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사내정치2022.01.21.
어린 시절 최진태는 노상 빡빡한 과외에 시달렸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대단한 과외 선생들에게 수업을 받았지만, 그에 반해 도통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친모인 윤미경은 그런 아들을 닦달했지만 그럴수록 본처의 아들인 최진호와 격차는 더 벌어졌다. 결국, 최진호는 아버지인 최창식 회장의 기대를 듬뿍 받으면서 의대에 진학했고 반면 최진태는 지원한 학교에 모조리 불합격하고는 도망치듯 유학길에 올랐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잘난 이복형에 비해 최진태가 가진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달려드는 독기와 끈질김이었다. 최진태가 어른이 되고서 하나 깨달은 사실은 안되는 게 있다면 일단 그걸 부셔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 최진태가 자신의 경영권에 태클을 걸지도 모르는 여동생을 마침 옥상에서 맞닥뜨린 거였다. “은정아,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보험업계도 인수합병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순 없지 않겠냐? 우리가 한국보험 인수하기로 했다. 이름만 한국이지…… 솔직히 자금난 얘기가 나온 게 벌써 10년이 넘었다. 10년이!” “오빠…… 지금 제정신이야? 한국보험은 우리보다 덩치가 큰 곳이잖아.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돼?” “상식선에서만 생각하니까 너나 진호 형이나 그거밖에 안 되는 거야, 보험사기나 잡으러 다니고…… 네가 그러고 다니니까 그룹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 강준은 처음 접하는 얘기였다. 생명보험사 상장허가를 앞두고 최진태가 무리한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듯했다. 최진태는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최은정에게 계속 선을 넘는 말을 던졌다. “오호! 너 설마 여기 있는 박강준이랑 보험조사 한다면서 연애질이나 하고 돌아다녔던 거냐?” “오빠……! 그걸 말이라고 해!” 강준은 최진태의 노골적인 조롱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 이사님, 그만하시죠.” “뭘 그만해 이 새끼야! 넌 위아래도 몰라! 어디서 감히 나한테 그따위 말버릇이야!” 최진태는 강준에게 바짝 다가서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밀었다. ‘이 새끼를 확 그냥……!’ 어차피 최은정으로 노선을 정한 강준이었다. 그랬기에 최진태에게 무슨 말을 하건 거리낄 것도 없었다. “여기는 회사입니다. 이사 직급이시면 이사님답게 행동하시죠. 조금 전 발언은 마치 회사 휴게실에서 남의 뒷소문이나 퍼트리는 말단 직원의 모습으로밖에는 안 보이네요!” “너! 은정이가 너 감싸고도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내가 아주 잘근잘근 밟아 줘? 회사생활 못하게 만들어 줘?” 최 회장을 제외하고는 사내에서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던 최진태였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자기 말에 맞받아치고 있는 강준을 보자 무척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당혹감은 분노로 이어졌다. “벌써 성원그룹을 본인 손에 넣으신 것처럼 행동하시는군요. 제가 볼 때는 이사님은 아직 한참 부족하신 거 같은데요…….” “이…… 새끼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최진태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팔꿈치를 낚아챈 건 최은정이었다. “오빠, 여전하네. 안 되면 생떼 부려서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 “…….” 최진태는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왠지 모를 싸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이복형을 다시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최진태는 경영권 구도에서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거로 기대했던 최은정에게서 단단하고도 낯선 위협감을 느꼈다. ‘……그래 ……은정이 네 옆에 붙어 있는 저 기분 나쁜 녀석부터 박살 내 주마!’ 최진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독기어린 표정으로 둘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한발 물러선 듯 등을 홱 돌리고는 옥상에서 사라졌다. * * *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최진태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인사팀이었다. 지난 인사이동에서 이사로 승진한 이희성이 여전히 인사팀을 꽉 잡고 있었다. “이사님! 요즘 회사 분위기가 엉망입니다!” 이희성 이사는 최진태가 또 누구를 트집 잡으려는 지 머리부터 아파져 왔다. 본인이 인사팀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모든 걸 자기 맘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부당해고를 당한 직원들이 노무사를 찾아가는 일들이 많았다. 그렇게 되면 노동청에 소명해야 할 건수들이 수북이 쌓여가게 되는 거였다. “항상 분위기가 좋을 수만은 없죠.” 최진태는 자신의 말을 자르는 이희성 이사에게 슬쩍 눈치를 봤다. 최진태는 강한 자에게는 무모하게 덤비기보다는 한발 물러서는 살피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이희성 이사는 최진태에게 중요한 참모였기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은정이 말입니다…… 진짜 어떻게 좀 할 수가 없는 겁니까?” “최 회장의 최측근인 김성호 이사가 철벽처럼 감싸고 있는데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일단은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게 상책이죠.” “언제까지요?” “흐음…… 뭐 생각하고 있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최진태는 그제야 슬며시 자기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도 은정이를 못 건드린다는 건 동의합니다…… 그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할 수 있는 거라면……?” “은정이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겁니다. 팔다리 다 잘라 놓으면 자기가 혼자 아무리 잘났어도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희성 이사는 그 말을 듣고는 소름이 끼쳤다. 