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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법정후견인 (1) (45/250)

045. 법정후견인 (1)2022.01.14.

후루루룩! 후루룩. 강준은 칼국수를 한 젓갈 떠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맞은편에는 본사에서 내려온 최은정이 말없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연남시 뉴월드 상가의 가스 폭발 사건에 대한 전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찰은 어젯밤 유력한 방화용의자로 지목된 성 씨를 연남시 모처에서 붙잡았다고 밝혔습니다. 성 씨는 자신이 소유한 점포의 재개발 이익을 위해 방화를 일으킨 것으로…….] 후루룩! 후루루룩. “이쯤에서 정리하려고 하겠죠?” “한 시장이 상황을 역전시켰어요. 오히려 사태를 재빨리 수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선전하고 있죠.” 최은정은 남은 칼국수 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놓고는 강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마 한 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면 우리 성원그룹에도 큰 변화가 올지도 몰라요.” “최진태 이사가 광폭 행보를 하겠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번에 업계에서 생명보험사도 증권시장에 상장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강준도 회귀 전 생명보험사의 상장 이슈를 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그게 우리와 관련이 있나요?” “우리도 성원생명이 있잖아요. 박 대리님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성원그룹은 자산규모가 큰 성원생명이 실질적인 지주사 역할을 해오고 있었어요.” “성원생명이 상장하게 되면…… 뭔가 큰 지각변동이 있다는 거군요.” “맞아요. 둘째 오빠는 성원생명을 상장하면서 신주를 발행해 경영권을 확보하려고 하죠.” 강준은 남은 칼국수 국물을 마저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최 팀장님은 그룹 경영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최은정은 입꼬리를 움직여 살짝 웃고는 체념한 듯 입을 뗐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니까요.” “야심이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어쨌든 하나 확실한 건, 보험계약자들의 돈이 허투루 쓰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 둘째 오빠가 경영권을 틀어쥐게 되면 성원화재와 성원생명의 돈이 연남시 문화복합단지 같은 어처구니없는 프로젝트로 줄줄 샐 거예요.” 최은정이 지적한 건 금산분리의 문제였다. 간단히 말해 은행이나 증권, 보험같이 고객이 맡긴 돈을 쥔 금융회사들이 금융 외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쪽에 돈을 퍼붓는 건 반칙이라는 얘기였다. 즉, 고객 돈으로 장난치지 말라는 거였다. 하지만 국내 보험업계는 예외였다. 은행을 갖지 못한 대기업들은 저마다의 보험사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으며, 그랬기에 대한민국은 실질적으로 은산분리만 작동한다고 봐야 했다. 최은정은 그런 금산분리의 입장에서 최진태 이사의 행보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최진태 이사도 지금쯤 아주 곤혹스러울 겁니다. 본인이 얽혀 있는 전 회장의 RS투자가 이번 뉴월드 상가 가스 폭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게 밝혀지게 되면…… 경영권 확보고 뭐고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강준 씨 말대로 밝혀질까요? 지금으로선 성병철이 RS투자에 관련됐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휴지로 입가를 쓱 한번 닦은 강준은 최은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쪽에서 계속 꼬리를 자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먼저 꼬리를 자르기 전에 밟히게 될 날이 올 겁니다!” 흑곰이 붙잡히자 가스 폭발 사건에 대한 수사는 급진전했다. 하지만 문제는 흑곰의 지시를 받았던 부하들이 이미 필리핀으로 도주해 버렸다는 거였다. 서로에게 책임을 미룰 수 있는 여지가 생겨 버렸다는 건 사건을 적당히 묻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저쪽에서 엄청난 변호인단을 붙였어요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강준 씨 말대로 RS투자와 연관되어 있는 거라면 전 회장 쪽에서 댄 거 아닐까요?” “성병철이 직접 댔을 겁니다. 전 회장이 이미 손절한 사람한테 돈을 쓸 이유는 없으니까요…….” 최은정은 실망한 눈초리였다. 강준이 기억하는 전대성은 냉혹한 사람이었다. 이용 가치가 떨어진 사람을 뒤돌아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강준은 칼국수 집을 나오면서 화제를 돌렸다. “팀장님, 그럼 떡집 부부 유가족에게 보상금은 지급되는 겁니까?” “지급해야죠. 자살이 아니니까요.”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남은 유가족이 어린 딸 한 명인데…… 그 애의 법정대리인인 외삼촌이 썩 믿음직스럽지 못해서요.” 최은정은 몸을 강준에게로 돌렸다. “강준 씨, 우리가 개인사까지 신경을 써줄 수는 없어요. 우린 서류대로 보험금을 지급하거나 아니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을 뿐이죠…….” “미성년자의 보험수익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도 보험사의 의무가 아닐까요?” 강준은 답답함을 느꼈다.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현실적으로 보험조사관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망한 부부가 들어놨던 민간 보험사의 사망보험금뿐만 아니라 지자체 차원에서 나갈 보상금도 있을 거예요. 다 합치면 10억 원 정도 되겠네요.” “선거 직전이라 그걸로 여론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거겠죠…….” 한승일 시장은 이번 사건에 대한 후속대책을 발 빠르게 내놓으며 여론을 뒤집었다.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도 그 대책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송지희 씨는 좀 어때요?” “열심히 합니다. 아무래도 병원 쪽 일에 익숙하다 보니 제 몫은 다하는 거 같고요.” “언제까지 연남시에만 있게 할 수는 없어요. 지금 본사 쪽에도 사건이 넘쳐나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지희 씨 올려 보내도 괜찮죠?” “네, 뉴월드 상가 보상 건은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강준은 차를 뉴월드 상가 건물로 돌렸다. 최은정 팀장은 재건축을 앞둔 뉴월드 상가 건물을 강준과 함께 둘러봤다. 