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독립 손해사정사 (3)2022.01.07.
“동맥경화증, 고혈압, 동맥류 같은 것들이 뇌내출혈의 주된 원인이라고요! 그런 게 교통사고 외상 때문에 생긴다고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연남 중앙병원의 외과 과장은 강준의 말을 단박에 잘랐다. 하지만 강준은 외과 과장의 안색에서 불안한 기색을 느꼈다. 그건 뭔가 그에게도 불리한 점이 있다는 거였다. “혹시 경미한 뇌출혈을 간과하신 건 아닌가요?” “그건…… 나도 모르죠. 난 복합골절에 대한 수술만 진행한 거니까요.” “일단 알겠습니다. 진료 기록을 한번 검토해 보죠.” “본인이 아니면 진료 기록은 제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외과 과장의 말에 강준은 서류 가방에서 진료 기록 동의서를 꺼내 보였다. 우영철의 부친 우춘배 씨가 직접 서명해 준 동의서였다. “동의서가 있으면 가능하겠죠?” “원무과에 가서 말씀해 보시든가요.” 강준을 만나주지 않겠다던 외과 과장은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고는 자리를 떴다. 그렇게 혼자 남은 강준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여기 계셨네요?” 환하게 웃는 간호사는 강준이 식물인간이었던 시절의 담당 간호사였다. 간호사의 이름표에는 송지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시는 겁니까?”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하죠. 근데 보험조사관으로 오신 거라고요?” 강준이 말하지 않아도 벌써 병원 내에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네, 덕분에 회복이 되어서 보험조사팀으로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강준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원무과가 어딘가요?” “복도 끝에 계단 보이시죠? 거기서 한 층 올라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강준이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 송지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우춘배 씨…… 병원에 계실 때부터 뇌출혈 증세가 좀 있었어요…….” 강준은 송지희가 왜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해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면 좀 전에 읽었던 외과 과장의 기억에서는 병원 측 간부들이 우춘배의 입원 때 병력에 대해 함구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외과 과장이 강준의 질문에 무척 수비적으로 대꾸했던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근데 왜 당시에 뇌출혈 치료를 하지 않았던 겁니까?” “경미한 증세였으니까요. 게다가 당장 복합 골절된 정강이를 수술해야 했고요.” “그럼 뇌출혈이 본격화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또 다른 간호사가 트레이를 들고 걸어왔다. 송지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인사를 하고는 중환자실로 쏙 들어갔다. ‘송지희 간호사…… 날 도와주려는 건가?’ 강준은 원래 가려던 원무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원무과 직원들은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강준을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2005년에 6개월간 입원했었군요…… 그러다 올해 다시 수술을 위해 2개월 더 입원했었고요.” “네, 거기 보시는 게 다예요.” “혹시 입원 기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요…….” “그건 저희는 모르죠. 원무과 직원들인데……. 어쨌든 병원비는 해리츠 보험에서 처리한 거로 알아요.” “환자들이 많았을 텐데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조사관님이 서류를 뽑아달라고 하셨으니까 다시 살펴보게 된 거죠.” 강준은 원무과 직원의 손을 스치며 슬쩍 기억을 읽었다. [여기 CT 항목, 굳이 뇌 단층촬영이라는 걸 기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항목 자체를 수정할까요……?] [문제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손해사정사인 강상훈이 원무과 직원에게 우춘배의 의료기록 수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퇴원한 환자의 의료기록 수정은 법적으로 정당한 정정 사유가 필요한 일이었다. “뭐 하시는 거죠?” 기억에서 빠져나온 강준은 자신의 손을 뿌리치는 원무과 직원의 불쾌한 얼굴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서류에 궁금한 게 있어서 말씀드린다는 것이 그만…….” 강준은 손가락으로 우춘배의 의료기록을 일일이 훑었다. 그리고 직원의 기억 속에서 봤던 CT 촬영 기록을 찾았다. 두 번째 입원 시에 촬영했던 건이었다. 기록 정정 사유에는 ‘단순입력오류’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봐요. 궁금한 게 뭔지 모르겠지만, 바쁜 사람 붙잡아두고 뭐 하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와서 물어보든지 하세요.” “뇌 CT 사진은 왜 찍었을까요? 여기 기록에 있네요.” “네……?” 자신이 직접 수정한 의료기록을 강준이 정확히 짚어내자 손을 부들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뇌 CT라는 말은 없는데…….” “우춘배 씨는 마지막 입원했을 때 우측 슬관절 외측 반월상 연골판 부분절제술을 받았네요. 이런 수술은 보통 MRI로 정밀 진단하죠.” “……CT로 진단하기도 해요…….” “어차피 보험처리가 되는데 병원에서 CT 촬영으로 진단하려고 했을까요? 비싼 MRI 장비는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죠.” 원무과 직원의 표정이 굳었다. 그로서는 강준이 모든 걸 다 알고 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 생각해 보니 교통사고 환자였으니 후유증 때문에 두부를 CT로 한번 찍어본 거 같기도 하네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기억이 안 난다는 핑계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직원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재판에서 괜찮은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겠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모르셨습니까? 