있던 김준혁이 놀란 듯 말을 보탰다. “맞아요! 송 사장의 궂은일은 전부 박성우 부장이 처리했거든요. 우리가 추측한 것처럼 이태경이 송종철에게 김진아의 시체 처리를 부탁했다면 분명히 박성우가 실제 뒤처리를 했을 겁니다!” 김준혁의 흥분한 반응과는 달리 최은정은 뭔가를 더 고심하는 듯했다. “잠깐! 박성우는 송종철 사장의 사람인데…… 정말 이태경의 범행 뒤처리를 맡았더라도 쉽게 우리한테 말하려고 할까요?” “하긴 그러네요. 감형이라던지…… 뭔가 구체적인 보상이 있어야 입을 열겠는데요?” 강준은 회귀 전 송종철 사장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고 있었다. 골드의 박영미가 전대성 회장을 배신했듯이 송종철의 부하들은 보스인 그를 배신하고 경찰에 정보를 넘겼었다. 결국, 양아치 판에서는 배신이 난무하기 마련이었다. “예전의 친구가 항상 친구일 수는 없죠.” “강준 씨,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박성우라면 감방 속에서 혼자 자신을 내버려 둔 송종철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일 것 같진 않네요.” “아…… 하긴, 보험사기를 신고하는 건수 중에 상당 부분이 함께 범행을 저질렀던 지인과 친구들이죠.” “제가 교도소에 있는 박성우를 만나서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분명 우리가 치고 들어갈 틈이 있을 겁니다!” 듣고 있던 김준혁이 손을 번쩍 들고는 끼어들었다. “저도 같이 갈 수 있나요? 필리핀에서 제가 그 새끼한테 쌓인 게 많거든요.” “김준혁 너는 당분간 본사 일에 집중해. 우리 보험조사 2팀 실적이 이정훈 부장의 1팀에 밀리면 되겠냐?” “그래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얼마나 당했는지요!” 강준은 사적인 감정이 남아 있는 김준혁이 함께 있어봤자 박성우를 설득시키는 데 방해만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요, 준혁 씨. 박 대리 말이 맞아요. 준혁 씨가 없으니 그간 우리 팀에 밀린 일이 많아요.” “아…… 그런가요.” 다행히 머리를 긁적이며 최 팀장의 말에 수긍하는 김준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