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방화 모의 (1)2022.01.02.
강준은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보험설계사 김철영에게서 온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실적에 문제 생길까 봐 바로 보내놨군.’ 엑셀 파일에 기록된 새사랑 생명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은 자살로 추정되는 사람을 제외하고도 대여섯 명이 더 있었다. 네 건의 사망사고. 그중 두 명은 원인불명. 그리고 한 명은 고속도로상에서의 교통사고, 나머지 한 명인 고민기는 옥상에서의 실족사였다. ‘원인불명이라…….’ 강준은 자연스럽게 원인불명의 글귀에 눈이 갔다. “음주 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하였음. 평소 알코올 중독 증상은 없었고, 별다른 약물 복용도 확인되지 않았음…… 따라서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이나 그 심장마비를 일으킨 원인은 알 수 없음!” 기록에는 유가족들이 부검을 반대했다고 적혀 있었다. ‘보험사에 괜히 꼬투리만 잡힐 수 있는 부검을 굳이 할 이유는 없었겠지…….’ 교통사고는 사망자가 음주 후, 밤길에 고속도로로 뛰어든 경우였다. 네 건의 자살에 모두 음주가 끼어 있었다. 음주는 사망자의 자발적인 의지를 희석하는 항목이었다. 소송으로 가더라도 사망보험금의 수익자들이 끝까지 법정투쟁을 한다면 보험사로서도 이기기 힘들 것 같았다. 강준은 피곤한 몸을 일단 침대 위에 눕혔다. 분명한 자살 정황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송부터 걸고 싶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살한 보험계약자들의 절박한 심정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망자들의 보험계약서 약관상 자살이라도 2년의 면책 기간이 지난다면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엄연히 따지면 네 건의 사망사고는 자살이었을지언정 보험사기는 아니었다. 강준은 침대에서 다시 벌떡 일어나 최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박강준입니다.” ―어떻게 됐어요? “유가족들은 자살이 아니라고 하지만, 네 건 모두 자살한 정황은 있습니다. 모두 음주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고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위에 보고할 명분은 있어야죠. “전 새사랑 생명보험이라는 상품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2년의 면책을 둔다고 해서 사람들이 보험금을 위해 자살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최은정이 말을 이었다. ―동의해요. 오히려 사람들이 그 면책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자살하는 사례가 있었죠…… 하지만 자살이라도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례가 나왔어요. 금융감독원에서 보험사를 그 건으로 징계한 사례도 있고요. 최은정은 에둘러 얘기했지만, 기존 생명보험의 설계 자체를 뜯어고칠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면책 기간은 조정해 볼 수는 있겠죠. 독일의 경우에는 자살 면책 기간을 3년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네 팀장님, 그렇게라도 된다면 자살률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강준 씨, 그건 그렇고 뉴월드 상가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최은정은 강준이 연남에 내려간 진짜 용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일대를 문화복합단지로 개발하려는가 보더라고요. 그래서 오랫동안 방치됐던 뉴월드 상가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거고요.” ―역시 한승일 시장이 나설만한 프로젝트네요. 강준 씨는 전대성 회장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자세히 한번 알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강준 씨…… 혹시 지원인력이라도 필요하세요? “우리 팀에 T.O가 났나요?” ―네, 이정훈 팀장도 몇 번 태클을 걸더니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더라고요. 준혁 씨는 안에서 지원하는 역할이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는 현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사람을 뽑을 생각이에요. 혹시 생각해 둔 사람 있으세요? 강준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답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강준 씨가 함께 일할 사람이니 강준 씨가 원하는 사람을 말씀해 주세요. 그럼 늦었으니 쉬세요. 전화를 끊은 강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강준의 고교 동창이었다. ‘그 녀석,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 * * 다음 날 아침. 강준은 뉴월드 상가의 1층으로 향했다. 흑곰에게서 받은 대출계약서의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좁은 바닥이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상가의 상인들은 서로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승구는 여기 장사 접은 지 꽤 됐어. 한두 달 전인가부터 안 나타나…….” “재호 그 새끼 여기 사람들 돈 싹 다 들고 튀었어! 뭐긴 뭐야? 주식 사기지. 처음에는 50만 원이고, 100만 원이고 수익 났다면서 입금을 하더라고…… 근데 겨우 3개월도 안 돼서 날랐지…… 여기 있는 사람들 크고 작게 다 당했다고!” 김승구는 자취를 감췄고, 신재호는 사기를 치고 도망친 상태였다. 그나마 만날 수 있는 건 조철민이었다. 그는 땡처리된 옷을 매입해 저렴한 가격으로 되파는 의류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흑곰의 사채를 썼을 정도라면 이미 재무적으로는 완전히 망가진 거나 다름없을 터였다. “보험회사에서 나왔다고?” “네, 생명보험에 가입하신다고 들어서요.” “어? 내가?” “모르셨어요? 흑곰이 사장님이 생명보험에 가입하고 수익자를 자기로 해 두라고 하던데요.” 강준의 솔직한 말에 조철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두려운지 턱을 미세하게 떨면서 말을 이었다. “그 인간이…… 정말 그렇게 얘기했어?” “네, 보험 가입이 어려우십니까?” “아니…… 보험 가입이야 하면 되지. 