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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법정후견인 (3) (47/250)

047. 법정후견인 (3)2022.01.16.

“혜정아, 잘 지냈어? 학교는 좀 어때?” 송지희는 아직 9살에 불과한 혜정이에게 편한 질문부터 던졌다. “학교가 멀어져서 불편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친구들하고는 잘 지내?” “네…….”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하는 혜정이였다. 갑작스럽게 부모를 잃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인 걸지도 몰랐다. 강준은 가져온 케이크를 꺼내 놨다. 그제야 혜정이는 조금 관심을 보이는 듯 몸을 돌렸다. “저기…… 혜정 양, 우리 회사 보험금은 분할해서 지급하고 나머지 액수는 혜정 양이 성인이 됐을 때, 한꺼번에 지급하는 거로 고모와 얘기가 됐어.” 혜정이는 그 말을 이해한 건지, 보험금 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 여기 포크! 뭐든 잘 먹어야 많이 크지.” 강준은 케이크를 한 점 뜨고 있는 혜정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혜정이가 미처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강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혜정이의 기억은 한종태가 허겁지겁 뭔가를 찾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창고에서부터 집안 곳곳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더니 짜증이 솟구쳤는지 연신 입으로는 욕설을 내뱉으며 물건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시발!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한쪽 구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혜정이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촌 뭐 해?” “너 안 잤어? 얼른 들어가서 자! 삼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괜한 짜증을 아이에게 푸는 한종태였다. “삼촌…… 혹시 그 농약병 찾는 거야?” “뭐? 너……!” 당혹스러움도 잠시. 한종태는 이내 혜정이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어깨를 잡고는 강압적인 말투로 소리쳤다. “너, 그거 어딨는지 봤어? 지금 어디 있어?” “……내가 버렸어.” “뭐어? 버렸다고!” 한종태는 황당하면서도 섬찟했다. 왜냐면 혜정이가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렸어.” “뭐? 안에 내용물이 있을 텐데…… 그걸 그냥 쓰레기봉투에 넣었다고?” “어, 청소부 아저씨가 그냥 쓰레기차에 던져서 싣고 가던데……?” “혜정아, 너 그 말이 사실이야? 삼촌한테 거짓말하면 안 된다.” “……삼촌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없어?” “내가? 내가 무슨…… 너 혹시…….” “걱정 마. 삼촌. 나 아무한테도 안 말해.” 9살이라 혜정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건 어른들의 착각이었다. 혜정이는 외삼촌인 한종태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모두 다 알고 있었다. “혜정아, 그거 말이야…… 삼촌 친구가 농약사 하는 거 알지? 거기서 텃밭 가꾸려고 샀던 건데, 잘못 사서 바꿔오려고 찾았던 거야.” “……알아.” “네가 아니까 다행이네. 하하…….” 한종태는 안도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혜정이는 그런 한종태를 뒤로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공간.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들을 모아두는 곳은 혜정이의 옷장이었다. 혜정이는 옷장을 열고는 가장 구석에 숨겨둔 통을 꺼냈다. 그건 녹색 결정체들로 보이는 그라목손 성분의 제초제 통이었다. 그리고 혜정이의 기억은 눈앞을 가리는 눈물로 끝나고 있었다. 강준은 그간 한종태의 기억을 읽으면서도 왜 살해 시도에 사용한 제초제를 찾을 수 없었는지를 이제야 이해했다. 한종태 본인도 제초제의 향방을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기억을 다 읽은 강준은 다시 한번 혜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한테 상처 주면서까지 억지로 옷장에 있는 제초제 통을 뒤지고 싶진 않네…….’ “혜정아, 삼촌이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포크로 케이크를 집던 혜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잔인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녹색 제초제 통…… 왜 숨긴 거야?” 강준의 질문에 혜정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는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엉…… 엉…… 외삼촌이…… 없어질까 봐서요…… 흐엉!” “혜정아, 지금 너한테는 고모가 있잖니. 그리고 사람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더 큰 죄를 지어서 정말 영영 못 볼 수도 있어.” 옆에 있던 송지희가 영문을 모르는 상황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박 대리님,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혜정아, 괜찮아. 울지 마. 이제 너를 지켜줄 어른들이 있잖아. 속에 있는 거 있으면 감추지 말고 얘기해. 언니가 들어줄게.” “엉…… 엉…… 정말 외삼촌이 저를 해치려고 한 거예요?” 울면서도 정곡을 찌르며 물어오는 혜정이였다. 송지희는 그 질문에 곧장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강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외삼촌은 돈이 잠깐 필요해서 그랬던 거야. 진짜 혜정이 널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 강준의 말은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송지희가 그런 강준의 답변이 의외라는 듯 돌아봤다. “……외삼촌 집 ……제가 쓰던 옷장에…… 있어요.” “그래, 고맙다. 혜정아. 속에 있는 말 해 줘서. 이제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할 거다.” 송지희는 울고 있는 혜정이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혜정이의 울음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 * * 이진철 경위가 한종태의 집을 수색하고 있을 무렵. 강준 일행은 인근의 농약사로 향했다. 푸른 농약사. 혜정이의 기억 속에서 한종태가 얘기했던 대로 농약사의 주인은 한종태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빛바랜 접이식 차양막 위로 낡은 간판이 걸린 농약사였다. 그 인근에서 농약과 농자재를 사기 위해 모이는 길목에 있는 가게였다. “종태요……?” 머뭇거리는 농약사 주인이었다. 그는 이미 동창인 한종태가 그 농약으로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면 함지훈 기자가 쓴 첫 번째 기사가 이미 포털에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네 한종태 씨가 여기서 사간 제초제가 발견됐습니다. 그 제초제로 조카를 살해하려고 했죠.” 이미 모든 걸 알고 왔다는 강준의 말에 농약사 주인이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에이! 내가 그 자식이랑 안 엮이려고 했는데…… 어째 이상하더라니까! 원래 그 그라목손이라는 게 독성이 세서 보통은 희석해서 쓰는 거거든요. 근데 종태 그 자식이 이상하게 원액으로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는지 몰라서…… 원액이라고 하고선 1/10로 희석한 걸 줬어요. 그냥 풀에다 바로 뿌리면 된다고 하니까, 좋다고 하고선 가져가더라고요.” 송지희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그 점이 이상했어요. 혜정이가 삼키기까지 했는데 몸에 별 이상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한종태의 살인 시도가 미수로 끝난 거로군!” 농약사 주인을 고개를 떨구며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제가 신고 안 한 게 혹시 문제가 되는 거요?” “음…… 사장님께서는 한종태의 범행을 정확히 인지한 게 아니라 짐작하고 계셨을 뿐이니까요…… 혹시, 법정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야 해 줄 수 있으면 해드려야죠.” 농약사 주인은 한종태와의 관계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그럼, 조만간 법정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살펴 가세요.” 강준은 버릇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농약사 주인은 무심코 강준의 손이 민망하지 않도록 살짝 마주 잡았다. 그때, 의도하지 않게 농약사 주인의 기억이 읽혔다. [사장님, 이거 어떻게 쓰는 거예요?] [그거 독성이 좀 있는 놈인데, 풀 제거하는 데는 직방일 겁니다!] [독성이 세요?] [이거 원액으로 마시면 바로는 아니지만, 며칠 내로 죽어요. 