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가스 폭발 (4)2022.01.13.
제보자는 골드의 주인 박영미였다. 그녀는 김우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이 불투명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건 전대성의 왼팔이자 행동대장인 흑곰을 없애야 한다는 거였다. “나진패션도 벌써 매각하겠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전 회장은 애초부터 끌어안고 갈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 양아치 새끼…….” 박영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김우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고민에 빠진 김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기 너무 걱정하지 마. 흑곰 그 자식만 없어지면 전 회장이 의지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뉴월드 상가 재개발이 안 되면 우리도 난감해. 시기가 안 좋다. 시기가…….” “일이 잘못될까 봐 겁나?” 박영미는 은근히 김우진을 자극했다. “뭐든 두들겨 보고 가야 하니까…….” “자기가 그랬잖아. 박강준인가 하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더 문제라고. 만약에 경찰까지 죄다 움직여서 들쑤시게 되면 쥐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니까.” 김우진은 평소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전대성을 완전히 제쳐버릴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지 말고 이번에 아예 크게 한번 먹고 해외로 나르는 거 어때?” “안 돼. 내가 사들인 땅이 얼마인데…… 그걸 포기하라고?” 뉴월드 상가의 재개발 정보를 알고 김우진은 개인적인 돈을 끌어모아 주변의 주차장 용지를 사들였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그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전대성의 은닉자산들이 있었지만, 그걸 슈킹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김우진은 딱 그 정도의 인물이었다. “흑곰이 붙잡히면 어떻게든 수사가 전 회장까지 타고 올라갈 텐데…… 괜찮겠어?” “전 회장이 뿌려놓은 로비자금이 얼마인데…… 겨우 그거 갖고는 절대 안 흔들려.” “그럼 자기는 계속 전 회장 밑에서 금고지기 노릇을 하겠다는 거네?” 김우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일단 지켜보자는 거네. 좋아!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박영미는 상대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기술이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믿게 하고 의존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지금까지 박영미가 김우진뿐만 아니라 전대성을 휘어잡았던 기술이기도 했다. * * * 번암동 385번지 오피스텔. 이진철 경위는 한정수 경사와 함께 체포조를 출동시켰다. 뉴월드 상가의 가스 폭발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사과에는 일부러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 “경위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형사과에서는 정보가 새는 거 같아서요.” “황 반장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지난번에 도박장이 차려진 모텔에서 흑곰이 그렇게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강준이 촬영한 도박장 체포 동영상은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찰 쪽으로는 전달됐었다. 덕분에 경찰서장이 흑곰을 잡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 됐고 말이었다. “휴…… 알겠습니다. 일단 잡고 보고하는 거로 하죠…….” “네, 제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한정수 경사님을 믿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진철의 발언은 황 반장에게 자기 모르게 정보를 흘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어! 저기 저놈이네요!” 한 경사가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차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덩달아 이진철도 한 경사의 뒤를 따라 뛰었다. 하지만 흑곰은 항상 덩치들을 데리고 다닌다. 3대2. 열세의 인원으로 조직 범죄자를 단박에 제압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뭐야, 이 새끼야!” “경찰이다! 성병철 너를 수배범으로 현장 체포한다!” “뭐, 경찰? 알았으니까 서로 갈 길 가자.” 당황한 상황에서도 주변을 살피며 퇴로를 찾는 흑곰이었다. 흑곰의 등 뒤에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함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흑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덩치 두 명이 이진철과 한 경사를 붙들었다. 그 틈을 타 흑곰과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야! 성병철! 너 못 빠져나가 이 새끼야!” “뭐라는 거야! 병신 같은 게…….” 흑곰은 덩치와 뒤엉킨 이진철을 확인하고는 차량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때, 주차된 옆 차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장재식과 그의 직원으로 다시 복귀한 우영철, 그리고 보험조사관 강준이었다.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선후배로 흑곰과 엮인 장재식이었다. “너 뭐야? 재식이 아니야? 여긴 웬일이래…….” 눈치 빠른 흑곰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를 버리고는 후다닥 차에 올라타려고 했고, 그런 그를 장재식이 재빨리 저지했다. “저기서 형님 찾는 거 아닙니까?” “야! 인마! 이거 안 놔? 이 새끼가 감히 어디서!”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흑곰이었지만 장재식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지를 않습니까? 사고를 쳤으면 본인이 책임을 져야지. 이렇게 매번 혼자만 내빼는 버릇! 그거 못 고쳤습니까?” “뭐야? 이 새끼가 예전 일 가지고……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거 잘 알잖아? 어디 나 혼자만 살자고 그런 거였냐!” 구차한 변명을 하는 흑곰을 향해 장재식은 묵직한 주먹을 날렸다. 정확한 턱을 가격당한 흑곰의 무릎이 맥없이 접혔다. 강준은 혼자 남아서 떨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골드에 다니고 있죠?” “……네?” 여자는 마치 어떻게 알고 묻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강준은 이미 그녀가 골드에서 종업원으로 일했고, 흑곰과 어떤 관계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확인해 보면 다 밝혀지는 일입니다. 흑곰이 여기 있다는 걸 누구한테 말했나요?” 