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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고의방화 (4) (29/250)

029. 고의방화 (4)2021.12.29.

최기동은 방화 교사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스폰녀인 채원의 집에서 발견된 현금다발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하지만 반전은 그가 김우진 이사에 대해서는 전혀 털어놓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가 물고 늘어진 건 오로지 나진패션의 이석진이었다. “박 대리님,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이석진 대표도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죠.” 강준은 흥분한 최은정에게 담담하게 답했다.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두실 거예요?” “지은 죄만큼 죗값을 받아야겠죠…….” 이석진이 모든 걸 뒤집어쓴다는 건 억울한 일이었다. 그가 보험사기에 가담한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험사기액의 규모를 키우고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한 건 라성캐피탈의 김우진이었다. “김우진이 구치소에 있는 최기동을 회유한 거예요. 최기동으로서는 같이 감방에 가야 할 이석진보다는 배경이 든든한 라성캐피탈을 선택한 거죠.” 최은정이 말하고 있을 때, 모니터를 보던 김준혁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팀장님! 탑스퀘어가 매각된다고 하는데요!” “네? 어디로 매각된다는데요?” “RS투자라고 하는데 혹시 아세요?” 전대성이 대부업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면서 들고나온 게 바로 RS투자였다. 강준은 그 RS투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참나! 영어로 회사 이름 지어놓으면 뭐라도 되는지 아는 건가……?” “박 대리님은 RS투자에 대해 뭐 아는 거 있어요?” 최은정은 강준의 혼잣말에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김준혁! 거기 RS투자 대표가 누구로 되어 있냐?” “네, 지금 찾고 있는데요…… 아! 여기 있네요. 전대성 대표…… 대한민국의 새로운 투자환경을 선도하는 기업인…… 어! 여기 최진태 이사님과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김준혁이 가리킨 모니터에는 RS투자의 창립선포식에 참가한 최진태 이사의 모습도 찍혀 있었다. “이런 구린 인간하고 같이 다니는 꼴이라니…….” 사진을 확인한 최은정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김준혁, RS투자 법인자료 좀 볼 수 있냐?” “잠시만요…….” “대주주가 누군지 확인해줘.” “음…… 주주명부는 공개가 안 돼 있네요. 물론 공개기업이 아니니까 공개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고요.” “혹시 회사 소개자료 같은 건 없나?” 김준혁은 방화벽이 없는 웹으로 접속했다. 해킹까지는 아니었지만, 2006년으로서는 허술한 사이트들의 DB에 접속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 있네요. 간략한 법인 등록서류입니다.” 김준혁이 찾은 파일은 금융감독원에 제출하려고 준비해둔 서류였다. “이걸 어디서 찾은 거야?” “에이, 해킹한 거 아니에요. RS투자 홈페이지에 비공개로 올라와 있는 걸 찾은 거예요.” “정말이야?” “여기 주소를 보세요…… 이거 엄연히 공개된 주소잖아요?” 김준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홈페이지의 비공개 게시판을 통해 자료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주주는 전대성이고 나머지는…… 김우진, 그리고 전미향……. 그래도 전대성이 확실한 과점주주네요.” “잠깐만, 전미향이라고?” “네?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세요?” “전대성의 여동생이네.” 그 말을 들은 최은정이 강준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박 대리님은 어떻게 전대성의 주변을 그렇게 잘 아는 거죠? 라성캐피탈에 대한 조사는 저번에 끝났었잖아요?” “조사는 끝났지만…… 개인적인 관심은 끄지 않았으니까요.”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뉴스 기사를 찾아보던 김준혁이었다. “탑스퀘어 매각가격이 80억 원이네요……. 이거 너무 헐값 아닌가요?” “김준혁, 나한테 그런 걸 물으면 내가 알겠냐? 팀장님, 80억이면 헐값인 겁니까?” 강준은 M&A업계의 사정을 잘 몰랐다. 그런 건 최은정에게 물어봐야 했다. “패션업종이 불황이긴 하지만 80억은 너무 했네요. 탑스퀘어가 그래도 전국민이 아는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잖아요. 매장도 여러 곳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이석진이 구속된 게 결정적인 요인이겠죠. 감옥에 있는 사람한테 그다지 선택지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모니터를 살피던 김준혁이 강준의 말을 보충했다. “박 대리님 말씀이 맞습니다.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탑스퀘어 매출이 28% 줄었어요. 그 정도면…… 꽤 심각한 수준 아닌가요?” “우리가 한번 이석진을 만나보는 게 어때요? 구치소 면회는 될 거 아니에요.” 최은정은 방화사건에 대한 결론을 매듭짓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강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팀장님이 이석진을 만나는 동안 저는 김우진을 만나보겠습니다. 아마 지금쯤 그가 나진패션의 경영을 죄다 장악하고 있을 테니까요.” “알겠어요. 그럼 우리 찢어져서 효율적으로 움직이죠.” 둘 사이에 있던 김준혁이 뻘쭘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그럼 전 뭘 하고 있을까요?” “이번 사건 정리해서 금감원에 보낼 보고서로 만들어줘요.” “네, 알겠습니다!” 김준혁은 어느새 보고서 작성에 익숙해진 듯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군!’ 강준은 김준혁이 보험조사 2팀에서 제대로 된 몫을 해주는 걸 보고는 흐뭇했다. * * * 강준이 다시 찾은 나진패션의 사옥에는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 회사 대표이자 창업주 이덕수의 아들이었던 이석진이 구속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보험사기를 벌인 이석진을 비롯해 회사 자체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어렵사리 만들어놓은 탑스퀘어의 유통망도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단돈 80억 원에 피인수되었으니, 회사 직원들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당연했다. “대표이사실이 어딘가요?” “어디서 오셨어요?” “성원화재에서 나왔습니다. 