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독립 손해사정사 (2)2022.01.06.
김형식 경사는 접대를 받는 상황이 무척 불편했다. 더군다나 직속 상관인 황재규 반장도 모르게 접대를 하러 온다는 건 상대가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강상훈 사정사는 그런 김 경사의 고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자리의 종업원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저기 강 사정사님, 오늘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 왜요?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갑자기 이러시면 섭섭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좀 부담스럽네요. 이런 자리……. 수사라는 게 제가 어떻게 하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고요…….” “아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경사님! 우리가 수사가 아니면 술 한 잔도 같이 못 할 사이입니까?” “좌우간 오늘은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김 경사가 일어나자 그의 옆자리를 지키던 여종업원이 엉거주춤 함께 일어났다. “김 경사님! 잠시만요. 야! 너희들 나가 있어.” 종업원들을 내보내고 적막한 룸에 둘이 남았다. 그제야 김 경사는 못 이긴 척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 그에게 강상훈은 양주잔을 내밀었다. “제가 한 잔 드리죠.” “딱 한 잔만 먹고 가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경사님을 뵙자고 한 건 중요한 얘기를 좀 나눌까 해서요.” “황 반장님께는 말씀드린 겁니까?” “아뇨, 제가 그럴 이유가 있나요? 전 처음부터 황 반장님이 아니라 김 경사님과 할 얘기가 있었던 겁니다.” 김형식 경사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황 반장의 직속 부하인 자신에게 예의상 접대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김 경사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경사님은 언제까지 경찰 생활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인지…….” “저도 대충 경찰 월급이 얼마인지는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애들은 크는데 들어가는 돈은 계속 늘어만 가고…… 모아놓은 돈도 없지…… 뭐 다들 그렇지만 답이 없죠.”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누구처럼 뒷돈이라도 받아 챙기라는 말입니까?” 날이 선 말투로 대꾸하는 김 경사였다. “비리로 인한 불명예 퇴직 시에는 연금수령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김 경사님께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으신가요?” “당연히 없죠.” “그래서 제가 경사님의 능력을 최대한 살릴 방향을 한번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보험회사에도 보험사기를 조사하는 보험조사관이 있습니다. 아시죠?” 그제야 김 경사는 강상훈이 왜 자신을 황 반장을 제쳐두고 만나자고 한 것인지 이해했다. 보험사에서 자신을 전관예우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알죠. 저희도 최대한 협조해 드리려고 합니다…….” “원래는 저 같은 손해사정사들이 보험조사 업무를 했는데 최근에는 보험사에서도 전문성이 있는 보험조사관을 키우는 추세입니다.” 김 경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강상훈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말인데…… 경사님께서도 경찰에서 몇 년 더 경력을 쌓으신 후에는 저희 보험업계로 넘어오시는 게 어떠신지 해서요.” “……음, 한번 저도 고민해 보겠습니다. 뭐 요즘은 경찰도 인사 적체가 돼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김 경사가 속내를 내비치자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강상훈이었다. 이미 상대가 넘어왔다는 걸 알아차린 그였다. “아시다시피 보험사가 보험계약자와 직접 대면해서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들은 다 저희 같은 독립 손해사정사들이 맡아서 처리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야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제가 해리츠 보험 출신이기도 해서 전 그쪽과 거래를 주로 합니다. 실질적으로는 해리츠 보험 소속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그렇군요…….” “경사님께서도 앞으로 저와 같이 일을 해나가신다면 해리츠 보험 쪽으로 연결을 시켜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좋죠. 해리츠 보험도 대기업이잖습니까?” “그럼요. 보험업계에서는 탑티어입니다. 하하!” 일이 잘되어간다는 듯 강상훈은 껄껄대며 웃었다. “뭐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부탁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도와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편하게 술 먹는 겁니다?” 아까와는 딴판인 분위기였다. 김형식 경사로서는 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공짜 술이 아님을 알았기에 부담감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때 밖에서 웨이터가 안주를 들고 들어왔고, 강상훈은 아까 불렀던 종업원들을 다시 불렀다. 어느새 노래방 기기에는 강상훈의 18번 곡이 입력되어 있었다. 흥을 깨우는 트로트 곡이었다. “경사님! 오늘은 저랑 끝까지 가는 겁니다!” “에이 모르겠다! 오늘 집에 안 들어갑니다! 저랑 사정사님이랑 같이 잠복근무한 겁니다! 아셨죠?” “그럼요. 보험사기 잡으러 잠복근무 중입니다! 충성!” 강상훈은 김 경사의 기분을 맞추려 경례를 하는 시늉을 해대며 마이크를 집었다. 어느새 들어온 여종업원들이 둘의 팔짱을 끼고는 노래 박자에 맞춰 흥을 돋우고 있었다. * * * 을지로 성원화재 본사. “김우진은 그러니까 이번 일에는 관련이 없다는 거지?” “네, 흑곰이라고 불리는 성병철이 일을 맡았으니까요.” 김성호 이사는 연남에서 막 올라온 강준의 보고를 받았다. “결국, 전대성은 뉴월드 상가를 장악하고 재개발 승인을 받는 게 목적이란 말이지……?” “네, 그 과정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성병철에게 맡긴 거고요. 