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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 고의방화 (2) (27/250)

027. 고의방화 (2)2021.12.27.

“대표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 저희 대표님께서 경찰서장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정말…… 문제없는 거죠?” “네, 믿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침착한 말투와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얀 피부. 그는 라성캐피탈의 금고지기 김우진이었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웅크리고 있는 사내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김우진과 마주 앉은 사내는 나진패션 창업주의 아들인 이석진이었다. 그는 편직업체에서부터 국내 굴지의 패션기업을 일군 이덕수의 외아들이었다. 하지만 이덕수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한 이후, 회사를 물려받은 이석진은 전과 같은 사세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석진이 남들보다 딱히 무능한 건 아니었지만, 패션업계가 전체적으로 침체기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저한테 동의라도 구했어야죠!” “대표님도 실질적으로 동의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동산종합보험에도 가입하신 거고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여러 군데 중복가입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되면 분명히 의심을 살 겁니다!” 이석진은 나진패션에 이사진으로 파견된 김우진이 자신을 은근히 압박하는 걸 알고 있었다. ‘협박인가……? 하긴, 협박은 예전부터 당해 왔던 거나 다름없지.’ 몇 년 전 이석진이 야심 차게 시작한 한국형 SPA브랜드 탑스퀘어는 나진패션의 리테일 부문의 역량을 집결시킨 사업이었다. 그렇게 던진 이석진의 승부수는 곧바로 자금난에 봉착했다. 규모의 경제인 매출볼륨화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대형 매장을 십여 개나 한꺼번에 오픈했던 게 독으로 돌아왔다. 이석진은 금융권을 돌아다니며 기업 대출을 알아봤지만, 이미 낌새를 눈치챈 은행들은 집요하게 담보를 요구했다. 그렇게 알짜 자산들이 하나둘씩 저당 잡히기 시작했을 때, 이석진은 전대성을 소개받았다. “그때 저하고 처음 만났던 그 일식집에서 경찰서장을 만나고 있답니까?” “아마도요…… 화재는 외국인노동자의 담뱃불로 인한 실화로 결론이 날 겁니다. 이미 CCTV로도 증거를 확보해 놨고요.” “보험 가입 여부 확인은요?” “이미 결론 난 사건에 굳이 조사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노골적으로 화재 사건을 무마하겠다는 말이었다. “보험금을 지급하는 보험사는요? 보험가액을 맞추려고 여러 군데 중복해서 가입한 걸 안 걸린다고요?” 부동산과 물품 같은 동산의 손해를 보상하는 손해보험에서는 ‘이득 금지의 원칙’이 적용된다. 그건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만 보상하고 보험으로 이득이 발생되는 걸 금지하는 보험업계의 대원칙이다. 그래서 132억 원의 보험가액으로 보험을 들고 싶어도 보험사에서는 보험가액의 30%에서 50% 수준으로 보상하는 계약을 내민다. 하지만 그런 손해보험을 여러 개 계약한다면? 원칙적으로 132억 원의 보험가액을 전부 보상받을 수 있게 된다. 라성캐피탈 김우진이 노린 것은 바로 그런 허점이었다. “이번에 큰 액수로 보상을 받으시면 그걸로 다시 탑스퀘어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아…… 이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이석진은 담뱃갑을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라도 피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그랬던 대로 사옥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연식이 오래된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비좁아 계단으로 올라가는 게 오히려 속 편했다. 건물관리인은 사내 규칙으로 실내흡연을 금지하자 옥상 문을 자연스럽게 열어두고 가끔 꽁초만 치우는 형편이었다. “후우우…… 젠장…….” 담배 연기를 내뿜은 이석진은 한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우진이 벌인 방화가 계획대로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다. “나진패션 이석진 대표님?” “어? 누구…… 시죠?” “성원화재 보험조사 2팀의 박강준 대리입니다.” 보험사에서 나왔다는 말에 이석진은 이미 온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근데…… 왜 저를……?” “번암동 물류센터 화재 조사 차원에서요……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던 직원분들을 좀 만나보고 오는 길입니다.” “네? 저희 직원이요?” “물류센터 책임자가 최기동 과장이더라고요.” 이석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최기동은 나진패션에서 나진물류로 옮긴 간부 직원이었다. 회사의 모든 물류를 전담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나진물류였지만, 실상은 나진패션으로부터 고정적인 일거리를 받아 말 그대로 앉아서 돈을 버는 계열사였다. 물론 그 계열사의 대표는 김우진이었고, 대주주는 라성캐피탈이었다. 최기동은 그런 상황을 재빨리 간파하고는 김우진의 편에 붙어 자신을 배신하고 나진물류로 자리를 옮긴 자였다. 그가 보험사에 무슨 말을 했는지 이석진은 심히 걱정스러웠다. “뭐라 그랬습니까……?”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네? 이상한 구석이라니요……?” “CCTV가 조작된 정황이 있다네요. 담뱃불을 소각장에 버린 건 네팔에서 온 노동자인데…… 그 사람이 담뱃불을 던진 시각부터 불이 타오르는 시각 사이에…… CCTV가 잠시 작동하지 않았더라고요.” “네? CCTV가 왜?” “그러니까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근데 그걸 최기동 과장에게 물어보니 입을 꾹 다물더라고요. 마치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긴 했는데 말이죠.” 이석진은 그 순간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 서로 차단된 상황에서 서로를 믿지 못해 범죄를 불게 되는 딜레마였다. 강준은 이석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확인했다. 최기동이 뭔가를 말하려 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완강히 CCTV의 작동오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경찰로서는 그런 그의 주장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나진패션의 대표를 찾아와 미끼를 던져본 거였다. 