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독립 손해사정사 (1)2022.01.05.
번암주류 사무실. “흑곰을 못 잡은 건 아쉽네요. 내가 분명히 도망가는 걸 봤는데 경찰이 도통 움직이지를 않더라고요!” 장재식은 아쉬운 듯 주먹을 불끈 쥐고 공중에 휘둘렀다. 그가 흑곰의 방화시도를 잡겠다고 한 건 과거의 악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장 사장님은 해 주셔야 할 역할을 다 한 겁니다. 제가 채증을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거니까요.” “그럼 다행이고요.” “이번에는 제가 도울 차례군요. 그 직원의 아버님이 병원에 계신다고요?” “얼마 전에 퇴원하셨어요. 병원비 때문에…… 이제는 집에서 요양하시는데 거동이 불편하셔서 제 직원이 그것 때문에 일을 나오지를 못하네요.” 강준이 장재식을 찾아갔을 때, 그는 더 이상 건달 세계의 사람들과 엮이는 걸 원치 않아 했었다. 흑곰은 과거에 막 출소한 장재식을 건달 세계에 끌어들였고, 자신 때문에 그 세계에 발을 담근 장재식을 궁지에 몰아넣었었다. 강준은 장재식이 그런 흑곰에 대한 복수심이 남아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그런 강준의 생각은 틀렸다. 장재식은 오히려 그 시절에 벌어졌던 일들이 결국은 자신의 오랜 업보에서 비롯된 것이라 자책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기찻길 패싸움에서 과실치사를 일으킨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단 그 직원분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저랑 같이 갑시다. 나도 오랜만에 그 친구 얼굴이나 봐야 하니까요.” 장재식은 주류배달을 하는 1톤 트럭에 올라탔다. 부르르릉! 부르릉! 덜덜거리는 디젤엔진의 시동이 걸리자 장재식은 능숙하게 시내 주택가를 향해 트럭을 움직였다. 부친이 아프다는 직원의 집은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컹컹! 컹컹컹! 강준 일행이 도착하자 직원의 마당에서 키우는 개가 맹렬하게 짖어댔다. 마치 침입자로부터 주인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듯이 말이었다. “어! 형님!” “영철아, 잘 지냈냐?” “그럼요, 회사는 좀 어떠세요?” “자식이 회사 걱정부터 하기는…… 아버님은 좀 어떠시냐?” 장재식의 언급에 영철이라는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여전하시죠…….” “같이 오신 분이 보험사 직원분이셔. 혹시 아버님 교통사고 보험금 다시 받아주실 수도 있으니까. 자세하게 말씀드려봐.” 영철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강준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원래 금형이 엄청 무거워서 트럭으로 날라야 하는데…… 그날은 크기가 작은 실리콘 금형이었거든요. 거래처 공장에서 빨리 다녀오려고 오토바이를 타셨나 봐요…….” “금형을 만드는 일을 하셨군요.” “네, 직원들도 두 분 계셨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되시니까 다 일을 그만두셨죠.” 작은 금형집에 불과한 곳이었다. 사람의 인력으로만 돌아가는 곳이다 보니 사장의 부재는 곧 폐업을 의미했다.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사고 비율은 어떻게 되나요?” “상대편 차량이 갑자기 차선변경을 하면서 아버지 오토바이를 박은 거거든요. 전방주시 의무 때문에 무조건 3:7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30%는 책임이 있다네요…….” “그렇겠죠. 실선에서의 차선변경이 아니라면요.” 강준의 단호한 말에 영철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상대편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지급했겠군요.” “다행히 운전자보험이라…… 수술비는 받았습니다. 정강이뼈와 종아리뼈가 완전히 으스러지셔서 수술을 네 번이나 하셨거든요. 근데 문제는 병원에서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기왕증이 있다는 핑계로 뇌출혈에 대한 치료비는 지급하지 않았군요.” 