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정승태 영업본부장2021.12.25.
2006년 신규 인사이동에서 정승태는 강남 영업본부장의 자리에 발탁됐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연남 지점장에 머물던 정승태가 본부장에 오른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버지의 사람들을 몰아내려는 최진태 이사의 숙청 작업이 있었다. “부장님, 저 친구 본부장 역할 잘 해낼까요?” 영업 총괄 본부의 간부 회식 자리에 온 최진태가 인사팀장인 이희성 부장에게 물었다. “그래도 딴생각 안 품고 이사님께 충성을 다할 겁니다. 당분간은요…….” 이 부장은 사람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자신이 보아왔던 수많은 직원이 초심과는 달리 이리저리 사내 정치에 휘둘리다가 자기 능력과는 별개로 위로 올라가기도 했고 내쳐지기도 했다. 이 부장은 그런 사내 정치의 놀음이 성원그룹에 아예 해가 된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인간세계란 그런 경쟁을 통해서 외적인 성과도 내고 조직이 굴러가는 원동력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법이었으니까 말이었다. “이 부장님이 추천한 인물이니 제가 이견을 가질 수가 있나요…… 하하!” 최 이사가 언뜻 보기엔 겸손을 떠는 것 같았지만, 이희성 부장은 그게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이 책임을 떠안으라는 말로 들렸다. ‘교활한 인간 같으니라고…….’ 지금의 영업 총괄 이사는 아직 최진태의 편에 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분간 이희성 부장은 최진태에게 호응할 생각이었다. ‘마지막까지 내가 누구 편인지 밝힐 필요는 없지. 그래야 내 몸값이 높아지니까…….’ 전략적 모호성! 이희성 부장이 그간 사내 정치에서 살아남았던 비결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값을 최대한 끌어올리면서도 살아남는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최진태는 그런 이 부장의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한종진 상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은 한 상무를 교체하기 전에 주변의 팔다리부터 자기 사람으로 바꿔놓는다는 것이었다. “정 부장이 한종진을 들이박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깜냥이 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요…….” “이 부장님, 그래도 들이박히면 흔들리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만요.” “이 부장님도 이제는 임원으로 승진하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기회가 났을 때, 감정적으로 생각 마시고 냉철하게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이희성 부장은 자신을 한 상무의 자리에 앉혀주겠다는 노골적인 유혹을 던지는 최진태 이사에게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일 뿐이었다. 그때, 그런 내막도 모르는 정승태가 연신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최진태 이사의 자리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양주를 들고 조심스럽게 최 이사에게 말을 건넸다. “이사님,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아이고 정 본부장, 강남 영업본부를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하하!” 너스레를 떨며 잔을 받는 최진태는 술을 바로 마시고는 잔을 정승태에서 돌려줬다. 그리고는 술이 넘칠 정도로 따랐다. “정 본부장, 이제 본부장이 되셨으니 영업본부에도 새바람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만 한다고 새바람이 일어나진 않겠죠…… 지금까지의 관행들, 정 본부장님께서 그걸 한번 깨뜨려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관행요?” 정승태는 눈치가 재빠른 사람이었지만, 최진태가 뭘 요구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 정승태가 취할 요령은 일단 수긍한 후, 천천히 상급자의 의도를 파악해 보는 거였다. “네, 제가 최선을 다해 이사님 뒤를 받치겠습니다!” “듣던 대로 각오가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여기 있는 이 부장님께 조언을 구하시면 됩니다. 하하!” 최진태는 정승태가 어느 라인을 통해 보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 셈이었다. 정승태는 최진태 이사가 따라준 위스키를 목구멍 뒤로 넘겼다. 뜨끈한 알코올이 정승태의 목구멍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 * * 영업 총괄 이사실. “상무님, 보장 항목에 요실금 항목이 빠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 경쟁사인 한국보험에서는 여성 질병에 대해서는 감액 기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험손해율이 치솟는 거 아닌가! 정 부장은 본부장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나대는 거야!” 입사 25년 차의 한종진 상무는 새파란 후배 본부장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까지 자신에게 대드는 상황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보험의 역선택! 이미 있는 질병을 숨기고 보험에 가입해 보험금을 빼먹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험상품에는 보험 가입 후 일정 기간 보상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일부 금액만 보상받을 수 있게 장치를 해뒀다. 그게 바로 보험상품의 면책 기간과 감액 기간이었다. 근데, 갑자기 치고 올라온 새까만 후배 본부장이 그 감액 기간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거였다. “눈 뜨고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아무리 설계사들 푸시해 봤자 뭐합니까? 상품 자체에 경쟁력이 없는데…….” “이봐 정 부장, 누군들 그걸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알아! 너만 똑똑하고 남들은 다 병신이야!” “아는데 왜 실행은 못 하시는 겁니까? 영업은 공격적이어야 합니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이제 나를 가르치려 들어!” 한 상무는 정승태가 가져온 기안을 집어 던졌다. 진심으로 열이 뻗쳐 오른 한 상무는 자신이 더 이상 성원화재에 있다가는 더한 꼴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나가봐!” 