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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 고의방화 (3) (28/250)

028. 고의방화 (3)2021.12.28.

최기동은 듣던 대로 완강한 인물이었다. 강준은 조사실에 마주 앉은 최기동을 빤히 바라봤다. 몇 번에 걸쳐 그의 기억을 읽었지만, 강준이 읽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김우진에게 돈을 받는 장면뿐이었다. [회장님이 주시는 거니까 잘 챙겨 받으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존대하는 말투며 정중한 태도. 김우진이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 그대로였다. 슬며시 건넨 종이봉투엔 자그마치 1억 원에 해당하는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휴, 감사드립니다. 하하!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뭔가요?] [그림을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외국인 직원들이 쓰레기 소각장에 모여 담배를 피워대더군요. 아직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버려대면서 말이죠…….] [흐흐, 외국인 애들이야 자기네들 나라로 가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았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그리고 최 과장님, 제가 부탁할 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긴장한 듯 눈썹을 치켜뜬 최기동에게 김우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꺼냈다. [전산시스템에 있는 재고 물품을 130억 원 정도로 맞춰 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네? 130억이요!] 놀란 듯 되묻는 최기동이었다. 하지만 강준이 읽은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이번에는 도무지 결정적인 기억이 읽히지 않았다. “배고프시죠?” 조사실에 들어와 첫 번째 던진 강준의 말이었다. “네, 뭐 출출하네요.” “육개장 시켜드리죠.” 강준은 최기동과 함께 육개장을 비웠다. 강준이 알고 싶은 건 전산시스템을 조작한 증거를 찾아내는 거였다. 벌써 돈으로 매수된 최기동이 순순히 불 리가 만무했다. “최기동 씨, 조작은 몇 명이 한 겁니까?” “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최기동의 입가에서는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그가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돈은 나눠줬습니까?” “아니, 뭘 좀 알아듣게 말씀을 하시던지요! 돈? 무슨 돈요?” “김우진 이사에게 받은 돈 말입니다. 설마 그걸 혼자서 꿀꺽하신 건 아니겠지요?” 강준의 말에 최기동이 살짝 흔들렸다. 지금까지 자신을 의심한 경찰은 많았지만, 구체적으로 돈을 준 김우진을 직접 언급하는 건 강준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꿀꺽하긴 뭘 꿀꺽해요? 난 그냥 물류 관리자였을 뿐이었다니까! 그렇게 의심되면 경찰이 직접 조사를 해보든가…… 가만히 앉아서 나한테 물으면…… 뭐! 내가 답이라도 딱 준답디까?” 오히려 심문자인 강준을 조롱하는 최기동이었다. “이석진 대표가 최 과장을 지목했어요. 라성캐피탈 김우진이랑 짝짜꿍이 돼서 나진패션의 자산을 빼돌리려고 한다고요.” “에? 뭐라고요? 그 새끼가 그래요?” 격한 반응을 보이는 최기동이었다. 강준은 그를 좀 더 자극해보기로 했다. “최 과장이 데리고 있던 물류 직원들이 한패라고 하던데요? 누굽니까? 이 대리? 김 계장?” “아니 시발! 진짜 왜 이래요? 나한테? 어! 변호사 불러줘요!” 김우진은 최기동 과장에게까지 변호사를 붙이진 않았다. 최기동은 자신이 그저 버려지는 카드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뭘 믿고 있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우진 이사는 당신을 버린 것 같은데요? 당신만 방화범으로 구속되면 보험금 지급은 가능하거든요. 물론 당신이 회사의 지시로 방화를 일으킨 게 아니라는 전제하에서요…….” 강준의 말에 최기동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강준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최기동의 기억 속에 한 가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짙은 화장의 여자 얼굴이었다. “최기동 과장님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네? 아뇨.” “그럼 옥바라지를 해줄 가족은 없는 거군요.” “갑자기 지금 뭔 얘기를 하는 겁니까?” “저희 성원화재는 최기동 과장님을 보험사기로 고발하려고 합니다.” “아니, 시발…… 난 그냥 회사생활 열심히 한 죄밖에 없다니까…….” 강준의 조사실 밖으로 손짓하자 문을 벌컥 열렸다. 두 손에 수갑을 찬 사람은 네팔로 돌아갔다던 외국인 노동자 아민이었다. “어…… 너!” “과짱님…… 죄쏭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아민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비행기표를 되판 후,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최 과장은 그에게 천만 원을 쥐여 주며 한국을 떠나라고 했지만, 오히려 한국에 남아 돈을 더 벌려던 아민에게 뒤통수를 맞은 거였다. “최기동, 너는 네팔 직원인 아민을 통해서 일부러 불을 질렀어. 새끼야! 넌 방화혐의를 피해갈 수 없다고!” 이진철의 냉정한 일갈에 최기동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1억 원의 단맛은 감방에서의 몇 년과 뒤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들으셨죠? 아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김우진 이사는 과장님을 버렸다고요. 이제라도 실토하시죠. 그럼 단순 가담자로 처벌을 덜 받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저 자식 말을 믿는다는 겁니까? 저 외국인 놈 말을요?” “그거까지 부인하시겠다…… 알겠습니다. 이 경위님, 전 물어볼 건 다 물어본 거 같네요.” 이진철은 한심하다는 듯이 최기동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차더니 그를 데리고 나갔다. 강준은 최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 예상이 맞았어요. 김 계장 노트북에서 이전 출고자료를 확보했는데 상품 가격이 다르더라고요. 불이 나기 일주일 전에 입고가격이 확 올라갔어요. 어떤 품목은 2배까지 뻥튀기를 했더라고요……. “그걸로 증거는 확보한 거 아닙니까?” ―일단은요…… 하지만 그쪽에서 변호사들이 붙고 있어요. 아마 고의적인 자료조작이 아니라고 우기겠죠……. “결국…… 최기동이 열쇠가 되겠네요. 팀장님, 전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내일 본사로 올라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준은 최기동의 주변 인물부터 탐색해봐야 했다. 그리고 강준은 회귀하기 전, 라성캐피탈을 수사할 당시의 일들을 떠올렸다. ‘최기동을 포섭하려면…… 술과 여자가 있는 곳에 데려갔겠지!’ 