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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윗선의 압력 (21/250)

021. 윗선의 압력2021.12.21.

강준은 라성캐피탈의 사무실을 뒤졌다. 필리핀 송종철 사장과의 연관성을 입증할 물증이 더 필요했다. ‘……나를 죽인 인간들이 라성캐피탈과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해…….’ 회귀하기 전 강준을 죽였던 세력은 최진태였다. 강준이 그의 자금 횡령과 뇌물 사건을 수사하다가 폐차장에서 허무하게 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더러운 일을 최진태가 직접 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를 이용해 죽였다면 그건 최진태와 붙어먹은 전대성일 확률이 컸다. 그래서 강준은 이번 기회에 라성캐피탈을 물고 끝까지 파보기로 했다. 조직적인 보험사기의 배후, 15년 전으로 회귀한 이후 강준이 알게 된 전대성의 새로운 실체였다. “강준 씨, 철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요?” “네? 왜요?” “……김성호 이사 지시사항이에요.” 최은정은 난감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김 이사는 라성캐피탈에 대한 조사를 지지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철수 지시를 내린 거였다. “도대체 왜 갑자기 그러는지 알 수가 없네요.” “무슨 이유가 있겠죠. 일단 사무실로 복귀해서 상황을 알아봅시다.” 그때 마침 함께 압수수색을 하던 이진철 경위도 굳은 표정으로 강준에게 다가왔다. 그의 표정에서 뭔가 일이 잘못돼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니! 압수수색까지 온 마당에 여기서 접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한탄하듯 말을 내뱉은 이진철 경위였다. “경찰에서도 무슨 지시가 내려온 겁니까?” “……서장한테서요. 뭐, 우리 서장이야 워낙 조심스러운 양반이라 그런 거지만, 한 경사도 제 말을 안 듣네요.” 한 경사를 비롯한 연남 경찰서의 오랜 동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진철로서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이해합니다. 전대성이 윗선에 힘을 썼나 보네요. 이건 단순한 사채업자 수준이 아닙니다…….” “강준 씨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철수하지만 계속 파볼 겁니다. 구린 냄새가 나거든요.” 강준은 이진철에게 한 발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장이 단독으로 지시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윗선이 있는 건지 알아봐 주세요. 우리를 쥐고 흔드는 놈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이진철은 알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조만간 우리 경찰서 뒤 포차에서 뵙죠.” “좋죠. 이 경위님 연락이라면 언제든 나가겠습니다.” 라성캐피탈 사무실에 전대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류상의 대표자도 김우진이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김우진도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수금 업무를 하는 덩치들만 사무실에서 기웃거릴 뿐이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채권 서류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 팀장님, 분명히 대부업체 사무실에 고객 명부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러네요. 컴퓨터에 있지 않을까요? 근데 생각해보니 컴퓨터 본체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빼돌린 거죠. 우리가 압수수색을 나올 줄 미리 알고 있던 겁니다.” 최은정은 현장에서 건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것에 실망한 눈치였다. “강준 씨, 일단 복귀하죠.” “팀장님, 지난번 회식 때 회장님이 지시하셨던 사항 말입니다.” “이정훈 부장이 보험조사팀 총괄 본부장이 된 거요?” “……혹시 이번 건에 이정훈 부장이 개입한 거 아닐까요?” 강준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김성호 이사가 라성캐피탈에 대한 조사를 지지해주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새로운 인사이동으로 인해 전략기획팀으로 소속이 변경됐다. 아직 보험조사팀에 김성호 이사의 입김이 작용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보험조사팀의 수장인 이정훈 부장의 의사결정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정훈 부장은 비록 라인이 달라지긴 했지만, 10년이 넘도록 김 이사가 데리고 있던 부하직원이었다. 그런 부하직원과 다투는 모습을 연출하는 건 김 이사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준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정훈 부장이 보험조사 2팀 전체를 회의실로 불러냈다. “……시발…….” 강준은 최은정의 뒤를 따라가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김준혁이 그걸 듣고는 긴장한 낯빛으로 강준의 뒤를 따랐다. “야, 최은정 너 이제까지 누구 믿고 설쳤는지 내가 아는데…… 앞으로는 내 지시 없이 함부로 설쳤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여줄게.” 오너가의 딸인 최은정에게 감히 그렇게 말한다는 건 이정훈 부장이 확실히 최진태의 편에 섰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최창식 회장의 권력을 넘보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 아직 최창식 회장 안 죽었잖아? 근데 저런다고? 뭔가 이상한데…….’ 강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최창식 회장은 지금으로부터 3년이 지난 2008년에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격렬한 후계싸움과 수십 건의 소송 끝에 최진태가 이복형인 최진호와 최은정을 제치고 성원그룹 회장에 오른다. 강준의 생각보다는 너무 빨리 최 회장의 권력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뭔가 계획이 달라졌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강준이 보험조사팀에 합류했고, 그렇게 합류한 보험조사 2팀이 몇 가지 보험사기를 밝혀냈을 뿐이었다. ‘겨우 이걸로 최진태의 전체 계획이 틀어진다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건 최창식 회장의 심경이었는지 몰랐다. 최진태로 기울어지던 회장의 마음이 최은정에게로 움직였다면? 