여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덩치 둘을 제압해 쇠고랑을 채운 이진철과 한 경사가 다가왔다. 여자는 그제야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음을 인지했다. “누구한테 말했죠?” “마담 언니한테요…….” 강준은 이진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경위님, 이 여자도 함께 데려가실 건가요?” “참고인으로는 조사해야 합니다. 물론 이 세 놈은 수배자에다가 체포를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공권력에 폭력을 행사했으니 현행범으로 체포해야 하고요.” 강준이 뒤로 물러서야 할 때였다. 수배범인 흑곰의 검거는 경제수사과 이진철 경위와 한정수 경사의 공으로 남아야 했다. “자, 너희 세 명한테 미란다 원칙 고지한다! 묵비권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 선임할 수 있고, 여기서 하는 너희 증언은 너희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알겠냐? 이 새끼들아!” 그때, 경찰의 지원 차량이 도착했다. “어떻게 된 거야?” 당혹스러운 표정의 황재규 반장이었다. “보시다시피 이놈들은 방화와 보험사기 건으로 경제수사과에서 조사할 예정입니다.” “아니…… 이건 엄연히 우리 사건인데 이렇게 말도 없이 가져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경찰서장님 지시사항입니다. 서에 돌아가시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이진철은 잡아 오기만 하면 경제수사과로 넘겨주겠다는 임철호 서장의 약속을 받아둔 상태였다. “그래도 그렇지…….” “성병철의 핸드폰은 사이버 포렌식을 맡겨서 그간의 도피 행각을 밝혀낼 계획입니다.” “뭐……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해야 하는 거지…… 좌우간 우리도 출동했으니까 저놈들은 일단 우리 차에 태워!” “성병철은 저희가 직접 데려가겠습니다. 나머지 인원만 부탁드립니다.” 이진철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출동한 순경들에게 지시했다. 황재규 반장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진철이 탐탁지 않았지만,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체포를 도운 장재식이 강준에게 다가왔다. “박 대리님, 그럼 이걸로 다 끝난 겁니까?”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랑 같이 가주실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가요?” “법원 뒤편의 주점입니다.” “무슨 일인 건지는 모르지만, 가야죠. 이왕 이렇게 나왔는데…….” 강준은 경찰들을 보내고 골드로 향했다. 가스 폭발을 사주한 진짜 진범이 출몰하는 곳으로 말이다. * * * “걔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박영미는 제보자로 자신을 지목하는 강준에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전화상으로 들었던 목소리는 분명 박영미였다. “그나저나 우르르 이렇게 와서는 겨우 그거 물어보러 온 건 아니죠? 술은 마실 거예요?” “네, 주시죠.” “애들은…… 불러줘요?” “술만 주시죠.” “그럼, 기본이네요.” 잡아떼는 박영미에게 강준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게다가 전대성과의 관련성을 일체 부인하는 박영미였다. ‘전대성과 틈이 벌어진 줄 알았는데…….’ 강준은 일단 서울에 있는 최은정 팀장에게 연락했다. “흑곰 성병철이 방금 잡혔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근데 설마 강준 씨도 체포 현장에 같이 계셨던 거예요? “뭐, 구경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너무 혹사하지 말아요. 형사사건으로 넘기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또 보고드리죠.” ―잠시만요, 나진패션 말이에요. 외국계 자본에 재매각한다는 얘기가 들려요.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거처럼 보였는데…… 그게 속임수였던 거죠. “그럼…….” ―아마 회사의 자산을 빼돌리려고 이것저것 일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던 거예요. 뭐든 복잡하게 만들면 판단하기 힘들거든요. 최은정은 본사에서 그녀 나름의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강준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새로운 길이 하나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전화를 끊은 강준은 기본으로 내온 맥주를 홀로 컵에 따랐다. 그때 언뜻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는 벌컥 문이 열렸다. “우리 구면이죠?” 깔끔하게 옷을 빼입은 남자는 나진패션의 대표인 김우진이었다. 그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왔다는 표정이었다. “김우진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얘기는 다 들었습니다. 성병철이 체포됐다고요?” “그러길 바라고 저한테 흑곰의 주소를 흘린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그럴 이유가 있나요?” 오히려 강준에게 되묻는 김우진이었다. “흑곰이 없어져야 전 회장의 참모 자리를 독차지할 테니까요.” 깊은 한숨을 내쉰 김우진은 웨이터에게 술을 가져오게 했다. 뭔가 은밀한 얘기를 하자는 신호였다. “박강준 대리님, 오늘 우리 솔직하게 얘기를 좀 나누죠?” “저야…… 나쁠 게 없죠.” “지난번 뉴월드 상가 가스 폭발…… 누구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웨이터는 새로 가져온 술을 자리에 세팅했다. 하지만 강준은 오래 그곳에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김우진 역시 전대성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고, 강준은 그를 잡아넣어야 진정한 돈줄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김우진 대표님과 제 생각이 아마 일치할 것 같네요.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드리죠. 가스 폭발을 일으켜서라도 뉴월드 상가의 조합원들을 내쫓고 재건축을 앞당기라고 지시한 사람이 전대성 회장이죠?” 강준은 김우진이 전대성까지 팔아넘길 심산인지 확인하려는 거였다. “글쎄요…… 전 회장님께서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시지는 않겠죠. 과잉 충성? 원래부터 양아치 근성이 있던 사람입니다.” 김우진이 흑곰을 손절하려는 의도가 확고했다. “그야 수사해 보면 알겠죠. 설마 경찰이 거기까지 수사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하하!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전 회장은 이곳저곳에 인맥이 많습니다. 가끔은 굳이 헤집어놓아서 좋을 게 없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김우진의 말에는 익숙하고도 당연한 오만이 묻어나 있었다. “가끔은 물고 늘어져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전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남은 술은 다음 기회에 마시죠. 전 회장이 감방에 간 기념으로 말입니다.” 단호한 강준의 말에 김우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오만은 순식간에 불안감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