화재 보상금을 내보내기 전 현장확인 차원에서였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시가지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런 풍경과는 대비되게 멀리서는 한승일 시장의 유세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 * * 연남시 S백화점 식품관. “아…… 아아…… 외삼촌, 속이 안 좋아…….” “뭐? 혜정아, 왜 그러냐! 배가 아파?” “아니…… 맛이 이상해…….” 5살 정도의 아이를 데려온 남자는 깔끔한 구두에 하얀색 자켓을 갖춰 입은 사내였다. “여기! 직원 어디 갔어! 여기서 샌드위치 먹고 애가 탈이 났잖아!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보다는 백화점 직원들에게 항의부터 했다. 그 와중에 아이의 얼굴은 더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애를 병원부터 데려가야지…… 그렇게 소리만 치고 있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보다 못한 중년의 부인이 아이의 상태를 보고는 남자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더 큰 목소리로 항의를 계속해갔다. “시발! 이것들이 장난하나! 샌드위치에 뭐 이상한 거 들어간 거 아니야? 이 새끼들아! 당장 책임져!” “손…… 손님, 진정하시고요. 일단 구급차 불렀으니까 곧 119 대원들이 올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땀을 뻘뻘 흘리며 곤혹스러워하는 직원이었다. 그는 샌드위치 가게의 직원이 아니라 백화점 매니저인 듯했다. 그만큼 남자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식품관 전체에 울려 퍼졌던 것이었다. “나! 이거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애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방송사에 연락할 거라고! 9시 뉴스에 나오게 해서 당신들 쫄딱 망하게 해 버릴 거라고! 알았어?” 남자의 일갈에 매니저는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고는 연신 무전기로 상황을 확인하면서 구급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군중 속에서 젊은 여자가 아이에게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아이의 머리를 무릎으로 받치고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넌 뭐야?” “아저씨, 소리만 지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애가 뭘 잘못 먹었으면 일단 토부터 하게 해야지!”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으웨웨엑! 으웩! 으웨웩!” 허옇게 멀건 토사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더 해! 더! 있는 거 다 쏟아내야 해!” “으웨에…… 에엑!” 본능적으로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속에 있는 걸 게워냈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이 여자의 어깨를 뒤로 잡아당겼다. “남의 애한테 뭐 하는 짓이야!”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자가 옷을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한종태 씨! 여기 이혜정 양의 법정대리인이죠?” “어…… 누구세요……?” 아이를 지켜보다가 속을 게워낼 수 있게 도와준 여자는 성원화재 보험조사 2팀의 송지희였다. 그녀는 강준의 지시에 따라 뉴월드 상가의 가스 폭발로 희생된 떡집 부부의 외동딸 이혜정 양을 주시하고 있었다. 본사로 올라가기 전 그녀의 마지막 업무였다. 그 마지막 업무에서 송지희는 이혜정 양의 법정대리인 한종태의 행적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샌드위치 가게를 가기 전 야쿠르트를 3개나 한꺼번에 먹였다는 점이었다. 송지희는 한종태가 야쿠르트를 구매한 시점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재빨리 혜정이에게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아이에게 정말 치명적인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원화재 보험조사관입니다!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예요!” “……무슨…… 짓을 하다니! 내가 얘를 어떻게 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너 뭐 하는 년이야!” 말은 더듬거렸지만, 상황을 파악했는지 밀리지 않고 반박하는 한종태였다. 그는 5살인 아이를 돌볼 만한 모습으로는 도통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이걸 분석해 보면 나오겠죠!” “너…… 그걸……왜 네가?” 송지희가 손에 들고 있는 건 한종태가 아이에게 먹이고 버렸던 빈 야쿠르트 병들이었다. “그거 당장 내놔……!” 한종태가 달려들어 그 병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송지희는 미리 그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 얼른 야쿠르트 병을 백화점 매니저에게 건넸다. “손님! 이거는 저희가 조사를 좀 해 보겠습니다. 저희 백화점의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문제였는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좀 전까지만 해도 굽신거리던 백화점 매니저는 이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한종태를 응시했다. “당신들……! 오늘 운수 좋은 줄 알아! 다음에 또 이러면……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 혜정아 가자!” 한종태는 계획한 일이 어그러졌는지 상황을 모면하려 아이의 손을 잡고는 급하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송지희는 꽁무니를 빼는 한종태의 모습을 보고는 한심하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아까 보험사 직원분이라고 하셨죠?” 빈 야쿠르트 병을 들고 있던 백화점 매니저가 송지희에게 다가왔다. “저 남자, 분명 아이에게 해가 되는 걸 먹였을 거예요. 아이만 없어지면 보험금 10억 원은 몽땅 자기 거거든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백화점 책임이라고 우기기라도 했다면…… 휴…….” “매니저님, 오늘 일 법정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나요?” “법정이요?” “네, 아이를 계속 저런 법정대리인 밑에 있게 할 수는 없잖아요?” 송지희의 요청에 백화점 매니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와드려야죠. 저도 저만한 아이가 집에 있거든요. 남 일 같지 않네요.” 그때, 송지희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이혜정의 법정대리인을 지켜보라고 했던 강준의 전화였다. “대리님, 말씀이 맞았어요. 한종태가 오늘 큰일을 저지를 뻔했어요. 박 대리님이 아니었다면 혜정 양이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송지희는 진심으로 박강준 대리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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