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요실금 보험사기 (3)2021.12.24.
최 회장의 장남 최진호는 종합병원 내과 과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병원 협회에도 간부로 등록되어 있었다. 성원화재가 요실금 수술에 대한 보험조사에 나선다고 하자 병원 협회는 당장 최진호를 통해 압력을 넣었다. 강준은 성원그룹에서 최근에 인수한 메리안 호텔로 향했다. 최진호는 자신의 여동생 최은정과 해당 사건의 보험조사관인 강준을 불러냈다. ‘최진호…… 대형병원 부원장까지 했던 인물이긴 한데…… 야심가인 최진태에게 가려서 외부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강준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며,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강준 씨! 여기예요.” 탁 트인 고층에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최은정은 입구에 들어선 강준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보험조사 2팀 박강준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은정이가 아주 칭찬이 자자하던데.” “저에게는 과찬입니다.” 최진호는 30대 후반의 의사로 최은정과는 10살 차이가 나는 오빠였다. 최창식 회장의 본처가 뒤늦게 최은정을 낳았을 때, 사람들은 후처인 윤미경이 버림받았다고들 했었다. 하지만 이내 건강이 나빠진 두 남매의 모친은 세상을 떠났고, 윤미경은 극적으로 최 회장의 공식적인 부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최진호가 먼저 운을 뗐다. “알다시피 병원 협회가 저렇게 나오는 건 다 자기네들 살자고 하는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험금 지급액이 너무 큽니다. 이대로 놔뒀다간 감당할 수 없을 거고요.” “흠…… 어차피 지금은 기존 보험에서 요실금 보장액을 낮춘 거 아닌가요?” “네, 지금 판매되는 보장보험은 100만 원까지만 지급됩니다.” “그럼 된 거 아닌가요? 그 이상 민간보험사에서 관여하는 건 의료인의 적극적인 의료행위를 방해할 염려도 있는 거고요.” 최진호는 와인을 들어 강준의 잔을 채웠다. 강준은 그 타이밍을 이용해 그의 기억을 읽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최근 들어 강준은 타인의 기억을 읽으면서 점점 읽어내는 기억의 길이가 짧아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일종의 제약…… 불필요하게 기억을 이것저것 읽을 필요는 없지!’ “내년에 요실금 수술이 정식으로 건강보험 적용항목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솔직히 요실금은 공공보험에서 꼭 지원해야 할 항목은 아닌 거 같습니다.” “병원 협회에서 의사들이 건강보험공단에 압력을 넣었다는 건가요?” “네, 산부인과의 수익성은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최진호는 곤란한 듯 와인 잔을 매만졌다. “오빠,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SD산부인과 인조 테이프 구매량이 실제 시술한 횟수와 달라.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지?” “의사들이 서류를 조작했다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최진호는 깊은 침음을 했다. 의료기기 회사들은 처음에는 판매 자료를 주지 않고 버텼지만,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두 손 들고 항복했다. 덕분에 산부인과들의 요실금 보험사기 건은 검찰로까지 확대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불구속 조사를 받는 여러 명의 의사가 생겨나자 병원 협회 차원에서 나선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생존권 투쟁이었는지도 몰랐다. “은정아,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냐?” “아버지는 보험조사 업무에는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알잖아.” “지금 보험사들이 경쟁적으로 이런저런 보장보험을 많이 만들고 있어. 나중에는 그게 다 부담으로 돌아오겠지만, 당장에 실적을 올려야 하는 경영자로서는 달콤한 유혹일 테고.” “오빠, 그래서 우리가 제동을 걸지 않으면 결국엔 폭주하게 된다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최진호는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병원 협회와 척을 지게 되면 너로서는 널 지지해줄 세력을 잃는 거야.” “알고 있어. 대형병원들이 성원화재 쪽 지분을 많이 갖고 있다는 거.” “아마 병원 협회랑 너랑 싸우게 되면, 진태는 얼씨구나 하고 좋아할 거다. 정말 그룹 경영에는 관심이 없는 거냐?”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셔. 벌써 후계 구도를 논한다는 게 오빠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걱정이 돼서 그러지…….” 최은정의 말에 최진호는 말문이 딱 막혔다. 하지만 최진태가 얼마나 비열한 놈인지 최진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성원그룹을 떠난 것에 대한 자책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최은정, 그리고 박강준…… 너희들 정말 자신 있냐? 병원 협회랑 계속 싸울 자신 있냐고?” “어차피 요실금이 아니더라도 병원은 이런저런 항목으로 보험사들과 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강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잠시 뜸을 들인 최진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병원 협회 쪽에서 여론을 움직이려고 할 거다. 보험사에서 무리하게 보험소비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려 한다는 프레임으로 말이다.” “오빠, 우리가 먼저 역공을 하는 건 어떨까? 지금 일어나는 병원비 과다청구의 보험사기는 결국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지는 일이니까…….” “흐음…… 지금 방송이고 인터넷이고 광고주들이 누구겠어? 아마 규모가 큰 병원들이 쏟아붓는 광고료가 어마어마하겠지?” 최진호의 얘기는 인터넷을 포함한 언론은 철저히 병원 협회의 편이라는 얘기였다. “은정아, 보험조사팀으로 네 일이 보험사기를 캐내는 거겠지만, 우리 성원화재로서는 적당한 선에서 덮고 넘어가는 게 좋을지도 몰라…….” 입술을 질끈 깨문 최은정이 강준을 바라봤다. 강준은 그녀 대신 최진호에게 답했다. “당장에는 이런저런 보험 상품을 팔아먹는 게 이익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험계약자인 고객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더 올바른 선택일 겁니다. 우리 보험조사 2팀은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당차게 말해서 보기 좋네…… 그래, 잘 한번 해봐!