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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고의방화 (1) (26/250)

026. 고의방화 (1)2021.12.26.

강준의 대리 승진은 최창식 회장의 지시사항이었다. 최근 건강이 나빠지긴 했어도 최 회장은 김성호 이사를 통해 그룹 내에서 돌아가고 있는 일은 챙기고 있었다. “한 상무가 보기엔 어때?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는 게 맞는 거 같아?” 최 회장은 영업 총괄 책임자인 한종진 상무와 최근 사내에서 논란이 된 보험조사 2팀의 최은정을 함께 불렀다. 둘을 직접 대면시켜 놓고, 인트라넷에 오른 영업본부장들의 요구사항에 관해 대놓고 물어볼 요량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을 한 상무였다. “제가 볼 때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잘못했다간 몇 년 전처럼 요실금 수술 환자에게 500만 원씩 꼬박꼬박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영업본부장들이 원하는 치매 진단비가 얼마야?” “천만 원입니다. 솔직히 정말 치매라면 천만 원이 그리 큰 돈은 아니죠……. 다만, 진단 기준이 문제입니다. 병원 측에서 장난질을 쳐대면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은정이 한 상무의 말을 받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 약관에는 뇌영상 소견 결과를 기초로 의사가 진단을 내린다고 돼 있어요…… 이게 뭘 하는 거냐면 의사들이 자의적으로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거야?” 최 회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최은정을 응시했다.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해야죠. CT나 MRI, 뇌파검사, 뇌척수액검사 자료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또, 계속 얘기해봐.” “면책 기간을 지정해야 해요. 치매기가 있는 사람이 역선택으로 보험에 가입해 버리면 보험손해율이 엄청날 거예요.” “얼마 정도의 기간을 원하는 거냐?” “2년이요. 2년은 되어야 안정적으로 보험상품을 운용할 수 있어요.” 최 회장은 반대편에 앉아 있던 한 상무를 바라봤다. “들었지? 자네도 뭐 할 말 있으면 해봐.” 한종진 상무는 한차례 잔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회장님, 최 팀장의 말이 다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모든 상품에는 위험성이 다 있는 법입니다. 굳이 우리 성원화재가 먼저 앞장서서 병원 협회와 척을 질 필요가 있을까요……?” “음, 그럼 뭘 어쩌자는 거야?” “일단 다른 보험사들이 경증 치매를 보장하는 상품들을 내놓을 겁니다. 그럼 우리도 대응 상품을 내놔야겠죠…… 하지만 경증 치매의 보험손해율이 올라가면 다른 보험사들이 먼저 타격을 입으니 결론적으로 성원화재가 보험업계에서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 상무의 전략은 지극히 보수적인 전략이었다. 최창식 회장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되물었다. “그게 다야?” “베이비붐 세대가 10년 뒤면 노년층이 될 겁니다. 그 고객들을 뺏길 수는 없죠. 경증 치매 상품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상품을 개발해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듣고 싶은 말이 그거야. 무조건 안 된다. 그런 말만 하지 말고 대안을 가져와, 대안을! 알겠냐 최 팀장?” 최은정은 화살이 다시 자기에게 온 것이 못마땅했지만, 한 상무의 타협안에 내심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네. 알겠어요.” 최 회장은 웬일로 군말이 없는 최은정에게 한풀 누그러진 말투로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될 수 있으면 업계에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은정이 네가 언제까지 보험조사팀에만 있으라는 법이 있냐? 너도 나중에는 병원 협회든 정부 공무원이건 같이 일해야 할 기회가 있을 거야……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협력해야 할 때도 있는 게다.” “저도 알아요.” “알긴…… 쯧! 그리고 네 옆에 있는 박강준 그 친구는 좀 어때? 대리 달아줄 만해?” “저희 팀원 승진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그거 내가 그런 거 아니다. 김 이사가 제안한 거야. 너희 팀이 힘이 달린다고 그러더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회장의 동의가 없었다면 정기 인사가 아닌 방식으로 강준의 대리 승진이 이뤄질 수 없었다는 걸 최은정은 알고 있었다. “이정훈 팀장이 생각보다 견제가 심한 거 아시죠? 이 기회에 팀원 한 명 늘려주시는 거 어때요?” “그거야 인사팀장한테 물어봐라. 나한테 왈가불가하지 말고.” “이희성 부장한테 말한다고 그게 되면 진즉에 했죠…… 씨알도 안 먹히니까 그런 거죠…….” “그렇다고 이 애비 찬스를 쓰겠다는 거냐?” 최창식 회장은 본론을 콕 집어 얘기했다. 최 회장은 딸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 충원에 대해서 더 조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반칙 쓰면 안 되죠.” “은정아, 요즘 진호는 뭘 하고 지내냐?” “오빠는 내과 과장으로 잘 지내고 있어요. 왜요?”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고?” 최 회장은 장남에 대해서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오빠는 경영자 스타일은 아닌 거 잘 아시잖아요? 본인도 그걸 원하지 않고요…….” “에잇! 자리를 주려는 놈은 줘도 받지를 않고…… 쯧!” 최 회장은 뒷말을 얼버무렸지만, 장남과는 다르게 욕심을 부리는 둘째 최진태를 언급하려 했다는 건 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가볼게요…….” 최은정과 한 상무를 내보낸 최창식 회장은 김성호 이사를 다시 불러들였다. “진태는 좀 어때? 정말 한 상무를 밀어내고야 말겠다는 의도야?” “한 번에 안 되리라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간을 보는 거겠죠.” “하아…… 정말 인생 마음대로 안 되는구먼…….” 최 회장은 오랜 측근인 김 이사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옥석이 가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래? 자네는 그 옥석이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어제의 판단이 내일은 틀릴 수 있는 게 세상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자네는 역시 잘 빠져나가는군. 