아마 전 회장은 김우진을 그렇게까지 쓰고 싶어 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하긴, 나진패션 대표 자리에까지 앉혀 놨는데…… 그렇게 양아치 짓을 시킬 수야 없겠지.” 김성호 이사는 최은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승일 시장이 주도하는 문화복합단지인지 뭔지가 추진되면 최진태 이사가 대표로 있는 성원건설이 개발사업을 맡아서 하게 될 게다. 그렇게 되면…… 그룹 내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없을 거다.” “보험과 증권의 알짜배기 자산이 성원건설로 빠져나갈 거라는 말씀이시죠?” “고객이 맡긴 돈을 개발사업에 쏟아붓게 되는 격이지.” 김성호 이사는 찹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원건설이 그룹의 중심이 되면 그룹승계는 굳어진다고 봐야지.” “윤미경, 그 여자가 대놓고 설치는 꼴을 보게 되겠네요.” 최은정은 최진태의 친모를 그 여자라고 표현하면서 비꼬는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우량 사업인 보험사업을 매각하려고 할 거라는 거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성원화재가 없으면 더 이상 성원그룹이 아닐 텐데요.” “최근에 최진태 이사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아냐?” “뭔데요?” “마누라 빼고는 다 바꾼다는 말이야. 어느 대기업 회장이 한 말인데 그걸 고대로 인용하고 다니더라고요. 나중에 보험이랑 증권사 팔아먹겠다는 밑밥을 까는 거지.” “다른 계열사 임원들은요? 그걸 그냥 놔두고만 있어요?”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거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최 이사가 차기 회장이 될 게 유력한데 괜히 밉보였다가 불이익을 받을 필요는 없거든.” 최은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내색을 비췄다. “다들 자기 살길 바쁜 사람들이죠…….” “좌우간 최 팀장, 난 경영권과 관련해서는 누구 편도 아니야. 다만, 그룹을 잘 이끌어갈 적임자라면 언제든지 지지해 줄 생각이다.” 김성호 이사는 괜히 마음이 쓰였던 건지 최은정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알아요. 이사님 생각…….” 최은정은 김성호 이사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친하다고 해서 편을 들어줄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저나 박강준 대리, 해리츠 보험 쪽에는 왜 관심을 가지는 거냐?” “해리츠 보험에서 독립 손해사정사를 고용해서 부당하게 보험금 지급을 미루고 있는 건이 있습니다. 우리 성원화재까지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는 건이고요.” “장재식인가 하는 사람 도와주려는 거 아니고?” “아…… 그건…….” 김성호 이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강준을 향해서 웃었다. “그 친구가 뉴월드 상가의 방화사건을 막아줬다는 건 들었다. 근데, 정말 너랑 무슨 관계야?” “……별다른 사이 아닙니다.” “근데, 어떻게 알고 찾아가서 부탁한 거야?” 강준은 회귀 전 자신의 동창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실은 이진철 경위가 소개해 준 사람입니다. 성병철을 잘 아는 인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음…… 그래, 도움을 받았으니 갚아야겠지. 그리고 나도 독립 손해사정사를 이용해서 고객들한테 해지동의서를 받아내는 사례가 많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어. 페어플레이를 해야지. 페어플레이를!” 목소리를 높이는 김성호 이사였다. 그는 자사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사람 보험금은 받아줄 수 있을 거 같아?” “장재식의 부하직원 부친이 뇌출혈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볼 때는 교통사고로 인한 수술 합병증인데 해리츠에서는 기왕증을 핑계로 보험금을 안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건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는 게 보험사들의 관행이기도 해……. 좌우간 어떻게 할 거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건가?” 강준은 팀장이자 직속 상관인 최은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강준이 예상했던 대로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관행이라는 건 깨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최 팀장, 자네 생각은 잘 알겠는데, 우리도 보험조사를 통해서 보험금 지급을 줄이려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동시에 보험이라는 건 어려움이 닥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우산이기도 하죠.” 최은정의 원론적인 말에 김 이사는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최 팀장, 이왕 남의 보험사랑 척지게 생겼으니까 판을 더 키워 보는 게 어때? 해리츠 보험의 보험금 미지급 건을 언론에 슬쩍 흘리는 거야. 그럼, 해리츠에서 반칙하는 거 막을 수 있지 않겠어?” “언론사는 제가 알아볼게요. 근데 이거 새어나가지 않을까요?” “새어나가면 어때서? 공식적으로 발뺌할 수 있게끔만 해 놔. 괜히 꼼수 쓰다간 소비자들한테 불도장 찍힐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언론에 독립 손해사정사까지 동원한 물밑 작전까지 드러난다면 해리츠 보험의 영업 전선에도 빨간불이 켜지는 격이었다. 강준으로서는 우영철 부친의 사건에 더 매달릴 수 있어서 안도했다. “그럼 잘들 해 봐. 근데 역시 최 팀장은 이 부장이랑은 다르네.” “왜요?” “거기는 지금 전속 법무팀을 꾸리겠다며 난리야. 이미 회장님께도 보고가 됐고.” “이사님께서도 승인하신 사항이 아닌가요?” “나? 나야 결재 도장 꾹 찍었지. 안 찍을 명분이 없잖아. 어느 쪽이 우리 성원화재에 도움이 될는지는 지켜봐야 할 거고 말이야.” 김성호 이사는 그의 말대로 정말 누구의 편도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심정적으로 조사 2팀을 응원한다는 듯 최은정을 향해 엄지를 척 세웠다. “잘해 봐. 참! 그리고 박강준 대리는 한승일이 주도하는 문화복합단지…… 그거 어떻게 돼 가는지 잘 지켜보고!” 재선으로 인해 민감한 시기였다. 김 이사의 진짜 관심은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보좌하는 최창식 회장이 사돈인 한승일을 후원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