지난번 화재 건에 대해 마무리가 안 되어서요.” “아…… 이쪽으로 오세요.” 여직원은 강준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역력했다. 회귀한 이후에 강준이 김우진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보험사에서 나오셨다고요? 이쪽으로 오시죠.” 김우진은 사뭇 친절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강준은 차를 가져온 직원이 나가자마자 본론을 꺼내놓았다. “아시다시피…… 이석진 대표는 자신의 인감이 도용당했다는 일관된 주장을 합니다.” “하하! 그걸 물어보러 오신 거군요. 일단 차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 나누시죠. 저도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회귀 전 전대성의 금고지기 김우진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었다. 세상은 그걸 우연한 교통사고라고 했지만, 강준의 눈에는 전대성의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김우진이 꼬리 자르기를 당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똑똑해 보이는 양반이…… 자기 죽을 날은 미처 몰랐겠지. 누구처럼…….’ 강준은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할 김우진을 보자 연민의 정마저 느껴졌다. “먼저…… 이석진 전 대표가 저를 처음에 지목했다는 건 아시죠?” “네, 하지만 입장을 철회했죠. 그것 때문에 변호사도 교체됐고요.” “맞습니다. 사실 이 대표가 초반에 저를 오해했던 건 사실입니다.” ‘네놈들이 협박해서 태도를 바꿨겠지…….’ “부도난 탑스퀘어를 인수해준다는 조건으로 법정 진술을 바꾼 건 아니고요?” “하하! 역시 유능하신 조사관님이시라…… 여러 가지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당연히 그런 오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만…… 이미 최기동 과장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제가 굳이 왜요?” 김우진은 오히려 강준에게 되물었다. “그야, 헐값에 탑스퀘어를 먹으려고 했으니까요…….” “하하! 탑스퀘어가 그렇게 값어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탑스퀘어 사업 때문에 나진패션이 자본잠식 상태인 거는 아시죠?” 강준은 할 말이 없었다. 방화사건으로 인해 탑스퀘어의 가치는 시장에서 실제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이었다. 그때 강준의 눈에 김우진이 찬 명품 시계가 보였다. 강준은 상대의 기억을 읽을 틈을 노리고 있었다. “혹시 이 시계…… 연남시 경찰서장도 차고 있던데…….” 강준은 그 말을 넌지시 던지며 찻잔을 잡으려는 김우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 순간 김우진의 기억이 강준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채원이는 당분간 안 보일 거야. 외국에 보냈거든.] [최기동이 입 잘 막으려면 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싫다는 애를 언제까지 억지로 붙여놔?]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여자는 골드의 마담인 박영미였다. 그녀와 김우진이 친밀한 사이였다는 건 강준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담배를 꺼내문 박영미는 김우진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전 회장이 뉴월드 상가 다시 손대려고 해…….] [뭐? 언제부터!] [이번에 한승일 시장 라인 잡은 거 알지?] [알지, 100억으로 최진태 휘어잡고, 그 최진태 장인을 소개받은 거잖아.] 박영미는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김우진을 바라봤다. [우진 씨, 탑스퀘어 정도면 많이 올라간 거 아냐? 뭘 여기서 더 어쩌려고 그래?] [이거는 내가 먹을 게 없어. 알잖아? 규모 키워서 최진태가 운영하는 홍콩회사에 되팔려는 거. 그럼 그 차액이 나한테 오겠어?] [그래도 돈 잘 벌잖아. 그럼 됐지! 뭘 더 바래?] 둘의 대화는 강준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둘은 연인관계였다. [영미야, 너는 옆에서 전 회장이랑 노친네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만 나한테 잘 알려주면 돼.] 김우진은 박영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항상 그랬지. 우리가 저들보다 못한 게 없다고…… 너하고 나만 맘 다잡으면 뭐든 할 수 있어. 나만 믿고 따라와.] [……뉴월드 상가 작업 들어가면 뒤쪽에 있는 주차장 용지랑 주택들 깡그리 같이 끌고 들어갈 거야. 무슨 복합 단지를 만든다나 뭐라나…….] [오호라, 판을 키웠네……?] 박영미가 꼰 다리를 반대로 꼬면서 김우진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아마 김우진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 있는 강준은 박영미의 움직임을 포착해냈다. 그녀는 김우진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전대성이 만든 판을 뒤흔들 수 있을지 말이었다. “연남 경찰서장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강준의 눈앞에는 김우진이 짐짓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까?” “성원화재의 보험조사관이 이렇게 엉뚱한 얘기를 하시는 분이신 줄은 몰랐네요.” “채원이라는 여자를 찾아서 설득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최기동이 진실을 말하게 되겠죠.” 채원을 언급하는 강준에 김우진은 놀란 눈빛을 지었다. “술집 여자 말을 누가 믿을까요? 아마 최기동도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을 겁니다…….” 강준은 채원을 찾는 동시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그건 뉴월드 상가의 조합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대형 참사만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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