최진태의 끈질기고도 주도면밀한 성격으로 봤을 때 그가 결국엔 차기 회장 자리를 차지하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비틀린 인성은 이희성 이사가 선뜻 그의 편에 설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박강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몇 가지 보험사기 건을 잡은 걸 가지고 너무 회사에서 띄워준 거 아닌가 해서요. 이제는 잘났다며 이사 직급인 저까지 무시하는데…… 아주 안하무인이더군요!” “제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최 이사님 말대로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조직 분위기를 해치는 건 용납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희성 이사는 최진태의 말에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조처를 말하진 않았다. 이희성은 속내로는 굳이 대놓고 최은정과 척지고 싶진 않았다. ‘누가 차기 회장이 될는지 아직 모르니까…….’ 최진태는 그런 이희성의 속도 모른 채 자기 말을 들어주는 이희성 이사에게 독백 같은 자기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희성 이사는 자신이 서 있는 최진태 라인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점점 커져만 갔다. * * * 번암주류. 강준이 연남시에 내려가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번암주류의 사장 장재식이었다. “김용식은 저도 그 이후로 소식을 못 들었어요. 필리핀에서 건너오는 자금 관리는 김용식이 맡아서 하던 건데…… 현금 보관창고를 털렸으니, 전대성 회장이 김용식을 가만 놔두지는 않았겠죠.”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적어도 연남시 바닥에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장재식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연남시 곳곳에 아는 후배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을 통해 장재식은 연남시의 조직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꿰고 있었다. “어! 박강준 대리님 언제 오셨어요?” 막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지난번 강준이 부친의 보험금 지급을 도와줬던 우영철이었다. 그는 막 배송을 마치고 돌아온 참인지 목장갑을 낀 채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오늘 온 겁니다. 아버님은 잘 지내시죠?” “덕분에 간병인을 붙여 드렸더니 회복이 좀 되셨어요.” “다행입니다. 더 좋아지실 겁니다…….” 우영철은 목장갑을 벗어 강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로서는 반가움의 인사였다. 그 순간 읽힌 그의 기억에서는 이전보다는 더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참! 양태식이 나온 거 아시죠?” “양태식이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양태식이었다. 1심에서 징역 15년을 받았었다. 그리고 항소심은 꽤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변호사를 붙여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치소에 있어야 할 양태식을 직접 봤다는 우영철이었다. “……지금 그 인간은 감방에 있어야 할 텐데…….” “아뇨, 제가 분명히 어제 술집에서 봤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남자랑 둘이 있었는데. 그 남자는 누군지 모르겠고요.” “혹시 하얗게 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진 않았나요?” 강준이 추측한 양태식 옆의 남자는 필리핀에서 입국한 송종철 사장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어! 맞아요! 카라 티셔츠의 깃을 빳빳하게 세웠는데 한눈에 봐도 양태식이랑 어울릴 만한 양아치 같더라고요.” “혹시 그 술집이 어디였나요?” “연남기차역 뒤편에 새로 아파트 들어섰잖아요. 거기 근방 술집에 있더라고요.” “영철 씨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뭐든 말만 하시죠.” 강준의 말에 우영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는 부친의 보험금을 받아준 강준에게 마음속 깊이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얗고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이 제가 찾고 있는 송종철이라는 사람입니다. 혹시 배송 일을 하다가 양태식이나 송종철을 보게 되면 제게 연락을 주실 수 있나요?” “밤늦게라도 상관없나요?” “물론이죠. 24시간 전화 받습니다. 하하!” 책상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재식이 강준에게 놀란 듯 되물었다. “잠깐, 송종철 그 양반이 지금 연남시에 있다고요?” “저도 몰랐는데, 방금 영철 씨가 찾았네요.” 우영철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장재식은 그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고, 네가 봤다는 그 양아치…… 수배 중인 사람이거든.” “아…… 그럼 제가 박강준 대리님을 벌써 도와드린 격이네요.”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 장재식의 말에 우영철은 기뻐하는 얼굴로 강준에게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든 그 하얀 머리 인간 보이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우영철의 장담과는 달리 며칠 뒤, 강준에게 걸려온 소식은 송종철이 아니라 양태식에 관한 내용이었다. 강준은 이른 아침에 우영철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박 대리님, 양태식이 지금 노숙자들하고 같이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요? “네? 노숙자요……?” ―네, 딱 보기에도 노숙자들이 맞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양태식이 절대 어울리고자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설마 봉사활동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영철 씨, 지금 거기가 어딥니까?” ―연남역 근처에 한밭해장국이요. “고맙습니다.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깐만 거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휴! 물론이죠. 제가 딱 지켜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오십시오. 강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차 키부터 주워들었다. 양태식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