근데…… 정말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길…… 약속하고 틀리잖아…….” 강준은 고개를 숙인 조철민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으로 들어갔다. [언제 하면 되는 건데요?] [아무래도 사람들 없을 때 해야 하니까, 토요일이 좋지 않나?] [일요일에는 문 여는 데가 많죠…… 그럼 자연히 사람들 눈에도 더 잘 띌 거고, 여하튼 토요일 밤이 좋겠네요.] [좋아! 내가 고 사장은 잘 잡아 놨으니까 둘이 속닥거리면서 잘 처리하시면 되겠네.] [저기 성 사장님…….] 흑곰의 본명은 성병철이었다. [왜? 뭐 문제 있나? 깔끔하잖아. 불장난 한번 해 주고 빚 탕감받고! 그거보다 편한 게 세상에 어딨어?] 눈을 부라리는 흑곰이었다. [정말 일 끝나면 대출금은 없는 겁니다…….] [아이 씨…… 속고만 살았나…… 이제 두 번 말 안 해. 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스타일이야. 일 처리만 확실하게 하면 우리 사이에 채무계약은 종결이야! 알겠지?] 협박하듯 조철민을 압박하는 흑곰이었다. 그의 뒤에는 항상 그렇듯 덩치 두 명이 배경처럼 서 있었다. 강준은 조철민의 기억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는 기억을 읽는 게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출발할 때와 정지선에서 멈출 때 차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었다. “걱정하시는 게 뭔지 압니다. 흑곰이 사장님을 해칠까 봐 그런 거 아닙니까?”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조철민은 고개를 들어 강준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서는 절박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솔직히 이건…… 너무 뻔한 거 아니야? 나 죽이고 보험금은 자기가 갖겠다는 거잖아?” “그럼 보험 가입은 안 하시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제가 흑곰에게 가서 가짜 보험증서를 내밀겠습니다. 대신, 사장님께서는 제게 진실을 말씀해 주시죠.” 조철민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머뭇거렸다. “토요일 밤에 사장님이 하시려던 거요.” “……뭐야? 흑곰이 그런 얘기까지 해 준 거야?” “어차피 상가에 불나고 나면 조 사장님은 버려질 운명이었습니다. 어수선한 틈을 타 새로 지주로 구성된 상가관리단을 만드는 게 흑곰의 목적일 테니까요.” “어…… 나한테는 화재보상금을 받아낼 거라고 하던데…….” 강준은 서류 가방에서 생명보험 서류 하나를 꺼냈다. “보험사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뉴월드 상가 전체를 다 태운다고 해도 과연 그들에게 돌아갈 보상금이 있을까요? 게다가 지금 상가 지주들은 쪼개져 있지 않습니까?” “흑곰이 자기네들이 벌써 여기 지주들한테 거의 다 양도를 받았다고 하던데?” 새로운 정보였다. 경찰 시절 강준이 파악했던 건 전대성이 뉴월드 상가를 장악하고 새로운 상가관리단을 만들었던 것까지였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 지분을 늘려갔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조 사장님, 일단 제가 가짜 보험가입서를 가져가서 흑곰을 안심시켜 놓겠습니다. 만약, 조 사장님이 이번 주에 상가에 불을 지르지 않는다면…… 흑곰은 사장님을 해치려고 할 겁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저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조철민은 포개어 놓은 옷더미에 몸을 기대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로서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경찰이라도 부르겠다는 거야?” “흑곰이 잡혀 들어가면 사장님은 개인파산 신청을 하셔서 회생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금을 제외하고 고리의 이자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니까요.” 조철민은 10여 분을 더 고민하더니 강준의 보험 서류에 서명했다. 5억 원의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생명보험 상품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다른 분들처럼 안 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으이구…… 돈 빌린 내가 죄인이지!” “근데 고진기 사장님은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까요?” “왜? 그 친구도 흑곰이 죽여 버린대?” “걱정이 좀 돼서요. 동생분도 그렇게 되셨으니…….” 조철민은 안타까움보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는…… 지금 아마 하우스에 있을 거야.” “하우스라면?” “왜 있잖아. 도박판! 시장 상인들이 죄다 모이는 곳이 있으니까 그리 한번 가봐. 거기서 또 박카스나 팔고 있겠지.” “위치를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조철민은 말없이 대출 홍보문구가 적힌 메모장을 쭉 찢어 약도를 그렸다. 당구장과 술집이 있는 시청 뒤편의 유흥가였다. “감사합니다.” “이봐, 그럼 나 토요일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여기 적힌 번호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흑곰에게 협조하는 척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저에 대해서도 비밀을 지켜주시겠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게를 나온 강준은 휑한 상가를 한 번 둘러보고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 경위님, 저 박강준입니다. 형사과에 친한 형사분 있습니까?” ―네? 형사과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형사과와 공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꽤 사이즈가 있어서요.” ―형사과라면…… 황 반장이 꽉 잡고 있지 않습니까? 통화음 너머로 곤란해하는 이진철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번에 황 반장이 어디까지 엮여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네요!” ―아…… 알겠습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시청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뵙죠.” 강준은 전화를 끊고는 뉴월드 상가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낡은 상가 곳곳에 난 콘크리트 균열과는 상관없이 빨간 노을이 멋진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