그래서 최은정을 감싸는 김성호 이사가 최 회장의 독립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략기획팀으로 발령이 난 것이라면? 최진태가 먼저 본색을 드러낼 동기로 충분히 가능했다. 곱게 체면 차리고 있어서 안 될 상황이라면 진흙탕에서 뜯고 싸우는 것이 최진태의 선택일 지도 몰랐다. “보험조사 2팀은 원래 태생부터 기존 성원화재의 보험조사 업무와는 별개의 조사업무를 하려고 만들어진 팀이에요! 이 부장님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최은정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았다. “보험조사 1팀이고 2팀이고 간에 이제 총괄 책임은 내가 지게 됐어! 근데 책임자를 제쳐두고 니들끼리 움직이겠다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동의할 수 없네요. 이 문제는 김성호 이사님께 말씀드려 보겠어요!” “최은정, 넌 조직이 아주 만만하지?” 이정훈 팀장의 일갈에 최은정이 움찔했다. 오너의 딸인 그녀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건지도 몰랐다. 최은정은 안색이 변한 채 차갑게 대꾸했다. “네, 만만하네요.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최진태 이사가 정말 그룹 후계자가 될 거 같으세요? 만약 후계자 자리에서 탈락한다면요? 그때도 저한테 이렇게 윽박지를 수 있겠어요? 이 부장님!” “아니……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누가 봐도 긴장한 이 부장이었다. 그의 번들번들한 피부에서는 땀이 흘러나왔다. “먼저 협박을 한 게 누군데요!” 둘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강준은 이정훈 부장이 어디까지 최은정을 자극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때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최진태 이사가 직접 보험조사팀이 있는 본사 11층을 찾은 것이었다. “어! 은정아, 무슨 일 있냐? 왜 얼굴이 죽상이야?” “지금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 난 전혀 모르겠는데?” 최진태의 옆에는 인사팀장인 이희성 부장이 서 있었다. “이제는 오빠가 보험조사팀까지 관여하나 보지?” “내가……? 내가 왜?” 능청스럽게 최은정의 의혹을 부정하는 최진태였다. “난 성원건설 대표지, 성원화재 소속은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아! 물론 이번에 신사업기획팀 팀장도 겸직하게 되긴 했지만…… 좌우간 넌 괜한 오해 마라!” “오빠…… 여기 있는 이 부장님 통해서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옆에 있던 이정훈 부장이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아…… 근데 말이야. 너 성원화재 실적이 예전만 못하다는 거 들었어? 그게 누구 때문에 그렇다는데…… 내 생각엔 말이야. 최소한 사람이라면 열심히 하는 사람들 발목은 잡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 “지금 오빠가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나 알아? 불완전판매로 고객들 기만하면서 실적만 높이자는 거 아냐!” 불완전판매란 보험계약자에게 정확한 상품 설명을 하지 않고 판매하는 걸 말하는 것이었다. 김성호 이사는 성원화재의 변액보험 판매에 시동을 걸고 나선 바 있었다. 덕분에 보험업계 순위가 바뀌긴 했지만, 최창식 회장은 그걸 문제 삼지는 않았었다. “좌우간 은정아! 우리부터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전문경영인이다 뭐다 하지만…… 그래도 정작 그룹 생각하는 건 우리 같은 오너가 출신들이야! 안 그래?” “어, 안 그래. 오빠는 그룹이 어떻게 되건 자기 욕심만 채우면 그뿐인 사람 아니야?”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좌우간 내가 오늘 여기 온 거는…….” 강준은 최진태의 입에서 전대성의 라성캐피탈에 대한 얘기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실은 말이야…… 나도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가 않았는데…… 장인어른께 전화 한 통을 받았거든.” “무슨 전화?” “너도 알다시피 우리 장인어른이 연남시를 책임지는 지자체장이시잖아…….” “왜? 오빠한테 또 선거 자금 내놓으래?” “야! 최은정 너 큰일 날 소리를 한다. 지금이 쌍팔년도야? 선거 자금 같은 거 다 합법적인 유권자 기부로 이뤄지는 거야. 하긴…… 너 같은 사회초년생이 뭘 알겠냐?” 하지만 객관적으로 최진태가 최은정을 무시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국내 지방대도 못 가서 해외의 이름 모를 대학의 졸업장을 겨우 따왔고, 최은정은 재벌의 이점이 작동하지 않는 사법고시를 패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뭐야?” “연남시 기업활동에 방해가 되는 일은 좀 자제해 줬으면 하시더라…… 괜히 보험피해액 조정하겠다고 여기저기 설치는 것도 모양새 보기 안 좋고…….” “라성캐피탈 얘기야?” “뭐, 구체적인 거는 말씀을 안 하시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최은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야! 오빠 말 안 끝났다!” 하지만 최은정은 그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무실에 남은 건 박강준과 신입사원 김준혁이었다. “네가 박강준이야?” “네, 제가 박강준입니다.” “우리 영감님이 무슨 생각으로 너를 은정이한테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널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거 명심해라.” 최진태는 이미 박강준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라성캐피탈 전대성과는 무슨 사이이신가요?” “뭐?” 강준의 말에 최진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진태의 옆에 있던 이정훈 부장이 나섰다. “야 박강준! 너 어디 최 이사님 앞에서 입을 함부로 나불거려!” “라성캐피탈 조사는 당분간 중단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닙니다. 전 거기를 계속 지켜보려고 합니다. 쿰쿰한 구린내가 나거든요.” 최진태가 눈썹을 치켜뜨며 강준을 노려봤다. “이 새끼는 도대체 뭔데 나대냐? 너 죽을래?” 이복동생인 최은정까지 자리에 없자 완전히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최진태였다. “혹시 홍콩에 세우는 투자법인…… 그게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회귀하기 전 강준이 최진태에 대해 수사하던 내용이었다. 최진태는 강준의 말에 얼음이 된 듯 표정이 굳었다. 아직 측근들에게조차 공유하지 않았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너 정말 뭐냐……!” 강준을 차마 어쩌지 못하고 말끝만 흐리는 최진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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