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법정후견인 (2)2022.01.15.
연남 가정법원. 판사는 엄중한 눈빛으로 한종태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미성년자인 이혜정 양의 법정후견인인 한종태 씨는 지난 2개월간 피후견인인 이혜정의 은행 계좌에서 5천만 원이 넘는 돈을 인출했어요. 맞죠?” “네, 맞습니다…….” “그에 대한 사용 내역을 제출하라고 요청했는데,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고요?” “판사님. 저희도 혜정이 엄마, 아빠가 죽는 바람에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았습니다. 장례비용도 그렇고…… 애한테 이것저것 해 줘야 할 것도 많았고요!” 판사는 원고 측을 바라봤다. 원고 측 변호사는 우영철의 손해배상 소송을 맡았던 민훈이었다. “장례비용은 시에서 지급된 피해보상금에서 사용된 것으로 확인이 됐습니다. 피고인 한종태가 인출한 돈을 사용한 곳은 그간 밀려 있던 개인적인 채무의 해소였습니다.” “피고 측, 사실입니까?” “그…… 그건, 혜정이 계좌에서 빼낸 돈이 아니라…….” “제2금융권에서 장기간에 걸친 상습적인 대출 연체가 있었는데, 법정후견인으로 지정되고 나서 바로 연체금 납부가 됐네요? 연체금 납부는 어떻게 한 겁니까?” 민훈이 한종태의 말을 자르고 발언했다. 하지만 한종태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뿐이었다. 방청석에서 그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녀는 원고가 새로운 법정후견인으로 지목한 혜정이의 고모였다. 그녀의 바로 옆자리는 강준과 송지희가 나란히 지키고 있었다. “염려 마세요, 고모님. 판사도 바보가 아니니까요.” 송지희는 혜정이 고모의 손을 잡고는 안심시켰다. “최종 판결하겠습니다. 피고 한종태의 이혜정 양에 대한 법정후견인 자격을 박탈합니다. 본 법정에서는 새로운 후견인으로 피후견인의 친족 고모인 이복희 씨를 새롭게 지정하는 바입니다!” 민훈 변호사는 제일 먼저 뒤를 돌아 강준을 바라보고는 이겼다는 듯 씩 웃었다. 한종태는 허리를 푹 숙이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판사가 퇴청하고 나자 강준은 피고인석의 한종태에게 다가갔다. “이제 시작인데 뭘 그렇게 힘들어해요?” “당신…… 보험사 직원 아니야? 아니 정말…… 그쪽은 어차피 보험금만 줬으면 됐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보험수급자가 제대로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저희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국과수에서 요구르트병을 분석 중이니까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나오긴 뭐가 나와! 그리고…… 내……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벌써 경찰이 백화점 CCTV에 한종태 씨가 요구르트병을 사서 화장실로 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한종태는 정곡을 짚는 강준의 말에 당황했지만, 끝까지 우길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아니, 화장실이야 소변 누러 간 거지. 내가 거기서 이상한 걸 넣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법정후견인 변경 소송에서는 승소했지만, 피후견인인 혜정이를 해치려 한 살인미수 건은 아직 수사 중이었다. 황 반장이 주도하는 형사과에 사건이 배당되어 수사 중이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핑계로 수사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험사 양반……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우리 혜정이를 위해서 그러나 본데…… 지금 혜정이 멀쩡해! 근데 뭐가 문제야? 이제 저 여자가 혜정이 데려가면 끝나는 거잖아?” 한종태의 말은 결과적으로 살인에는 실패했으니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어느새 강준의 옆에 와 있는 송지희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을 보탰다. “지금 당장이야 괜찮겠지만, 독극물로 인한 후유증이 나타날지도 몰라요. 그리고 혜정이가 외삼촌이라는 작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정신적인 충격이 어떻겠어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사람 의심하고 그러면 안 되지!”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한종태였다. 강준은 그런 그에게 다가갔다. “형법에는 엄연히 살인미수라는 죄가 있습니다. 특히 한종태 씨의 경우처럼 계획적으로 독극물을 준비해 살인 시도를 한 것이라면 빼도 박도 못하게 살인미수죄가 성립되죠.” 