기왕증은 환자가 이미 과거에 앓고 있던 질병으로 보험금 지급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우영철의 부친은 뇌출혈로 인한 병원 치료와 후유증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네. 맞아요! 저쪽 보험사에서 우리를 마치 보험사기범 취급하더라고요.” “보험사가 어딥니까?” “해리츠 보험이요.” 해리츠 보험이라면 대표적인 외국계 보험회사로 국내에 종신보험의 새로운 흐름을 가져온 회사였다. 그들이 주도한 트렌드는 바로 치명적 질병보험이라는 이름으로 팔렸던 종신보험이었다. ‘그 치명적 질병을 진단받는 게 실상 어렵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해리츠 보험이라면 탄탄한 법무팀으로 압박이 들어왔겠군요.” “네, 그래서 저희도 중간에 그만둔 겁니다.” “덩달아 영철 씨도 회사를 그만둔 거고요?” “그만둔 건 아니고…… 잠시 쉬고 있는 겁니다. 형님도 제 자리 남겨 주셨는데…… 얼른 돌아가야죠.” 거동을 못 하는 부친을 돌보는 건 우영철에게는 이중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병원 치료를 받으셔서 회복하실 수 있게 돕겠습니다.” 원론적인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강준이었다. “기대는 안 합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자신의 처지보다 먼저 상대를 걱정하는 영철이었다. “얌마! 너무 죽상 하지 말고! 밝게 웃어! 그래야 복이 들어온다.” “네, 형님!” 장재식은 영철에게 다가가 슬쩍 봉투를 찔러줬다. “아닙니다! 저번에 주신 것도 있는데!” “받아, 인마! 조만간 또 보자!” 손사래를 치며 봉투를 돌려주려는 영철을 뒤로하고 장재식은 영철의 집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보험금 받을 수 있을까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어차피 저쪽에서 소송으로 대응할 테니 우리도 소송에 대비해야겠죠. 그나저나 영철의 아버님이 치료받으셨던 병원이 어딥니까?” “연남 중앙병원이요.” 강준이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었던 병원이었다. “가시죠. 병원 기록부터 살펴야겠네요.” * * * 강상훈 손해사정사 사무실. “사정사님, 해리츠 보험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왜? 무슨 일이래?” “박 부장님께서 사정사님께 미팅 요청을 하셨는데요.” “뭐? 그래서?” “다시 연락드린다고 했습니다.” “에이, 그런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사정사님이 상담 중이셔서요…….” 전화를 받은 직원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핸드폰을 든 강상훈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해리츠 보험에서 직접 보자는 건 그쪽에서 뭔가 아쉬운 일이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건 강상훈에게는 돈벌이가 될 만한 건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이고! 박 선배! 웬일이래요? 얼굴 보자는 얘기를 다 하고?” ―너 어디냐? “어디긴요? 사무실이죠. 저 같은 일개 사정사가 밥 벌고 먹고살려면 열심히 보험계약자들 상담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전에 만났던 해장국집에서 보자. 너 아직 식사 전이지? “먹었어도 또 먹어야죠. 선배가 먹자면! 헤헤!” 너스레를 떨던 강상훈은 이내 윗도리를 챙겨 들었다. “정 실장, 저번에 그 뇌출혈 환자들. 800만 원까지 받아줄 수 있다고 도장 찍으라고 해! 그것도 겨우 받아 준 거라고 앓는 소리 좀 하고!” “네, 다녀오세요. 앓는 소리는 제가 전문이니까요.” “고마워! 내가 이래서 정 실장을 좋아한다니까!” 강상훈의 칭찬에도 정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보험계약자들을 설득해 기존의 보험계약을 해지하는 일이었다. 강상훈이 차를 몰고 간 곳은 연남시의 경계 바깥에 있는 한 해장국집이었다. 전직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친필사인이 걸려 있는 거로 봐서 오래된 맛집이 분명해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쇠락한 해장국집에는 넓은 평수에 비해 손님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미리 시켜 놨다. 