그리고 이석진은 그 미끼를 덥석 물기 직전이었다. “후우……!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최근에 라성캐피탈로부터 자금을 빌리신 적이 있으신가요?” 강준의 질문에 이석진의 눈이 커졌다. 이제 뭐라 둘러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석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에서 담배를 뺐다. “……이거 한 대만 피우고 얘기합시다…….” 강준은 말없이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줬다. * * * 며칠 뒤, 성원화재는 이석진을 보험사기로 경찰에 고발했다. 그리고 이석진은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하지만 강준과 얘기했을 때와는 입장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진철은 직접 이석진을 조사했다. 그리고 조사실 밖에서 강준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석진 씨, 보험사 3곳의 동산종합보험에 가입하고 그중 1곳의 보험사에는 화재보험까지 가입하셨네요. 맞습니까?” “네, 법인 명의로 그 보험들에 가입한 건 사실입니다.” “직접 가입하신 거죠?” “……인감을 도용당한 겁니다.” 이진철 경위는 타자를 두드리다가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직접 지시한 게 아니라는 겁니까?” “네, 화재보험에 가입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동산에 관한 손해보험에 가입했다는 건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원화재 한 곳에만 1,500만 원의 보험료가 나갔습니다! 한국보험과 해리츠손보를 합치면 5천만 원 정도가 한꺼번에 빠져나갔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명하시겠어요?” 보험사기를 위한 정황 증거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3개월 전에 가입한 3곳의 동산보험으로 132억에 달하는 원부자재, 완제품의 보험가액 전액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며칠 전 강준에게 라성캐피탈의 경영간섭에 대해 토로해왔던 이석진이었지만, 그간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도통 물러설 기미가 안 보였다. “실질적으로 나진패션의 실무적인 부분은 김우진 이사가 진행했었습니다. 전…… 탑스퀘어 쪽만 책임지는 입장이라…… 그런 세세한 사항까지는 챙기지 못했습니다.” 김우진에게 책임을 몰아주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그런 전략이 이석진의 머리에서 나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변호사 선임을 한 상태니까…… 제 변호사와 얘기하시면 될 것 같네요.” “물론 그쪽 변호사와도 얘기해야죠. 하지만 그 전에 당사자에게 확인할 것들도 있습니다. 최근 나진패션의 경영이 많이 악화됐더라고요? 자본 잠식 상태던데…….” “네, 힘든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번 화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물류센터 소각장에서 담뱃불을 던진 사람은 네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였는데, 공교롭게도 사건 다음 날 출국했더라고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진철은 이석진의 눈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자기가 낸 불이 무서워서 본국으로 도주를 한 것인데…… 비행기표는 며칠 전에 결제했더라고요…… 어떻게 자기가 불을 낼 줄 알고 미리 비행기표를 산 걸까요?” 그것까지는 변호인에게 코치 받지 못한 이석진이었다.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저희도 그 사람 때문에 화재를 당한 피해자입니다! 피해자요!” “아하…… 피해자요…… 피해자라고 하기엔 피해를 본 게 너무 없으신데요?” 비꼬는 이진철의 말에 이석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최기동 과장이 아직 구속상태인 거 아시죠?” “……왜 안 풀어주는 겁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런 정황도 있고…… 또 하나는 ERP시스템(자원관리시스템)에서 물품 가격을 조작한 정황이 포착돼서요.” 이석진이 정말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132억 원의 보험가액을 맞추려면 전산에서 상품가격을 높여놔야 했다. 그래야 피해보상액 조사를 할 때 피해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이석진은 이 경위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흙색으로 변했다. 그는 단순히 탑스퀘어 매장에서 회전이 안 되는 악성 재고를 처분하는 수준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직적인 물품가 조작은 엄연한 범죄행위였다. 이석진은 그제야 자신이 김우진 이사에게 끝까지 속았고, 엄청난 범죄에 깊게 빠졌음을 직감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이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그에게 남은 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모른다고 발뺌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물류센터에서 일한 직원만 15명 정도 되더군요. 그들 입을 다 막을 수 있을까요?” “…….” 이석진의 머릿속은 온통 하얘졌다. 그리고 며칠 전 옥상에서 강준의 조언을 들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 대표님, 그냥 다 털어놓으시고 사실대로 말씀하신다면 직접적인 방화 지시 혐의에 대해서는 피해가실 수 있습니다.] [그…… 그렇게 하죠……. 제가 지시하지 않은 건 정말 사실이니까요.] [아마 대표님을 회유하려 할 겁니다. 거기에 말려 들어가면 저도 어떻게 도와드릴 수 없을 겁니다…….] 강준은 바깥에서 발뺌하며 입을 다문 이석진을 차가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박 대리님, 우리 예상하고는 틀린데요?” 최은정이 강준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석진으로서는 나진패션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나마 제값으로 회사를 매각할 기회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나진패션은 이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진패션을 라성캐피탈이 헐값에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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