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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최진태 이사 (20/250)

020. 최진태 이사2021.12.20.

머리가 희끗희끗한 전대성은 약속보다 조금 늦게 본인이 직접 예약해 둔 일식집에 도착했다. 오래됐지만, 은밀한 내실을 이용할 수 있어서 그가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뭔가를 부탁하러 온 것이지만, 전혀 부탁하는 사람답지 않게 행동할 것! 전대성이 사람을 대하는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꿀리고 들어가서 얻을 게 있으면 내가 진즉에 꿇었지…….’ 전대성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남들과는 좀 달랐다. 철저한 약육강식! 약해 보이면 오히려 뜯어먹히는 게 그가 겪은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쫓기더라도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되는 게 이 바닥 생리였다. “대표님,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대성이 약속을 잡은 사람은 성원그룹의 최진태 이사였다. 그의 비서가 시간이 살짝 늦은 전대성 때문에 안달이 났는지 미리 가게 앞까지 나와서 전대성을 마중했다. 최진태가 기다리고 있는 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대성이 먼저 운을 띄웠다. “오는데 차가 좀 막혔습니다.” 성원그룹 창업자의 둘째 아들이자 유력한 후계자. 최근에는 모친인 윤미경 감사가 대놓고 그룹의 인사권을 휘두르며 최진태에게 사내 권력을 몰아주고 있었다.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하는 애송이!’ 전대성이 최진태를 바라보는 단적인 시각이었다. “아이고! 이거 얼굴 뵙기 힘든 분이신데…… 이렇게 직접 연락을 다 주시고! 앉으시죠.” 너스레를 떨며 앉은 채 전대성에게 인사를 건네는 최진태였다. 다소 무례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전대성은 속으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같은 기업인들끼리 종종 이런 자리 마련하려고 합니다.” 같은 기업인이라는 말이 거슬렸는지 최진태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전대성을 응시했다. “서울 강남으로 진출하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캐피탈 사업이 꽤 잘 되나 봅니다…….” 사채업자 주제에 같은 기업인이라고 말하는 전대성이 고까운 최진태였다. 하지만 대놓고 그럴 수 없어서 ‘캐피탈’이라는 단어로 순화해서 표현한 것이었다. “이제는 금융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해야지요…… 언제까지 동네 뒷골목에서 전당포나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돈이 몰려야 투자가 일어나고…… 그렇게 결국 경제가 발전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대기업을 무작정 국민의 적으로 몰아가니…… 쳇!”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자들이야 항상 있죠. 그런 버리지 같은 놈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버러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전대성이었다. 최진태는 그런 전대성의 단호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들 앞에서는 올바른 척을 하지만 그런 놈들이 뒤에서는 더 구리더군요…….” 그때 밖에서 점원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정갈하게 차려진 일식 코스였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전대성은 전채 요리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몇 개월 전의 일을 회상했다.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최진태 이사는 일개 사채업자에 불과한 전대성에게 연락을 해왔다. 전대성은 그의 친모인 윤미경이 강남의 큰손들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됐으리라 짐작했다. 전대성은 당시에 벌써 강남 큰손들에게 돈을 대주는 전주로 올라선 상황이었다. 이번에 강남에 진출하는 건 그런 큰 손들을 제치고 자신이 직접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덥석 안 받은 게 묘수였지…….’ 전대성은 자신이 뭘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대기업 후계자라지만 쓸 수 있는 현금은 한계가 있었다. 최진태는 전대성의 현금동원력이 필요했고, 전대성은 성원그룹의 명성이 필요했다. 둘은 서로 필요한 것이 확실한 사이였다. “근데…… 전 사장님께서 오늘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최근에 귀찮은 일에 좀 휘말려서 말이죠…….” “편하게 말씀하시죠. 저희 사이에 뭐 체면 차릴 거 있나요?”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최진태는 스스럼없이 너스레를 떨었다. 최진태는 오만했지만, 묘하게 상대의 기분을 맞출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재벌가 서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자각하고 살아온 결과인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 자들이 저희 라성캐피탈이 보험사기에 연루됐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닙니다…….” “도대체 누가 전 사장님을 건드린다는 겁니까?”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성원화재의 몇몇 보험조사관들이 라성캐피탈을 지목했다고 하더군요.” “하아! 이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제 코앞에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있었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책상을 한번 쾅 치며 과하게 대꾸하는 최진태였다. “괜히 맞서서 대응하는 것보다는 최 이사님을 통해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올라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우리끼리 해결하는 게 낫죠. 제가 회사에 들어가면 잡음이 안 생기도록 지시를 해 두겠습니다. 하하!” 뭐가 좋은지 낄낄대고 웃는 최진태였다. 이제는 판을 자기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싶은 그였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최진태는 먼저 전대성이 자신의 용건을 꺼내놓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대성은 말이 없었다. ‘이 새끼가…… 지 필요한 것만 쏙 빼 먹겠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최진태는 그리 인내심이 큰 편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건 생각해 보셨나요?” 