일단 먹어.” 짧게 말하는 남자는 해리츠 보험의 박성태 부장이었다. 그는 사회초년생이었던 강상훈을 보험업계로 끌어들인 사람이기도 했다. “상훈아, 먹고살기 힘들지?” “뭐 다들 어렵죠. 그래도 자격증 하나 있다고 이 바닥에서 계속 버티는 거 아니겠습니까?” “기특하네.” 박 부장은 씩 웃으며 숟가락으로 해장국을 떴다. “악성 민원인이 한 명 있어. 어떻게 된 건지 다른 보험사까지 더럽게 엮였다. 네가 좀 풀어줘야겠어.” “헤헤, 그게 제 일인데요 뭐…… 수수료는 어떻게 됩니까?” “해지동의서 받아오면 천.” “오~ 웬일이래요? 맨날 10%, 20% 주던 양반들이…….” “그러니까 신경 좀 써 봐. 너만 먹고살기 힘든 거 아니다. 나도 실적 압박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박 부장의 말에 강상훈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박 부장의 고액 연봉을 뻔히 아는 그로서는 자기 앞에서까지 앓는 소리를 하는 박 부장이 무척 낯설어 보였다. “서류는 여기 다 챙겨 넣었다. 교통사고 환자인데 다리 수술만 네 번을 했다. 그러다가 뇌출혈이 온 거고.” “병원 입원 중에 그런 거예요?” “……어, 그러니까 문제가 된 거고.” “기왕증으로 밀어붙이라는 건데, 이거 진짜 소송까지 가면 힘들겠는데요?” 강상훈도 일거리를 받기 전에 확실히 해두려고 부정적인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박 부장은 강상훈이 펼쳐 든 서류를 홱 뺏었다. “하기 싫음, 하지 마! 소송까지 갈 거면 우리가 왜 너한테 일을 맡겨? 그 전에 마무리 지으라고 너한테 맡긴 거 아냐?” “아휴! 알죠, 알아!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걸 말씀드리는 건데 왜 화를 내세요…….” 박 부장은 그 말에 수그러들었는지 시선을 피하며 다시 해장국을 떴다. “선배, 그러지 말고 우리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요.” “나 이제는 집에 늦으면 큰일 나.” “왜요? 이혼당하고 홀아비라도 될까 봐요?” “그게 아니라 저번에 너랑 같이 갔던데 말이야.” “골드요?” “그래, 거기 명함이 뒷주머니에 있는 걸 마누라가 어떻게 알았는지…… 하여간 나 이제 한동안 근신이야.” 골드는 강상훈과 박 부장이 병원장들을 데리고 주로 접대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강상훈은 지난번에 그곳에 갔다가 단골이 되어 버렸다. “인마! 너도 정신 차려. 괜히 쓸데없는 데 돈 쓰고 다니지 말고.” “왜요? 형님처럼 유부남 돼서 애들 키우느라 전전긍긍하며 살라고요?” “회사 좀 키워놔.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팀장인데…… 나가면 전관예우는 해 주지 않겠냐?” 갑자기 전관예우라는 말을 듣자 강상훈은 김형식 형사가 떠올랐다. 최근 들어 전직 경찰들을 보험조사관으로 채용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강상훈이 볼 때 형사들에게 꽤 달콤한 제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배, 이번에 보험사기로 소송 한 번 걸어보는 거 어때요?” “뭐? 우리가 먼저 소송하라고?” “네, 경찰 쪽 설득은 제가 할 테니까 선배는 회사 쪽 한번 설득해 줘요. 뭐든 채찍과 당근이 있어야 말을 더 잘 들어 먹는 법이니까요.” “야야! 아서라…… 그거 성원화재에서도 문 건이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봐.” “아니, 선배. 같은 보험업계끼리 그쪽에서 우리를 왜 건드리겠어요? 크게 보면 동종업계 아닙니까? 서로 룰은 지켜야죠.” 박성태 부장은 잠시 고민했다. 성원화재에서 그 건을 문 것이 경쟁사를 엿 먹일 의도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보험협회를 통해 압력을 한번 넣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상훈아, 그럼 네가 형사들 한번 만나봐. 경찰도 실적 쌓고 우리도 민원 해결하고 서로서로 좋지 뭐.” “네, 제가 앞에서 해결할 테니 형님은 제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만 주십쇼! 헤헤!” 상훈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소주병을 따고는 박 부장의 소주잔에 반주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