한종태는 예의 그 하얀 재킷을 걸쳐 입고는 무시하듯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살인미수의 형량은 살인죄의 절반입니다. 계획 살인이라면 판사가 형량을 깎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친족살인이니…….” “거참! 귀찮게 하지 말고! 좀 나갑시다!” 한종태는 길목을 막고 자신을 노려보는 강준과 송지희를 밀쳐내고는 법정을 빠져나갔다. “박 대리님, 국과수 결과를 기다려보시죠?” “결과가 뭐로 나오든 경찰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송지희는 조심스럽게 강준에게 물었다. “그야…… 직접 보게 되면 지희 씨도 알 겁니다.” 강준은 전직 경찰이었다는 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경찰서에 데려가서 함께 상황에 부딪히는 걸 보여줄 수밖에는 없었다. * * * 연남경찰서 형사과. “박강준 씨…… 우리도 보험사 쪽에서 이렇게 제보도 주고 하니까 참 고맙고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국과수 자료까지 보여줄 이유는 없는 겁니다!” 에둘러서 얘기하는 김형식 형사였다. 하지만 단호하게 강준을 배제하는 발언이었다. ‘나보고 더 개입하지 말라는 거네……!’ “한종태에 대한 수사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저희가 알아서 차근차근 진행할 겁니다. 먼저 들어온 사건들도 있으니까…… 순서대로 진행하는 거죠.” 김 형사는 반박할 수 없게끔 대답했다. 보다 못한 송지희가 나섰다. “애가 죽을 뻔했어요! 요구르트를 마시고는 청록색으로 얼굴색이 변했다고요! 분명한 독살이에요!” “아, 그건 국과수 결과에서도 나온 것처럼 요구르트병에 독극물이 검출된 건 사실인데…… 누가 넣었는지는 더 수사를 해 봐야죠.” “애한테 들어온 10억 원의 보험금!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김 형사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 송지희를 바라보며 오히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그러니까 수사를 그렇게 감정적으로만 해서는 안 돼요. 한종태가 살인을 의도했다는 게 확실히 입증되어야만 우리도 구속을 시킬 수가 있는 거니까…….” 강준은 더 얼굴을 붉히려는 송지희를 막아섰다. “알겠습니다. 경사님! 그럼, 앞으로 나올 수사 결과를 기다리죠.” “아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김 형사는 송지희의 팔목을 잡고 나오는 강준을 슬며시 살폈다. 그리고는 맞은편 구석에 있던 황 반장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김형식 형사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국과수 자료까지 나온 마당에 수사에 달려들지 말라는 황 반장의 지시가 언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저 보험사 직원 때문에 그런가…….’ 김 형사는 사건을 만들어 갖다 주는 박강준이 그리 싫지 않았다. 하지만 황 반장의 입장은 달랐다. 이미 임철호 서장으로부터 성원화재 보험조사팀을 멀리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김 형사가 화장실을 갔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왔을 때,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 그를 찾아와 있었다. “김형식 형사님, 안녕하십니까?” 시사뉴스닷컴의 함지훈 기자였다. 김 형사는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팍 구겼다. 그가 등장했다는 건 이미 뭔가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뭐 없습니다…….” 단칼에 그를 잘라내는 김 형사였다. “꼭 뭐 있어서 오는 건가요? 이런저런 분위기도 읽고 그런 거죠. 하하!” 너스레를 떠는 함 기자를 슬쩍 올려다보고는 얼른 시선을 피하는 형사들이었다. “지난번 백화점 요구르트 사건이요, 그거 국과수 결과 나왔다면서요? 도대체 뭐가 나온 겁니까? 청산가리? 농약? 그도 아니면 혹시…… 마약?” “다 틀렸습니다!” “그럼 뭡니까? 김 형사님?” “험험…… 말씀 못 드립니다.” 김 형사는 함 기자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 * * “제초제의 일종인 그라목손(Gramoxone)!” “네? 그라목손이었다고요?” “아니, 박 대리님이 혹시 아시는 물질인가요?” 강준은 형사 시절 그라목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농약에 널리 사용된 물질이었지만, 뒤늦게 유해성이 알려져 시판이 금지된 물질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준이 수사했던 살인사건 중에 그라목손이 함유된 농약을 조금씩 먹여 남편을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도 역시 보험금을 노린 유명한 살인사건이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농약 성분의 일종이 아닌가요?” “어떻게 그걸…….” “해외에서 그라목손이 들어간 농약을 남편에게 먹여 보험금을 타내려 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아…… 그런 일들이 다 있었군요.” 