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서 병원 협회 놈들 당황하는 거 나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고.” 최진호는 벌써 그런 모습이 상상됐는지 마주 앉은 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 * 양천구 SD산부인과.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이혜숙 원장은 생전 처음 당해보는 압수수색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니 그건 왜 가져가는 거예요?” “하드디스크는 증거 보존을 위해서 압수하는 겁니다.” “환자 진료는 그럼 어떻게 보라는 거예요!” “조속한 시일 내로 조사를 마무리하고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이혜숙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검찰 수사를 당장 막을 수는 없었다. 간호사들은 모두 그 상황에서 원장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녀도 준비를 완전히 안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최후의 상황에서 이혜숙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폐업! 이혜숙은 핸드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머, 김 이사님! 저 이혜숙이에요.” ―어! 원장님, 소식 들었습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아무래도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처리를 할까 해서요…….”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12억까지는 충분히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비와 물품도 전부 인수인계하는 조건으로요! “네, 그럼 김 이사님께 좀 부탁드릴게요~.” 이혜숙은 압수 물품을 들고 나가는 검찰 수사관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리 살벌한 칼을 휘두르는 검찰이지만, 믿고 있는 구석은 있었다. 병원 협회의 전속인 더케이 법무법인이 있었다. 대표 변호사는 이혜숙에게 보험사기가 아니라 보험사기방조로 끌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 내가 원한 게 아니라 환자들이 원한 거고…… 난 그저 환자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라고!’ 보험사기의 주범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방조했는가는 형량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방조죄로 끝난다면 보건복지부의 의사 면허 취소에도 행정소송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몇 년 지날 거고…… 그럼, 그사이에 나는 또 다른 병원 차려서 진료하면 되는 거야.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라고!’ 이혜숙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금만 뻔뻔해지면 다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이혜숙은 멀뚱히 검찰 수사관들을 지켜만 보고 있는 고참 간호사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김 간호사! 지금 구경났어! 본인들 일 찾아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놔! 예약 환자들 챙기고!” “네…… 원장님……!” 이혜숙의 일갈에 그제야 산부인과 접수 층의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듯했다. 검찰 수사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접수 층의 분위기는 완전히 평소 같아졌다. * * * 김유정은 자신을 다시 찾아온 강준을 만나러 점심도 거른 채 옆 빌딩의 카페로 향했다. 자신의 재수술에 강준이 알게 모르게 역할을 했다는 건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 재수술도 잘했고, 지금은 문제없어요.” “혹시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이요?” “직장 동료셨던 이은정 씨를 비롯해 10여 명을 보험사기로 고소했거든요.” 김유정은 그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랐지만, 강준이 자신까지 고발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고발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었다. “저한테 혹시 뭐 원하시는 게 있으세요?” “네, 법정에서 증언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증언이요……?” 김유정은 테이블 밑의 두 손으로 스커트 자락을 꾹 쥐었다. 법정에 자신이 선다는 건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그녀였다. “SD산부인과 이혜숙 병원장을 검찰에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원장은 환자들이 원해서 그랬던 거고 자기는 한 번도 요실금 수술을 권유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 “정말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데…….” “그러니까요……. 김유정 씨가 원장의 거짓말을 법정에서 밝혀주실 수 있을까요?” 강준은 김유정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강요가 아닙니다. 만약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저희가 김유정 씨를 고발하지도 않을 거고요.” 김유정은 불필요한 요실금 수술로 인해 전전긍긍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이혜숙 원장의 매몰찬 책임 회피성 발언들, 그 후로 이어지는 병원의 냉랭한 태도…… 재수술 이후로 잊었던 기억들이 김유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할게요. 제가 증언할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해야죠. 보험금 빌미로 환자들 부추겨서 수술해놓고 책임지지도 않고…… 법적인 책임을 꼭 물어야겠어요. 다시는 저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요…….” “재판에서 검찰이 이혜숙 원장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의료계에 이번 일을 계기로 경고하기엔 충분할 겁니다.” 강준은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네, 저도 그거면 충분해요.” 김유정은 테이블에 놓인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녀가 다시 업무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