조심해서 다루셔야 해요.] [희석한 거 마시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거야…… 제조사에서 그런 얘기까지는 안 해 줬으니까 저도 모르죠. 아마…… 천천히 죽겠죠? 희석액이니까요.] [이거 희석액으로 3병만 주세요.] [3병씩이나? 어디에 쓰시게?] [남편이 사 오라고 하니까…… 저도 어디에 쓸진 몰라요.] 눈웃음을 지으며 그라목손 희석액 통을 받아드는 여자였다. 30대를 갓 넘긴 여자는 한눈에 살펴도 돋보이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농약사 주인의 기억은 강준에게 무척 의외였다. 한종태의 사건이 마무리되어가던 찰나에 맞물린 시점에 뭔가 석연치 않은 기억을 읽은 거였다. “사장님, 혹시 그라목손 사 간 사람 중에 이상한 사람 없습니까?” “이게 제초제로 효과가 좋은 거라…… 글쎄 잘 모르겠는데.” “희석액으로 3병 사간 여자가 있지 않았습니까?” “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놀란 표정의 농약사 주인은 질겁하듯 되물었다. “여기서 그라목손을 사 간 사람들을 경찰에서 조사를 좀 한 모양이더라고요.” 강준은 적당히 얼버무린다고 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더 놀란 건 송지희였다. 경찰이 그런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있지! 있어! 그 여자가 이 근방 마을에 산다고 누가 그랬는데…….” “원래 좀 알던 분이십니까?” 농약사 사장은 여자의 미모에 빠져 주변 지인들에게 여자에 관해 물어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장은 부끄러운 듯 말을 아꼈다. “아니…… 뭐 여기 자주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더라고, 요 앞에 슈퍼 김 씨가 말해 준 거요. 난 잘 몰라요.” “여기서 그라목손을 얼마나 사 간 겁니까?” “그때 한 번 오고 또 한 번 더 왔으니까. 희석액만 5병을 사 간 거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근데 그 여자 심상치 않아 보이네요.” “뭐가 심상치 않다는…… 혹시?” “네, 한종태 씨와 같은 일을 꾸밀지도 모르니까요.” “에이, 그런 사람 아닌 거 같던데. 얼굴도 그렇게 예쁜 여자가 왜 그런 짓을 해? 아닐 거야!” 강준은 더 농약사 사장을 추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여자에게 가진 사장의 연정을 굳이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며칠 뒤, 시사뉴스닷컴에서는 가스 폭발 사건의 유가족인 이혜정 양에 관한 심층 기사가 보도됐다. 법정후견인이었던 외삼촌에 의한 독살 미수사건이라는 제목의 자극적인 문구였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법정후견인 제도의 미비점에 대한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역시 함지훈 기자네요. 조카 살해미수 사건을 법정후견인 문제로까지 끌고 왔잖아요. “아마 함 기자의 보도가 아니었으면, 경찰에서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을 겁니다.” ―알고 있어요. 임철호 서장이 우리를 아주 경계한다고 하더라고요. 호호! 통화음 너머로 최은정 팀장의 통쾌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희 씨는 잘하고 있나요?” ―왜요? 걱정돼요? 염려 마요. 아주 잘 하고 있으니까요. 안 그래도 박 대리님만 연남에서 고군분투하시는 거 같아서 이번에는 김준혁을 내려보내려고 해요. “괜찮습니다. 본사에서도 할 일이 많을 텐데요. 더군다나 김준혁은 전산 담당이라 빠지면 업무 공백도 생길 겁니다.” 강준은 최 팀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그라목손 제초제를 사간 여자를 조사해 볼 요량이었다. 근데 그 타이밍에 김준혁이 오게 되면 강준으로서는 오히려 불편한 상황이 되어 버리는 거였다. ―송지희 씨가 당분간 김준혁 씨 공백을 메우게 될 거예요. 일종의 순환 근무죠 ……실은 이참에 김준혁 씨도 현장에 나가 바람도 쐬라는 의미예요. 그간 너무 고생했거든요. “글쎄요. 과연 바람 쐬는 게 될까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내려보내시죠.” 강준은 어쩌면 김준혁에게는 꽤 혹독한 현장 근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준은 농약사 사장을 만나고 온 후, 빙의하기 전 기억이 떠올랐다. 제초제를 이용한 일가족 연쇄 살인범! 농약사 사장의 기억 속에 있던 그 여자가 바로 그 연쇄 살인범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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