상무실을 빠져나온 정승태는 혼쭐이 났음에도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강남 영업본부장으로 올라서고 정승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누가 최진태 이사의 끈을 잡고 있는지, 누가 최창식 회장의 라인인지를 말이었다. ‘일단 입장을 정했으니 이대로 밀고 나가야지!’ 그는 누구에게 눈치를 봐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눈치 봐야 할 대상은 직속 상관인 한종진 상무가 아니라 인사권을 쥔 이희성 부장과 차기 회장이 될 최진태 이사뿐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인사부장의 전화였다. 정승태는 복도에 서서 공손히 전화기를 들었다. “네! 부장님!” ―정 부장, 잠깐 이사님 방으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정승태는 최근 들어 최진태 이사가 자주 불러주는 것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완전히 라인을 굳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며칠 후, 정승태가 주도한 다섯 명의 영업본부장은 사내 인트라넷에 성명을 발표했다. [보험조사팀의 무리한 제재로 인해 보험 판매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경쟁 보험사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자사 보험상품 설계에 일방적인 제재를 하지 말아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합니다. 첫째, 우리 영업본부장들은 최근에 판매 중지된 요실금 보상 상품의 판매 재개를 촉구합니다. 둘째, 보험조사팀에서 타당성 검토를 빌미로 판매를 불허하고 있는 경증치매 보상보험의 조속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인트라넷에 올라온 글은 순식간에 그룹 전체로 퍼져나갔다. 최진태 이사가 정승태를 이용해 보험조사 2팀을 이끄는 최은정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영업 총괄 이사 한종진 상무를 한번 흔들어보려는 의도였다. 총괄 이사인 한 상무를 따돌리고 그 밑의 영업본부장들이 자기네들끼리 목소리를 내는 것이니 한 상무의 권위에 생채기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일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히 보험조사 2팀의 최은정이었다. “이건 분명히 병원 협회에서 압력을 넣은 거예요. 보험사가 협회에 무릎을 꿇는 격이라고요!” “한 번 굴복하면 계속 굴복해야 하는 게 걱정이군요.” “그러니까요……! 절대 물러서면 안 되죠.” 강준은 잔뜩 화가 나 있는 최은정을 바라보며 간밤에 만났던 정승태를 떠올렸다. 그는 강준에게 회포를 풀자며 술자리를 만들었지만, 진짜 목적은 최은정의 동향을 파악하는 거였다. 물론 강준은 그 틈을 타 그의 기억을 읽었었다. ‘총괄 이사 한종진…… 정승태 패거리가 달려들어 날리려고 하는 이유가 뭐지?’ “팀장님, 영업 쪽에서 불만을 터트리는 건데…… 일단 영업 총괄인 한종진 상무님과 얘기해보는 게 어떨까요?” “한 상무님요……?” “혹시 친분이 있으십니까?” “제가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김 이사님하고 동기일 거예요.” 강준은 정승태가 뒤에서 보험조사 2팀이 문제라고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인트라넷에 올라온 성명서는 강준의 팀을 겨냥한 것이었다. “팀장님, 아마 이번 일을 빌미로 우리 발을 묶어두려 할 겁니다.” “폐지하라고 난리만 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이정훈 팀장이 보험조사팀을 통합해야 한다며 언제 또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요.” “하긴 이 팀장은 우리가 괜한 소송을 해서 이기지도 못했다고 핀잔을 주는 상황이니까요…….” 요실금 보험사기로 고소했던 SD산부인과의 이혜숙은 병원 협회의 전속 로펌에 사건을 의뢰했고, 그녀의 계획대로 보험사기 방조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이혜숙은 항소했고, 재판은 장기화하고 있었다. 오히려 여러 군데의 보험사를 끼고 요실금 수술로 한몫 챙겼던 김유정의 전 직장 언니와 그 패거리들은 1심에서 나온 집행유예를 받아들였다. 초범이고 반복적이지 않은 점을 고려해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결국, 요실금 보험사기로 실형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환자들이 보험사기에 가담하도록 부추겼던 이혜숙은 장소를 옮겨 이전보다 더 그럴듯한 병원을 개원했다. 항소심에서 패하면 보건복지부로부터 의사면허를 취소당할 수 있었지만, 곧바로 행정소송을 통해 대응할 게 뻔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요실금 보험사기는 잊혀질 거고, 보건복지부는 병원 협회와 적당히 합의를 볼 게 뻔했다. “결국, 손해는 일반 보험계약자들의 몫이네요.” “강준 씨 말이 맞아요. 민간 보험사는 우리도 그렇지만 손해율을 만회하려고 다른 보험료를 조금씩 올리겠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요…….” 그때, 익숙한 얼굴이 보험조사 2팀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김성호 이사였다. “뭐야? 왜 이렇게들 기가 죽어 있어?” “이사님도 보셨잖아요? 영업본부장들이 인트라넷에 저희 저격한 거요.” “나도 봤다.” 김성호 이사는 짧게 답했다. “근데, 그 정도도 각오 안 하고 달려든 거였냐?” “했죠. 근데 정작 찔리니까 아프네요.” “너희는 너희가 졌다고 생각해?” 김 이사의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을 깬 건 의외로 막내인 김준혁이었다. “……요실금 보험사기에 대한 언론 뉴스 기사가 지금까지 총 150건 정도 포털사이트에 올라왔습니다. 물론 보험금 반환까지 가려면 멀었지만…… 사람들은 이제 요실금 수술을 하면서 무리하게 보험금을 청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맞아, 사람들은 이번 일로 크건 작건 보험금을 함부로 타 먹으려고 사기행각을 벌이는 일이 반드시 걸린다는 걸 알게 됐을 거야. 우리 보험조사팀은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응징하는 게 목적은 아니야. 보험상품의 구멍은 늘 뚫릴 수밖에 없어. 그걸 견제하는 게 너희의 역할이다!” 김 이사는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강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다들 기운 내라. 그리고 박강준 축하한다! 너 이제부터 박 대리다.” “네? 대리요?” 갑작스러운 승진 통보였다. “강준 씨, 축하해요! 우리 팀 첫 번째 진급이네요.” “박 대리님, 축하드립니다!” 옆에 있던 최은정과 김준혁이 손뼉을 치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드디어 평사원에서 벗어나는 강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