강준은 차를 끌고 시청 쪽으로 향했다. 그곳의 뒷골목에는 전대성이 돈을 대서 오픈했다는 ‘골드’라는 유흥주점이 있었다. 시청과 법원이 가까이 있는 곳이라 전대성이 고위공무원들을 상대로 접대를 하곤 했던 곳이었다. ‘아직 마담이 그대로인가…….’ 강준이 기억하는 마담은 전대성에게 투자받은 돈으로 골드를 차려 꽤 짭짭한 돈을 벌었던 여자였다. 하지만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그녀는 전대성을 배신했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강준은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차량에서 대기했다. 아직 종업원들이 출근하기 전이었기에 강준은 최기동의 기억 속에서 봤던 여자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예상대로 해가 저물자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밴에서 내렸고, 강준은 그중에 자신이 봤던 여자가 있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풍성하게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 짙은 화장으로 가려 있지만 웃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매력적인 눈웃음. 강준은 멀리서도 최기동의 기억 속에 등장했던 여자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 최기동 씨 아시죠?” “네? 무슨 말씀이시죠?” “최기동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강준은 덮어놓고 최기동을 언급했다. 여자는 손에 쥔 핸드폰을 슬쩍 쳐다봤지만, 경찰서 구치소에 붙잡혀 있는 최기동에게 연락을 취할 도리는 없었다. “그 오빠, 저 지명 몇 번 해준 손님인데……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건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시죠.”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 여자는 강준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럼 바로 말씀드리죠. 전 성원화재 보험조사팀에서 나왔습니다. 최기동 씨가 보험사기의 대가로 받은 자금이 그쪽한테 흘러 들어간 거 같아서요.” 보험사기라는 말은 아직 20대인 여자에게는 무시무시한 말들이었다. 여자는 안색이 변해서 강준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가게로 들어가려고 했다. “계좌추적을 해보면 최기동 씨의 자금 행방은 금방 드러날 겁니다. 저도 그쪽을 괜히 엮으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초지종을 좀 듣고 싶은 것뿐이죠.” 강준의 말에 여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강준은 우선 그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전 경찰도 아니라서 수사권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기동 씨의 보험사기에 그쪽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도 압니다.” “제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 왜 저한테 뭘 캐내시려는 거죠?” “그야 그쪽이 최기동 씨를 잘 알 것 같거든요.” 클러치백을 쥔 여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30분 정도 괜찮아요. 출근 늦으면 가게에서 뭐라고 하거든요…….” 강준은 그녀를 데리고 가게 사람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온 커피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녀는 자신을 채원이라고 말했다. 가명인 게 분명했지만, 최기동의 자금 행적을 밝히는 데는 상관없었다. “현금으로 1억 원을 받았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보험조사 업무도 나름 노하우가 있습니다. 그 정도는 파악했습니다.” 강준이 최기동의 기억을 읽어서 알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먼저 말문을 연 건 여자 쪽이었다. “원래 골드가 라성캐피탈 거라는 거 아시죠?” “대충은 들었습니다.” “그 오빠한테 큰돈이 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하고 가게에 왔을 때 제가 확 물은 거죠…….” “마담이 붙여 준 겁니까?” “그런 셈이에요. 근데 제가 먼저 스폰을 제안한 건 아니었어요…… 그 오빠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거지.” 채원은 한번 말문을 트자 강준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뭔가를 더 감추고 있었다. “아직 저한테 털어놓지 않은 게 있으신 거 같은데요?” 강준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려는 여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제가 비흡연자라서요…… 연기에 좀 민감하거든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여자와는 상관없이 강준의 머릿속에는 다급한 표정의 최기동이 떠올랐다. [채원아, 이거 오빠가 너 믿으니까 맡기는 거다! 알지?] [뭔데, 그래……? 어, 이게 다 뭐야?] 여자는 최기동이 가져온 종이가방에서 돈다발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7천이야. 여기 금고에 넣어둘 테니까…… 넌 오빠가 말할 때까지 입 닫고 있으면 되는 거야.] [알겠어.] [내가 혹시 돈 갖다주라고 하는 데 있으면 거기로 갖다주면 되고!] 최기동이 경찰에 출두하기 직전인 시점이었다. 그는 방화범 역할을 한 아민에게 천만 원, 그리고 자신과 함께 전산 기록을 조작한 이 대리와 김 계장에게 각각 오백만 원을 나눠줬다. 그리고 남은 천만 원으로는 골드에서 직원들과 유흥을 즐기고 채원에게 스폰비까지 지급했던 것이었다. [채원아, 오빠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알지, 우리 같이 새출발하기로 했잖아. 나 오빠만 믿고 있어.] [그래, 다 잘될 거야. 김우진 이사가 날 굉장히 신뢰하고 있거든!] 최기동은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이제 감방에서나 추억할 헛된 꿈이 될 예정이었다. 강준의 의식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채원의 앞으로 돌아왔다. “채원 씨, 집이 어디예요?”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죠?” “최기동이 숨겨놓은 돈을 찾으러 가야 하니까요.” 강준은 핸드폰을 꺼내 이진철 경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원이 도망치듯 벌떡 일어났다. 최기동이 맡긴 돈은 이미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자기 돈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경찰보다 빨리 자기 집 금고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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