난 진태가 정말 한 상무를 자기 힘으로 제친다면 그 녀석을 인정해 줄 생각이야. 남들과 아우르는 능력은 좀 못 미쳐도 뭔가를 쥐려는 욕심은 날 꼭 빼닮았거든.” “정말…… 최진태 이사를 후계자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왜, 안 되나?” 김성호 이사는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진태가 회장의 사람들을 내치는 걸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최 회장이었다. “그게 아니라…….” “알아!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네는 진태가 반칙을 쓰지 않는지나 지켜봐. 아무리 내 자리를 원한다고 해도…… 반칙으로 올라오게 되면 이 자리를 지켜내질 못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 봐…….” “이따가 큰 사모님 계신 곳에는 언제쯤 가실 생각이십니까? 미리 차 준비해두겠습니다.” “음 한 시간 뒤에 가지.” 최창식 회장이 자신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걸 느끼면서 점차 후계자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예전 같으면 불호령을 내렸을 최진태의 행각에도 이번에는 지켜보는 것이었다. ‘에이…… 은정이 녀석하고 진태 놈이 반반씩 섞였더라면…….’ 최 회장은 최근 들어 최은정의 친모인 이영란이 더 자주 떠올랐다. 살아 있을 적에 잘해주지 못하고 속만 썩였던 것이 내내 가슴 아플 뿐이었다. “세상살이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이게 다 내 업보인지도…….” 최창식 회장은 자신이 세운 성원그룹의 사옥 꼭대기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 * * 2006년 3월 연남시 번암동 나진패션 물류센터. 겨울의 강풍이 불어오는 날씨였다. 물류센터의 뒤편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시작된 불길은 점점 커졌고,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층 건물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이 단열재인 우레탄폼이 화재를 증폭시켰다. 가연성을 지닌 우레탄폼은 화재 현장에 검은 유독가스를 잔뜩 발생시켜 화재 진압을 어렵게 했다. 결국, 물류센터는 뼈대만 남고 폐허가 되어버렸다. 강준이 최은정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건 화재 사고가 일어나고 하루가 지난 후였다. “박 대리님, 이거 분명히 냄새가 납니다.” 강준에게 연락을 준 사람은 연남경찰서 경제수사과의 이진철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물류센터의 소유주가 전대성임을 알아채고 강준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게다가 물류센터의 화재보험은 성원화재에 가입되어 있었다. 전대성이 가입한 화재보험은 부동산인 건물피해에 관한 것일 뿐이었지만, 문제는 물류센터에 입주한 나진패션이 가입한 동산보험이었다. 나진패션의 동산보험은 물류센터에 입고된 보관 물품에 대해 보상을 해줘야 하는 All RISK 보험상품이었다. 전위험 담보방식, 그건 모든 우연한 사고에 의한 손해를 모두 보험금으로 보상해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경위님 말씀이 맞네요…… 나진패션이 동산종합보험에 가입한 건 불과 석 달 전이네요…….” “보험 가입액은 얼마였나요?” “일단 성원화재 쪽에 가입된 건 나진패션의 원부자재와 완제품을 합한 재고자산 132억이네요…… 보험료는 1,500만 원을 일시불로 납입했고요.”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보험 가입액이 컸다. 소방서와 경찰은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도 기초적인 조사가 필요한 화재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물류센터의 소유자가 전대성이었다. 이진철과 강준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팀장님, 나진패션은 어떤 회사입니까?” 강준은 회귀하기 전에 나진패션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지 못했었다. “탑스퀘어를 운영하는 회사잖아요.” “아! 탑스퀘어가 나진패션에서 하던 거였군요?” “뭐, 강준 씨는 모를 수 있죠. 패션업계 일이니까요…….” 재계 사정에 나름 밝은 최은정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탑스퀘어를 다른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전대성이 인수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SPA브랜드로 키우겠다며 설레발을 쳤던 의류 브랜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외국 기업에 팔겠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수많은 부채를 끌어안고는 부도를 내고 말았던 회사였다. ‘탑스퀘어…… 확실히 전대성이 뭔가를 꾸미는 게 분명해!’ “경위님, 소방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계속 현장을 조사 중인데…… 기다려봐야죠. 만약에 방화라고 하더라도 대놓고 불을 질렀겠습니까? 아마 증거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근처에 CCTV는 있습니까?” “네, 불이 시작된 곳이 쓰레기 분리수거장이니까 그쪽을 비추는 CCTV부터 확인 중입니다.” “그럼, 확인되면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나진패션 쪽 사람들을 만나보겠습니다.” “네, 뭔가 나오면 알려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강준은 이진철 경위의 어깨를 잡아주고는 현장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탄 강준은 연남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나진패션의 물류센터 관리자를 직접 만나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강준 씨, 나진패션이 왜 전대성이 소유한 물류창고를 빌렸을까요?” “그야…… 의류 상품이 화재에 제일 취약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화재로 그을음만 생겨도 완전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것도 있겠죠. 하지만 최근에 나진패션의 경영이 많이 어려워진 거로 알아요…….” 강준은 뭔가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일단 확인부터 해보시죠! 팀장님의 말이 맞다면 나진패션의 직원들도 분명 알고 있는 게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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