최진태는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해외사업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왜 홍콩에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한국이 아닌 해외에 투자해야 하는지도요…….” “그야 이제는 글로벌 시대니까요!” 한마디로 정리하는 최진태였다. 그는 왜 그걸 이해 못 하냐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외국 법인은 자금추적에서도 자유롭죠. 대한민국에서 기업하는 사람들 어떻게 취급합니까? 재벌이다 정경유착이다 하며…… 전부 죄인 취급하고 세금 매길 생각만 하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기업이 돈을 벌어야 경제가 도는 데 그걸 모르고 어리석은 소리나 해대는 겁니다! 그러니 기업이 해외로 갈 수밖에요!” 언뜻 보면 최진태는 기업가의 신념에 따라 해외사업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대성도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럴듯한 해외 계열사를 차려서 성원그룹을 꿀꺽하겠다는 거겠지…….’ 전대성은 최진태가 성원그룹을 망가뜨리건 삼키건 상관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자신이 투자한 만큼 뽑아낼 수 있는가였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금융투자회사가 되려면 천만 달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돌리는 최진태였다. “천만 달러라면?” “100억이 조금 넘겠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며 뜸을 들이는 전대성이었다. 그는 100억이 아까운 게 아니었다. 100억을 투자해서 1,000억을 벌 수 있으면 얼마든지 투자할 그였다. 그가 고민하는 건 그 1,000억을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는지였다. “최 이사님, 제가 투자를 해드리죠.” “정말입니까?” “대신,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최진태는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하하! 저를 너무 속 좁게 보신 거 아닙니까? 전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사람입니다. 제가 투자금만 받고 누구처럼 입만 싹 닦을 줄 아셨나요?” “이사님의 장인어른을 소개받았으면 합니다…….” “네?” “한승일 시장님 말입니다.” 갑자기 치고 나오는 전대성의 요구에 최진태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장인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함부로 부탁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최진태는 모친인 윤미경이 얼마나 법조계 집안과의 결혼을 위해 애를 썼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본처의 아들이었다면 결혼상대자를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테지만, 윤미경은 최창식 회장의 첩이었다. 대단한 집안일수록 굳이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결혼을 원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윤미경 또한 끈질겼다. 서자인 아들 최진태가 그룹 경영권을 차지하려면 검찰 권력이 필요했다. “……전 사장님, 아직 장인 어른에게는 제 계획을 다 말씀드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럼, 이제라도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한두 푼도 아니고 100억 원짜리 해외 법인인데…… 장인어른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진태는 말문이 탁 막혔다. 자신의 장인 한승일은 검사장 출신의 지자체 선출 시장이었다. 연남시의 민선 시장. 한승일은 은근히 최진태와 그의 모친 윤미경을 무시하고 있었다. 결혼 초기부터 그런 기 싸움에 휘말렸던 최진태는 장인의 얘기가 나오자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는 해외 계열사를 만들지 못하면 성원그룹 경영권에서도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말씀은 한번 드려보겠습니다. 하지만 장담은 못 드리겠군요.” 전대성은 자신이 1,000억을 먹으려면 한승일 시장급의 배경은 필요하다고 봤다. 그 배경을 가지고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었다. ‘언제까지 사금융에 머무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사람 일에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그저 운명에 맡길 뿐이죠.” 운명? 최진태는 속으로 웃었다. 전대성이 얼마나 치밀한 인간인지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빈틈이 없고 실수가 없었기에 대부업 바닥에서 여태까지 커올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전대성이 운운하는 운명에 최진태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가 주는 술을 받으며 고개를 의례적으로 끄덕였다. 그때, 전대성의 전화가 울렸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편하게 받으시죠.” 최진태는 술잔을 비우고는 무심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어…… 그래서? 뭐? 영장 가져왔는지 물어보고 절대 열어주지 마!”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는 전대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이사님…… 박강준이라는 친구 아십니까?” “글쎄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게 누굽니까?” “성원화재 보험조사팀 소속이라는 데 방금 저희 사무실을 털겠다고 경찰이랑 같이 왔답니다…….” 순간 최진태의 머릿속에서는 최창식 회장이 직접 픽업했다는 녀석이 떠올랐다. 자신의 이복 여동생 최은정과 같은 팀을 꾸려줬다는 보고도 들었었다. ‘노인네……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는 거야!’ “전 사장님, 걱정 마시죠. 제가 전화를 해두겠습니다. 보험조사라는 게 원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아닌데…… 참!” 최진태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보험조사 1팀의 이정훈 부장의 번호였다. “어! 이 부장, 나 최진태야. 보험조사 2팀 지금 외근 나가서 활동 중인 거 당장 중지시켜!” ―최은정 팀장이 직접 팀을 끌고 나간 거라……. “야! 이 부장! 정신 안 차릴래! 은정이 걔가 멋모르고 날뛰는 거 컨트롤하라고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거야! 알았어?” 앞에 전대성이 있는 건 잠시 잊은 최진태였다.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에 끼어든 최은정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역시 재벌가 자제들은 참을성이 부족해……!’ 전대성은 그런 최진태를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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