우춘배 씨가 해리츠 보험을 상대로 보험금 지급 소송을 냈습니다.” “……소송이라면…… 우리 연남 중앙병원도 연루가 되는 건가요?” 원무과 직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참고인 정도는 되실 겁니다. 우춘배 씨의 신체감정촉탁을 여기서 하셨더군요. 그러니 당연히 참고인으로 연루가 된 거죠.” 강준은 큰일이 났다는 표정의 직원을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최은정의 사시 동기라는 변호사를 만나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 * * 강상훈 손해사정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여깁니다!” 강상훈이 손을 들어 인사한 사람은 뇌출혈을 일으킨 우춘배의 아들, 우영철이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강상훈의 테이블에 앉은 우영철은 마스크를 벗었다. 오는 길에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편하게 서로 갈 수 있는 일을…… 왜 어렵게 가려고 했어요? 성원화재 그놈들 다 보험계약자들 들쑤셔서 자기네 이득을 챙기려는 거예요.” “저도…… 언론에 나간다는 얘기를 듣고는 좀 망설여지더라고요.” 우영철의 말에 강상훈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치며 호응했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그놈들 사장님 보험금 받는 거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놈들이에요. 그저 일 키워서 경쟁사 훼방 놓으려는 거죠.” 유려한 말투로 우영철의 가려운 마음을 콕콕 짚어내는 강상훈이었다. 버티던 우영철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은 건 연남 경찰서에서 날아온 고소장이었다. “여기에 서명하면 고소는 취하하신다는 거죠?” “물론이죠. 여기 마지막에 특약사항에 문구 확실히 빵빵 박아놨습니다. 본 보험금 지급 합의서에 서명 시에 모든 민형사상 법적 소송을 중단한다…… 딱! 쓰여 있네요. 하하!” 영철은 그 문구를 눈으로 훑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합의만 되시면 우춘배 씨 계좌로 바로 3천만 원 입금됩니다. 깔끔하잖아요! 괜히 이리저리 재다 보면 나중에는 보상금보다 소송비가 더 나가는 경우가 많다니까요!” 영철은 말없이 부친인 우춘배의 인감도장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강상훈이 얼른 시뻘건 인주 통을 내밀었다. 그때, 두 명의 남자가 그들 테이블에 다가왔다. “어어! 인감도장 함부로 꺼내 드는 거 아닙니다!” 한 손에 인감도장을 든 영철은 둘을 보고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도와준 장재식이 변호사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얀마! 내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러냐?” “죄송합니다! 형님! 소송 비용까지 신세 질 수는 없으니까요…….” 영철의 말에 같이 온 변호사가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민훈 변호사입니다. 손해배상 관련 민사소송을 주로 담당하고 있죠. 물론 지역 변호사라 이것저것 일거리가 들어오면 하는 편이기도 하죠. 하하!” 그는 반대편에 있던 강상훈 사정사에게도 명함을 내밀었다. “이제, 우춘배 씨 건은 저에게 말씀하시죠. 제가 의뢰인에게 사건을 맡았거든요.” “참나……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건 정말 한번 해 보자는 건데?” 받아 든 명함을 테이블 앞에 내려둔 강상훈은 짜증이 난다는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이구! 합의금이 3천이네요. 좀 더 쓰시지 그랬어요? 이거 어차피 해리츠 보험에서 나가는 돈이잖아요?” “법정까지 가봤자, 이거보다 더 안 나와요! 판사가 뇌출혈이랑 다리 복합골절과의 연관성을 인정해 주겠어요?” 하지만 민훈 변호사는 빙긋 웃으면서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우춘배 씨 의료기록을 토대로 건강보험공단에 내역을 한번 떼 봤습니다. 보니까 입원 기간에 두부 CT 촬영을 했더라고요.” “그거야, 교통사고와는 상관없는 거죠. 뇌출혈 같은 거야 그 정도 나이면 으레 쉽게 발생하는 질병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사고로 인한 입원 기간에 발생했다는 게 중요하죠. 결국, 우춘배 씨의 뇌출혈은 교통사고로 인한 2차 피해일 수도 있는 셈이니까요.” 안경을 한번 다시 쓴 민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강상훈을 바라봤다. 하지만 강상훈은 그런 시선을 외면한 채, 영철에게 마지막 카드를 날렸다. “영철 씨, 이 사람들 말 들을 거 없습니다. 변호사들 다 자기 돈 벌려고 법정까지 가려는 거니까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데…….” “그럼 이렇게 하죠. 뇌출혈은 후유증이 남는 질병이니 개호비(간병비)로 1,500만 원을 더 드리는 거로 합의하시죠. 이게 정말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있는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장재식이 슬쩍 나섰다. “영철아, 변호사 비용이랑 소송 비용 전액은 성원화재에서 부담하기로 했으니까, 너는 아무런 걱정을 안 해도 돼.” “아…… 감사합니다.” 미안해하는 우영철의 손을 민훈이 슬쩍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소송의 판례는 다른 보험 피해보상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방금 보셨죠? 단 몇 분 만에 1,500만 원이 달라지는 거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뇌출혈 같은 질병은 일상생활이 힘들 겁니다. 간병인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남은 기대수명까지 계산해서 피해보상액을 결정하죠. 단순히 말 몇 마디로 퉁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죠.” 바로 앞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강상훈이 짜증이 폭발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짜! 이래서 변호사 놈들이랑은 얽히지 말아야 한다니까! 이봐요. 민 변호사님, 상대가 해리츠 보험이에요. 해리츠! 다국적 기업이라고요! 감당되시겠어요?” “그러니까 한번 해 봐야죠. 제가 도전하는 걸 좀 좋아하거든요. 하하!” 민훈 변호사의 말에 말문이 막힌 강상훈은 가져온 서류를 홱 챙겨 들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빈 테이블 앞에는 담뱃재가 떨어진 명함이 고대로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