대충 해외 사례로 핑계를 대자 이진철 경위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수긍했다. 강준이 이진철과 항상 만나던 포차였다. 국과수 자료를 가져온 이진철과 사건 내용을 공유하고 있을 무렵, 또 다른 누군가가 포차 안으로 들어왔다. 형사과에 들렀다 온 함지훈 기자였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어때요? 허탕 치고 왔죠?” “박 대리님은 경찰도 아닌데 귀신이시네! 어떻게 알았대요?” 듣고 있던 이진철 경위가 말을 보탰다. “김형식 형사한테 따로 오더가 떨어졌거든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외부에 함구하라는 서장의 지시죠.” “와! 그 얘기 들으니까 더 파고들고 싶네! 기자들이 이렇습니다. 하하! 근데 여기는 처음 뵙는 얼굴이네요?” 함 기자가 강준의 옆에 있는 송지희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는 저희 보험조사팀에 새로 입사한 송지희 씨입니다. 이전에는 연남 중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었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송지희예요.” 새로운 인물을 알게 된 함 기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사뉴스닷컴의 함지훈입니다.” “알고 있어요. 저번에 가스 폭발 사건의 배후를 캐내신 장본인이시잖아요.” “아휴! 그건 전부 여기 있는 박강준 대리님이 소스를 준 겁니다. 전 그냥 받아썼을 뿐이고요! 하하!” 강준이 좌우 옆자리의 술잔을 채우며 잔을 들어 올렸다. “다들 모였으니 한잔합시다!” “뭐라고 건배할까요?” “함 기자님이 원하는 거로 하시죠.” “뭐, 정의구현 이런 거 외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강준의 싱거운 건배사에 함 기자가 입을 한번 삐죽 내밀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이진철 경위가 건넨 국과수 결과서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네요.” “독살이 확실합니다. 더군다나 한종태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어요.” “어떤 문제 말입니까?” “고정적인 수입이 없고 제2금융권의 빚을 지고 살았던 거 보면…… 분명히 재정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긴 합니다. 혜정 양 살해미수의 정황 증거이긴 한데…… 결정적인 물증이 없네요.” 이진철은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제게 맡겨주시죠.” 강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니…… 박 대리님이 어떻게 말입니까? 혹시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있으세요?” 함 기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왠지 이혜정 양이 뭔가를 알고 있을 거 같아서요…… 물론 조심스럽긴 하네요. 하지만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직 우리 쪽에서 지급하지 않은 보험금도 있고요.” “흠, 생각해 보니 이번 사건을 미성년자 법정후견인에 대한 문제로 끌고 갈 수도 있겠네요.” “네, 의외로 법정후견인인 친척에게 맡겨졌다가 아동학대를 당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강준은 실제 살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동학대라는 이슈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함 기자의 눈빛이 달라지는 거로 봐서는 그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듯했다. “지희 씨, 혹시 혜정이에게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아무래도 지희 씨가 일전에 혜정이를 도왔던 적이 있으니까…….” “당연히 같이 가야죠!” 강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꾸하는 송지희였다. “그리고 대리님…… 이제 저한테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건데, 저도 그편이 편해요!” “어…… 그, 그럴까?” 송지희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고는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술이 한두 잔 더 오갔을 때, 강준은 빙의한 후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